#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18화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이틀 전, 백화점에서 내가 도움을 주었던 여인.
그런데 이건 대체 무슨 경우지?
여인의 행색과 분위기는 도무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때와는 영 딴판이다.
“어떻게…….”
“늦으셨습니다, 한 회장님. 안 그래도 오신 건 봤는데, 언제 저를 아는 체 하실까 싶어서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여인에게 막 대꾸를 하려는 차에 하필 이용문 회장이 노인을 향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왠지 그답지 않은 저자세.
어디 그 하나뿐이랴.
우르르 몰려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떻게든 노인에게 눈도장을 찍으려 노력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한 회장님.”
헐레벌떡 다가온 내 아버지. 아니 진현필 회장도 겸손함의 정도가 지나친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체 저 노인이 누구기에.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정체는 더더욱 궁금해진다.
“현필이 자네는 아직도 그 요트 타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거야?”
“무슨 말씀을요. 그거 정리한 지 꽤 오래됐습니다.”
쩔쩔 매는 진 회장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래도 내겐 명목상 아버지라는 존재인데.
이건 꼭 세상에서 제일 강한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동네 깡패 앞에서 찌그러진 깡통이 되는 것을 목격한 기분이다.
“그걸 왜 정리해?”
“왜긴 왜겠습니까, 아들놈에게 빚진 거 갚느라고 그랬죠.”
진 회장은 힐끗 내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순간 노인의 시선이 내게로 꽂히더니 마치 스캔하듯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들 놈에게 무슨 빚을 졌기에 요트까지 팔아?”
“그런 일이 좀 있었습니다. 아무튼, 기왕 안면을 익히신 마당이니 앞으로 제 아들 놈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네 아들을 왜 나한테 부탁해.”
노인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이내 나를 향해 다시 시선을 꽂은 그는 신기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세상 좁다더니…… 하필 내 딸이 현필이 자네 아들과 연이 닿을 줄은 또 몰랐군.”
“네?”
진 회장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와 여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상관하지 않은 채 여인과 무언가를 속삭이던 노인은 곧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어 내게 들이밀었다.
“듣자 하니 우리 희진이가 자네에게 빚을 졌다고 하는 것 같은데, 조만간 식사나 같이했으면 싶군. 아니, 그러지 말고 행사 끝나고 시간 좀 내주겠나?”
“…….”
일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나를 향했다.
그것도 당황스러운데, 하필 이용문 회장까지 내 등에 손을 대며 자조적인 투로 말을 뱉어냈다.
“아무래도 우리 약속은 다음으로 미뤄둬야겠군.”
“…….”
왠지 현실감이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천하에 이용문 회장이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저자세를 보이는 것은.
쯧, 이거 슬슬 기분이 이상해지려고 하는데.
“죄송하지만 오늘은 여기 계신 이용문 회장님과 선약이 있어서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따님을 도운 것에 대한 보답은 이 선물로 충분하니 굳이 따로 시간을 내실 필요는 없으실 듯합니다.”
“그 선물이야 내 딸이 한 것이고, 난 나 나름대로 보답을 하고 싶어서 그런 걸세.”
“하지만…… 굳이 그러시다면 다음 주 월요일쯤엔 시간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때라도 상관없으시다면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
쳐다보는 노인의 눈빛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무안한 마음에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려는 찰나, 다시 이용문 회장의 말이 날아들었다.
“어른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끝내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
약속 당사자가 양보를 하겠다 상황에서야 더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곤 슬쩍 노인을 쳐다보자 그가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행사 끝나는 대로 내 집에서 보지. 주소는 우리 희진이가 알려줄 게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곁에 서 있던 여인이 내게 다가왔다.
곧 지갑에서 꺼낸 메모지 한 장을 내게 건넨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하게 됐어요. 이렇게까지 부담을 드리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아마 찾기 어렵지는 않으실 거예요.”
여인은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몸을 돌렸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은 이제 차마 감당할 수 없을 정도.
“너, 한 회장님과 어떻게…….”
내내 지켜보던 진 회장 역시 입을 뻐끔거리며 다가왔지만 하필 그 타이밍에 정부 관료중 하나가 끼어들며 그를 낚아채 갔다.
“진현필 회장님, 오늘 행사에서 있을 교두연설의 리허설을 잠시 진행하겠습니다.”
“잠시만. 아니 그게…….”
멀어져 가는 진 회장의 얼굴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나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는 마당에 설명할 방법이 있어야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여인이 건네준 메모지를 쳐다보려는 순간, 저편에서 김판우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회장님!”
내내 존재감 없이 찌그러져 있던 그는 어느새 노인을 따라나서고 있었다.
주춤한 노인이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돌렸고,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간다 싶더니 갑자기 노인의 입에서 호통이 내질러졌다.
“우영중공업에 잡힐 담보가 있기는 해?”
“그러지 마시고……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회장님 아니면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곳도 없어요.”
왠지 돈 이야기가 오가는 분위기였다.
“내가 자선사업가인 줄 알아? 일단 담보물부터 확보하고 찾아와.”
역시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대화 내용.
이로써 노인의 정체가 뭔지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기업을 대상으로 한 여신제공업자쯤?
재계의 인물들이 죄다 쩔쩔 맬 정도인 것으로 봐선 그것도 꽤나 대단한.
젠장, 그나저나 다 죽어가던 우영그룹이 어떻게 IMF를 극복했던 것인지가 의문이었건만, 이제 보니 저 노인의 도움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자네 저 양반이 누군지 알고는 있는 건가?”
행사가 시작될 무렵 이용문 회장이 갑자기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
얼핏 본 그의 얼굴엔 미소가 잔뜩 지어진 상태다.
“기업대상 개인 여신 시장의 큰 손쯤 되시는 분 같은데, 아닙니까?”
“그럼 알고도 거절했던 거야?”
“아니요, 그저 지레짐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저분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겁니다. 자고로 약속은 지키라고 하는 것인데, 당연히 회장님과의 선약을 지키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
이용문 회장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곧 피식 하고 웃음을 뱉어낸 그는 저 편에서 여전히 김판우와 대화를 하고 있는 노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 양반이 바로 한명호 회장일세. 이 나라 부동산 3대장 중 하나이자 막대한 현금 동원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지. 아마 하루에 굴리는 현금만 수천억 정도? 실은 내 부친께서도 한때 저 한 회장의 도움을 받았던 때가 있었어.”
하루 수천억 원을 굴릴 정도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현금 동원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별 관심이 없음을 표하려 어깨를 들썩여 보이자 이용문 회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한명호 회장 같은 기업대상 사금융업자는 개인을 상대로 하는 사채꾼들이나 은행과는 달라. 그들은 정작 이런 시기엔 피도 눈물도 없지만 저 양반은 자신의 소신에 따라 여건과 관계없이 끝까지 투자를 하는 편이거든. 결국 알아둬서 나쁠 것은 없다는 뜻이야.”
“네, 명심하죠.”
대답과는 달리 끝내 관심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향후 내가 사채를 쓸 상황은 그려지지가 않거든.
그나저나, 내 말이 완곡한 거절의 의미임을 알고서도 끝내 고집하던 그이 태도는 좀 의외였다.
혹시 자존심이 상했었던 걸까.
돌아서며 내비치던 눈빛이 좀 그런 것도 같고.
***
“여긴가?”
행사 후, 난 억지스럽게 맺어진 노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다.
내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그의 저택은 한눈에 봐도 ‘내가 바로 이 나라의 현금 왕이다.’하는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컹컹!
벨을 누르자 달려온 것은 육중한 덩치를 가진 도베르만들이었다.
그것도 무려 3마리나.
저 정도면 다른 보안시스템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뚱맞은 생각을 하고 서 있을 무렵 예의 그 여인이 덜컥 문을 열고 나왔다.
“오셨어요?”
그 짧은 사이 그녀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까는 화려한 장미 같았다면 지금은 또 청초한 금강초롱 같은 느낌.
이건 무슨 카멜레온도 아니고. 어떻게 만날 때마다 매번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듯 그녀가 제 얼굴을 매만졌다.
이런 실례를.
어색한 마음에 손사래를 치자 그녀가 표정을 밝힌다.
“오시는 길이 어렵지는 않았나 보죠? 원래는 제 남편이 모시러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하필 조금 전에 바쁜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우게 되었네요.”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저도 집이 근처라서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셨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일단 들어가시죠,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막상 가까이서 본…… 가만, 이름이 희진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녀의 얼굴에선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왔다.
화장으로 가리긴 했어도 웃을 때마다 보이는 눈가의 주름.
나이가 대충 서른 후반쯤일 거라는 내 짐작이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사실이라면 꽤나 곱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서 오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명호 회장은 마침 정원을 가꾸고 있던 중이었다.
그곳에서 대화를 나눌 생각인지, 넓게 깔린 데크엔 티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었고, 햇빛을 막아주는 타프도 미리 설치가 되어 있던 상태였다.
“들게나.”
먼저 자리에 착석한 한 회장은 찻잔을 손에 쥔 채 조심스럽게 나를 주시했다.
마치 정육점 쇼케이스에 진열된 소고기가 된 기분 같다고나 할까.
도가 지나쳤음을 느꼈는지 결국엔 곁에 앉아 있던 희진이 그를 나무랐다.
“사람 무안하게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시면 어떡해요, 아버지.”
“흠, 내가 그랬나? 미안하네. 내가 습관적으로 사람의 상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 상은 좀 어떻습니까?”
“…….”
기습적으로 받아친 질문에 한 회장이 당황의 눈빛을 보였다.
그도 잠시, 곧 헛웃음을 뱉어낸 그가 이외의 말을 뱉어냈다.
“그걸 모르겠다는 말이지……. 실은 자네를 처음 봤을 때도 느낀 건데, 뭔가 좀 독특한 느낌이었어.”
“어떤 면에서 독특하다는 거죠?”
“글쎄, 뭐라 표현을 하기가 좀 애매하군.”
“…….”
그는 말을 잇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애써 태연한 척 찻잔을 들려는데, 다행스럽게도 대화의 주제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그런데 이 서방은 어딜 갔기에 손님이 왔는데도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그이는 우영중공업 김판우 회장님과 미팅이 있어서 만나러 나갔어요.”
“쯧쯧, 김판우 그놈은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리려는지 원. 기왕 일이 그렇게 된 마당이면 담보만큼은 확실하게 받아 두라고 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단단히 못 박는 것 잊지 말고.”
대화의 맥락으로 봐선 저 여인의 남편도 집안일을 거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장인이 이 나라 최고의 부동산 재벌에 현금 왕인 마당에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이유가 있을까.
그나저나, 대화의 맥락으로 봐선 김판우가 결국엔 저 노인의 도움을 받는 것에 성공한 느낌인데.
한명호 회장을 위해서라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절대로 마지막은 아닐 겁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