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17화
“당황하지 마시고 천천히 찾아보세요, 고객님.”
그림으로 봐선 아무래도 지갑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나마 백화점 직원의 친절한 대응을 마음속으로 칭찬하려는데, 갑자기 곁에서 함께 지켜보던 김 비서가 안타까움의 말을 뱉어냈다.
“곤란하겠네요. 마음 단단히 먹고 선물을 사려고 온 것 같은데…….”
백화점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인의 행색 때문에 하는 말인 듯싶었다.
닳고 닳은 청바지와 구겨진 라운드 티셔츠는 둘째 치고, 메고 있던 가방에 손때가 잔뜩 묻은 것을 보면 확실히 넉넉한 형편은 아닌 듯 보였다.
“쯧…….”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젊었을 적 나 역시 저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나마 저 직원이야 여인의 행색을 멸시하는 눈초리는 아니었지만, 당시 내게 쏟아진 시선들은 어찌나 차가웠던지.
고작 좋아하던 이성에게 줄 지갑 하나를 사려다 인생의 회의를 느꼈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그게 95년도쯤이었군.'
막상 생각해 보니 지금으로부터 불과 3년 전일이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직전.
하지만 그나마도 그 여인과는 끝이 좋지 않았고, 결국 그게 내가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먼저들 차에 가 있어요.”
절로 몸이 움직였다.
그사이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지갑을 찾던 여인은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고, 직원은 그녀를 최대한 달래려 노력 중이었다.
“고객님, 당황하시지 말고 찬찬히 찾아보세요. 혹시 소매치기를 당하신 거면 제가 대신 경찰에 신고를…….
“저기요, 미안하지만 잠시 나 좀 볼까요?”
직원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자칫 여인에게 수치심을 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네, 고객님.”
다행히 문제의 여인이 아직까지는 눈치를 채지 못한 상황.
곧바로 카드를 내밀며 여인을 대신하여 결제하겠다는 말을 건네자 직원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고객님께서 왜…….”
“그러게요……. 아무튼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지 않게끔 처리해 주세요. 물건은 내가 간 다음에 저분에게 전달해주시면 됩니다.”
“…….”
직원은 멍한 와중에도 내 지시를 따랐다.
결제한 카드를 돌려받고 다시 돌아선 순간, 차에 가 있어야 할 김 비서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죠.”
행여 오글거릴 말이 나올까 싶어 선수 쳤다.
덕분에 뻐끔 거리던 입을 닫히게 만드는 것엔 성공했지만, 대신 김 비서는 차에 오를 때까지 내내 웃음기를 눈에 달고 있었다.
그러지 마.
솔직히 내가 나선 이유는 나조차도 이해가 안 가니까.
단지 동정심이었는지.
아니면 내 옛 경험이 영향을 미친 건지.
확실한 것은 저 장면을 보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는 건데.
그 점으로 봐선 현승이의 오랜 습관이 배어있는 이 몸의 본능적인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유별났던, 놈의 그 습관.
***
“저, 고객님. 일단 진정하시고요. 위로가 되실지 모르겠지만 고르신 지갑은 저기 가시는 신사 분께서 이미 결제를 해주셨습니다.”
“네?”
희진은 깜짝 놀란 얼굴로 직원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비록 정신은 반쯤 나간 상태였지만, 누굴 가리키는 건지는 금세 알 것 같았다.
창피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자신을 향해 당당히 걸어왔던 남자.
“저 분이 왜…….”
애초 희진도 사내의 접근을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 창피한 마음에 더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거고.
하지만 사내는 오로지 직원과만 대화를 이어갔고, 그녀의 입장에선 단순히 물건에 대한 문의를 하러 온 손님쯤으로 생각할 수밖엔 없었다.
“이상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낯이 많이 익은 얼굴인…… 아!”
골똘히 생각하던 희진은 불현듯 사내의 정체를 깨달았다.
재계에선 꽤 유명했던 인물.
재우그룹의 골칫거리이자 둘째 아들인 진현승.
가뜩이나 재계의 소문에 민감한 집안, 그것도 장녀인 그녀로서는 당연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여보!”
그때, 저편에서 그녀의 남편이 달려왔다.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바로 그녀가 내내 찾고 있던 지갑.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희진은 허탈한 얼굴로 남편을 쳐다봤다.
“그게 차에 있었어요?”
“그래, 좌석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
“다행이네요, 난 또 잃어버린 줄 알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장모님의 유일한 유품을 잃어버리면 쓰나. 회장님. 아니 아버님께서도 그거 하나만큼은 애지중지 하시다가 주신 물건이잖아.”
“그러니까요. 아무튼 고마워요, 여보.”
희진은 남편에게서 건네받은 지갑에서 은빛의 다이너스 카드를 꺼내들었다.
멍한 눈으로 그 카드를 쳐다보던 직원은 당황한 기색으로 그녀를 만류했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취소를 하고 다시 결제를 하려면 아까 그 신사분의 카드가 필요합니다.”
“알고 있어요. 취소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갑 하나를 더 사려고요.”
“…….”
여직원은 눈을 끔뻑였다.
그사이 지갑을 고른 희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직원을 향해 말했다.
“이건 아까 그 신사 분에게 드릴 물건이니까 예쁘게 포장 좀 해주세요.”
“…….”
***
이틀 후, 나와 진 회장은 재우그룹을 대표하여 총리주최 경제인 오찬 회의에 참석했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진 회장님.”
장소는 강남에 있는 유명 호텔의 컨벤션센터.
초대 손님이 꽤 많았던 탓인지 그 큰 홀이 벌써부터 사람들로 꽉 차 있던 상태였다.
“저 친구, 오랜만이군.”
홀에 들어선 진 회장은 나를 홀로 둔 채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익히 예상은 했던 상황.
기왕이면 재계 분위기라도 살필 요량으로 삼삼오오 몰려 있던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누볐다.
“오! 진현승 실장. 역시 자네도 초대를 받았군. 안 그래도 혹시 자네가 오지 않나 싶어서 찾고 있던 참이었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참석자 중엔 삼정그룹 이용문 회장도 끼어 있었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삼정전자만큼 수출을 주도하고 있는 곳은 또 없으니까.
그나마 이전 만남에서 꽤 속 깊은 대화가 오고 갔던 덕분인 듯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유난히도 호의적이었다.
“자네 들었어? 저 친구가 재우그룹 진현필 회장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 같은데?”
“그렇다는군요. 진 회장이 저 친구 때문에 내내 속만 썩인다고 투덜대더니, 최근 들어선 아주 그 말이 쏙 들어갔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최근에 저 친구만큼 두각을 보이는 2세들이 흔하지는 않으니까.”
“제 말이 그겁니다. 대체 저런 아들을 두고 진 회장은 웬 걱정이 그리 많았던 건지 원. 솔직히 사내놈들 중에 사고 한번 안 치고 큰 놈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저 친구 대체 이용문 회장과는 언제 저렇게 친분을 쌓은 건지 모르겠네요.”
이용문 회장과의 독대는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다.
한마디로 그런 거지.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자신들은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이용문 회장과 저렇듯 허물없이 대화를 하고 있느냐는.
대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파장은 더 커져만 갔다.
“어? 저기 한명호 회장님 아니야?”
그때,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입구 쪽으로 몰려갔다.
얼핏 눈에 보인 것은 꽤나 오래된 수트를 걸친 채 나타난 노인.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내 관심을 끈 것은 노인의 곁에서 함께 웃고 있는 30대 후반쯤의 여인이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낯이 많이 익다 싶은 얼굴이었다.
누구였더라?
분명 어디선가 봤는데…….
“참, 자네도 소식 들었나? 내년 초쯤 거래소에 달러선물 시장이 개설된다고 하더군.”
곰곰이 생각을 하던 와중 이용문 회장의 말이 날아들었다.
딱히 저쪽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 그는 들고 있던 종이 한 장을 내게 내밀고 있던 상태였다.
“그럴 때가 됐죠. 지금처럼 환 헤지 수단이 변변치 않은 상황에선 수출기업들이 살아남을 수가 없을 테니까요.”
무심코 대꾸하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역시 삼정은 삼정이라는 건가.
종이엔 일반적인 기업체라면 쉽게 접근할 수 없을 향후 정부 정책들이 잔뜩 적혀져 있던 상태였다.
“역시나 예상하고 있었다는 투로군. 내가 이래서 자네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니까?”
이용문 회장은 옅은 미소와 함께 다시 종이를 받아들었다.
이내 그의 입이 다시 열리려는 찰나, 누군가 이용문 회장을 향해 아는 체를 하며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회장님.”
한눈에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우영그룹의 김판우 회장.
중공업계에선 꽤 유명한 인물.
젠장, 저 인간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회귀 전, 나와는 꽤 악연이 있었던 존재였던 터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김 회장도 그간 별고 없으셨지요?”
“별고가 왜 없었겠습니까. 아주 요즘 같으면 죽고만 싶습니다.”
“이해합니다. 요즘 같은 때에 중공업 분야를 끌고 가기가 쉽지는 않죠. 실은 우리 삼정중공업도 적자 폭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라서 골치를 썩고 있는 상황입니다.”
분위기상 왠지 빠져줘야만 할 것 같았다.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는 김판우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막상 자리를 뜨려는 순간 이용문 회장이 대뜸 내 팔을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
“약속 잊었어? 내게 시간 내주기로 했었잖아. 자네 아버지께도 미리 양해를 구해둔 상태니까 그리 알아.”
당황스러운 마음에 진 회장이 있던 방향을 쳐다봤다.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쩐지, 이용문 회장을 앞에 두고 웬일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싶더니.
“이 친구는 누구…….”
순간, 김판우 회장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굳이 해석하자면 ‘천하의 이용문 회장이 왜 굳이 이런 애송이에게 절절매고 있는 거지?’ 싶은 표정.
이용문 회장은 즉시 그를 향해 속삭였고, 다시 나를 쳐다본 김판우는 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네가 진현필 회장님의 둘째로군. 반갑네.”
마음 같아선 저 인간이 내민 손을 단숨에 내치고 싶었다.
회귀 전, 저 인간 때문에 우리 군의 전력이 급격히 상승할 기회를 잃었으니까.
정확히는 내가 ADD에서 정부주도로 비밀리에 핵추진 잠수함 개발을 주도하고 있었을 무렵.
당시 정치에 뛰어들어 국회 국방위원으로 까지 진출했던 저 인간이 그 사실을 언론에 흘렸고, 그 탓에 미국의 압력이 들어와 개발이 중단 되는 사태를 맞았었다.
“처음 뵙습니다.”
“그래, 반갑군. 참,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일본 ‘미스비시’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자네가 탄탈륨 코팅 기술을 보유 중이라고?”
“……!”
그는 불현듯 미스비시와 내 연구소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거론했다.
표정만 보면 벌써부터 저들을 대변하기라도 할 듯한 태도였기에 절로 말투가 팍팍해졌다.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꺼내시는 거죠?”
“거참 사람 딱딱하기는. 그깟 특수금속 가공 기술 하나 가지고 일본 정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과 척을 질 필요가 뭐가 있나. 오히려 이 기회에 미스비시와 연줄을 만들어놓으면 좋잖아.”
순간 코웃음이 뱉어졌다.
대체 이 인간은 탄탈륨 코팅 기술이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가진 것인지 알고는 하는 말일까?
그게 일본에게 넘어가면 자위대의 지상군 포격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나마 우리가 군사 분야에서 일본에게 앞서고 있는 것은 육군이 유일한데, 그것마저 내주려고?
아무리 돈에 눈이 멀었다고는 해도 이 정도면 병신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우영중공업에서 직접 개발해서 넘기시지 그러십니까. 아! 그건 힘들겠군요. 우영에게 그럴 만한 기술력이 없으니까…….”
“…….”
김판호의 눈매가 와락 일그러졌다.
뭐라 큰소리를 뱉어내고는 싶지만 차마 이용문 회장의 면전인 터라 참고 있는 듯한 분위기.
의외인 것은 정작 이용문 회장의 태도였는데, 그는 마치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리 즐겁게 하고들 있는 거야?”
그때, 아까 저편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노인이 우릴 향해 다가왔다.
물론 곁에는 예의 그 여인을 대동한 채.
여전히 낯이 많이 익다 싶어 고개를 갸웃하려는 차에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선물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
혹시나 싶어 이용문 회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뭣 때문인지 그는 외려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그사이 한 걸음 더 다가선 여인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지난번 백화점에서는 감사했어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