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16화
머리에 벼락이 내리꽂힌 기분이었다.
내 죽음에 대한 충격도 충격이지만 이러면 역사가 지나치게 뒤틀리는 거니까.
막말로 주인공이 죽었는데 지속되는 영화가 어디 있어.
나비효과고 나발이고를 따지기에 앞서 상황이 이러면 판 자체가 나가리가 되는 거다.
아니지. 생각해 보면 진짜 이 판의 주인공은 죽은 김준이 아니라 현승이 몸에 있는 나인 건가.
“그렇다곤 해도 왜…….”
“충격이 크신 모양인데, 일단 물부터 한잔 드시죠.”
이후 정신을 차렸을 때쯤엔 사내가 얼음이 잔뜩 들어있는 물잔 하나를 내 앞에 들이밀고 있었다.
단숨에 들이켜곤 사내를 쳐다보자 이번엔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슬그머니 내게 건넸다.
“자, 여기…….”
“미안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대체 언제 죽은 거죠?”
“기록에 의하면 올 1월 5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거 중이던 '케이트'라는 여인과 차를 몰고 가다가 함께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케이트?”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동거까지 하고 있었다니.
첫 연애 실패 이후 여자라고는 돌 보듯 했던 나로선 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상황 전개였다.
“그럼 그 케이트 라는 여인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녀는 다행히 큰 부상은 당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흠…….”
누군가 함께 죽지 않았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그나저나 1월 5일이면 정확히 내가 이 시대로 회귀를 한 날인데.
왠지 그게 이 시대의 김준의 죽음에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혹시 그런 걸까?
한 시대에 같은 영혼을 가진 존재가 둘 일 수는 없다는, 뭔가 우주적인 법칙 같은. 뭐 그런 것.
“이건 묘지 위치입니다. 찾아가 보실 생각이시면 참고하시죠.”
“고맙습니다.”
받아는 뒀다만 아마 당장 찾아가는 일은 없을 거다.
내가 내 무덤 앞에 선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니까.
물론 언제가 됐든 한 번쯤은 마주쳐야 할 현실이긴 해도 그게 꼭 지금일 필요는 없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손을 내밀자 사내가 그동안에 들어간 경비를 빼곡하게 적은 청구서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좋은 소식 알려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게 어디 소장님 탓이겠습니까. 그나저나 수고비는 수표로 준비했는데, 괜찮겠죠?”
어려운 의뢰였던 만큼 지불해야 할 대가는 꽤 컸다.
선금을 제외하고도 대략 삼천만 원쯤.
미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행적을 추적했어야 하는 과정을 생각한다면 솔직히 그리 비싸다고만은 할 수는 없는 금액이다.
“상관없습니다. 앞으로 종종 저희 업체를 이용해 주십시오.”
“그러죠.”
힘없이 문을 나섰다.
내 심경을 대변하려는 듯 바깥공기는 무척이나 텁텁했고, 떠 있는 태양도 오늘따라 유독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젠장, 내가 나한테 미안해 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
내 죽음을 전해 들은 여파는 꽤 오래 지속 됐다.
거의 보름가량을 악몽에 시달렸을 정도.
나도 나였지만 당장 미국으로 달려가겠다는 희원을 만류하는 것도 꽤나 힘에 부쳤다.
“휴가 좀 달라니까?”
“어차피 한국으로 묘지를 이장해야 할 것 아니야. 사람 보내서 절차 밟을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
“젠장…….”
희원은 풀죽은 얼굴로 수긍했다.
마음 터놓고 지내던 몇 안 되는 친우의 죽음이 왜 슬프지 않을까.
한동안은 놈도 제정신으로 지내기는 힘들 거다.
이후 내가 마음을 추스른 것은 일주일의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어차피 그의 죽음을 모르고 지낸 시간이 7개월 정도.
그럼에도 별 탈 없이 잘 살아왔던 지난날을 생각해 보니 굳이 굴을 파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오늘은 표정이 좋으시네요, 실장님. 친구분 일을 조금이나마 떨쳐내신 모양이죠?”
“언제까지 그 일에만 묶여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김 비서도 이젠 내 눈치 볼 필요 없습니다.”
“그럼 저야 감사하죠. 참, 모레 총리님 주최로 열리는 기업인 초청 오찬 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었습니다.”
총리주최 기업인 초청 자리에 나를 초대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를 잠시 고민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해 보이자 그녀가 대뜸 서류철을 내밀었다.
“어제 미 국방부에서 신형철갑탄 대금을 완불했거든요. 그것도 죄다 달러로.”
그제야 나를 초청한 이유가 이해됐다.
여전히 달러부족이 지속되는 경제 상황.
그런 마당에 무려 10억 달러가 넘는 뭉칫돈이 한 번에 유입되었으니 정부 부처들이 흥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다.
“알겠습니다, 모레로 예정된 연구소회의는 취소해주세요.”
“네, 그런데 혹시 입고 가실 옷은 있으세요?”
그러고 보니 그게 문제였다.
옷장에 널린 대부분의 수트들은 최소 천만 원을 호가하는 수준.
이런 어려운 시기에. 그것도 정부가 주최하는 회의에 그런 고가의 옷을 입고 갔다가는 자칫 구설수에 오를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이따가 백화점엘 좀 들러야겠군요.”
“그럼 퇴근 후에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최대한 수수하면서도 실용적인 것으로 골라드리도록 하죠.”
김 비서는 생끗 웃으며 방을 나섰다.
굳이 그러겠다면야 반대할 이유는 없지.
가만, 그런데 미군에서 입금을 했으면 내 로열티는?
'호오!'
혹시나 싶어 살펴본 서류엔 내게 입금된 금액 명세서도 있었다.
역시 김 비서답다고 할까.
굳이 요구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도 미리 챙기고 나선 것을 보면 확실히 센스가 넘치는 인물이다.
'정확히 560억이군.'
우려했던 연구소의 운영비는 어차피 삼정에 제공한 기술료로 해결이 됐다.
그럼 이 돈은 당분간은 잉여가 된다는 것이 문제인데.
아무리 금리가 높다지만 이 많은 돈을 단순히 은행에만 넣어두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부동산.'
당장 떠오는 투자처는 바닥을 기고 있는 부동산이었다.
어차피 내가 수익을 확신할 수 있는 우량 주식 종목들은 5년 안에는 주가의 움직임이 거의 없는 것들뿐이고.
그나마 부동산은 확실하게 상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투자의 기본이 불확실성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내겐 부동산만큼 재산 증식수단으로 적당한 것은 또 없다.
'매수하기엔 지금이 딱 적기지.'
IMF 이후 부동산 가치, 특히나 대형 빌딩들의 하락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이었다.
차입 경영이 보편적이던 기업들일수록 충격은 더 컸고, 회생할 방법이라곤 가진 부동산들을 정리하는 것뿐이었으나 어디 한두 군데가 그런 상황이었어야지.
그 탓에 심한 곳은 40퍼센트 이상 시세가 추락한 곳도 있었다.
하지만 회복도 그만큼 빨랐다.
아니, 회복 정도가 아니라 폭등을 했다.
예를 들면 뱅뱅사거리에 있던 600억짜리 건물이 IMF로 300억대까지 추락했지만 불과 4년 사이 다시 1500억까지 치솟았을 정도.
강남 불패라는 말이 아마 그때부터 시작 되었을 거다.
'이 시기에 560억 정도면 어지간한 중대형 빌딩 정도는 매입이 가능할 텐데…… 몇년만 묵혔다가 그걸 되팔면 탈레스 지분율을 최소 4퍼센트 이상 끌어 올릴 자금 정도는 나오겠지.'
“저, 실장님…….”
한참 행복회로를 돌리던 차에 갑자기 김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니 그녀가 들고 있던 핸드백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어차피 퇴근 시간도 다가오는데 지금 움직이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자칫 러시아워에 걸리면 백화점 문 닫을 지도 모릅니다.”
“…….”
***
“어서 오십시오.”
도착한 곳은 압구정동에 있던 재우그룹 산하의 갤러리 백화점이었다.
다행히 폐점까지는 2시간 가까이 남은 상태라 시간적인 여유는 있는 셈.
그럼에도 뭐가 그리 급한지 김 비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거의 뛰듯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거 어때 보이세요?”
2층 남성복 코너에 도착한 김 비서는 진열된 수트들 중 몇 벌을 손짓했다.
가장 먼저 확인 한 것은 역시나 금액.
다행히도 백만 원 안짝의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던 터라 부담은 없을 듯했다.
“일단 이걸로 갈아입어 봐주실래요?”
그녀가 최종적으로 고른 것은 개중 제일 무난해 보이는 쥐색 수트였다.
인간이 참 간사하지.
막상 천만 원이 넘는 옷들만 입고 있다가 그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가격대의 옷을 걸치려다 보니 꼭 하나씩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인다.
“옷걸이가 꽤 좋은 편이시네요.”
단순히 입에 발린 말 같지는 않았다.
얼핏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나로서도 괘 괜찮아 보였거든.
아니, 솔직히 이 정도로 반듯한 이목구비에 날렵해 보이는 몸이면 꽃미남은 아니어도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말은 듣지 않을 정도일 거다.
빌어먹을, 세상 불공평한 것을 여기서 또 한 번 느끼네.
“옷이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닙니다. 요즘 피곤했는지 눈 밑이 좀 떨려서요. 골라준 것으로 하죠.”
이후 그녀는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다섯 벌의 셔츠들과 벨트. 그리고 양말과 넥타이가 손에 잔뜩 쌓일 때까지.
“여기 계산 좀 해주세요.”
결국 만족스러운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지어졌을 때쯤엔 난 거의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이래서였구나.
여자와의 쇼핑은 지옥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실장님. 여기 식당가에 냉면 잘하는 곳이 있는데, 드시고 가실래요?”
“냉면이요?
순간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실은 회귀 전, 내 마지막 식사 메뉴가 바로 냉면이었거든.
사실 죽을 때도 입에서 피를 토한 것이 아니라 냉면 육수를 토했다는 건 나와 하늘만 아는 비밀이다.
“가죠.”
대답은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왔다.
간절해 보이는 그녀의 눈초리도 그랬지만, 나 역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까짓것.
이번엔 먹고 피나 한번 토해볼 생각이다.
“아 참, 기왕이면 양 비서도 부르세요.”
대기 중일 양 비서를 홀로 둘 수 없어 불러들였다.
그러고 보면 셋이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게 된 것은 오늘이 처음인 건가?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변변한 회식 자리 한번을 마련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굳이 냉면이 아니라도 상관없으니 먹고 싶은 것들로 주문해요.”
“그럼 전 불고기 전골로 하겠습니다.”
양 비서는 역시 덩치에 맞는 먹성을 보여줬다.
무려 4인분에 가까운 불고기 전골을 홀로 독식.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올 지경이었건만, 웬일인지 그는 빈 냄비를 들고 연신 나를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햄버거 몇 개만 더 먹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카드 줄 테니 양껏 주문하고 와요.”
그는 기어이 5개나 되는 햄버거를 손에 들고 다시 나타났다.
폐점시간이 가까운 것을 모를 리는 없고.
아마 집에서 혼자 햄버거 파티라도 할 모양인데, 저러다 살이 더 찌면 운전석에 들어갈 수는 있으려나 모르겠다.
“다 먹었으면 이제 슬슬 가죠.”
다시 1층으로 올라온 우린 곧장 주차장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우연이었을까.
남성용 엑세서리 코너를 지나칠 무렵 대략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인 한 명이 당황하며 자신의 가방을 뒤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내 지갑이 어디로 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