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세계의 귀환자-224화 (224/225)

외전 16

엘리가 물었다.

“심장을 찌르면 되나요?”

“네 마음대로 해. 목을 베도 되고, 심장을 찔러도 되고. 엉망진창이긴 해도 그렇게 쉽게 죽진 않을 테니 적당히 고통을 주다 죽일 수도 있을 거야.”

“그거 좋네요.”

엘리는 용황제에게 다가가서, 그 심장을 용우가 준 검으로 깊숙이 찔렀다.

“커억…….”

검에 찔리는 순간, 넋이 나갔던 용황제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엘리는 그 사실에 만족하며 미소를 지었다.

“수백 번도 더 이 순간을 상상해 왔어.”

“…….”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네.”

“너, 는…….”

“엄마의 복수야. 그리고 내 복수이기도 하고.”

“크, 크… 허어억…….”

용황제는 웃으려고 한 것 같았다. 엘리를 비웃으며 저주의 말이라도 퍼부으려고 했을 터.

하지만 엘리는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칼날을 돌려서 그가 웃음 대신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다.

“위대하신 용황제 폐하께서도 칼에 찔리면 말도 잘 못 하고, 아파서 비명 지르시는 분이었네. 여태까지는 너무 위대하신 나머지 똥도 안 누시는 분이 아닐까 싶었는데, 당신도 사람 새끼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해서 기뻐.”

“이, 이…….”

“용황제 폐하의 옥음을 듣는 영광은 사양할게. 잘 생각해 보니 당신이 스스로 저지른 일들을 죄라고 생각할 것 같지도 않고, 뉘우칠 일은 더더욱 없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그냥 닥치고 지옥으로 꺼져. 그렇게 고통받다 보면 자기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날이 오겠지.”

어깨를 으쓱한 엘리가 용황제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퍼억!

스스로는 전투능력이 형편없다고 말한 엘리였지만, 그건 전투기술을 연마한 전문가들에 비해 그렇다는 뜻이다. 그녀의 신체능력도 일반인보다는 월등히 강했다.

일격으로 용황제의 코뼈가 부러지면서 그가 뒤로 쓰러졌다.

엘리는 그 위에 올라타서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퍼억! 퍽! 퍼억……!

엘리의 두 주먹이 피로 물들었다.

용황제의 얼굴을 처참하게 뭉개놓은 엘리는 후련해하는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심장을 찌른 검을 회수한 엘리는 잠시 칼날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다가, 그 검을 내려쳤다.

푸욱!

그 일격이 용황제의 목숨을 끊어놓았다.

“…….”

엘리는 한동안 말없이 용황제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숨통이 끊어진 용황제의 영혼을 구세록의 지옥에 처넣은 용우가 물었다.

“만족했어?”

“으음…….”

엘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평생의 원수를 자기 손으로 죽였는데도 그래?”

“잘 실감이 안 가서 그런 것 같아요.”

픽 웃은 엘리는 용황제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붉은 피를 흘리고, 주먹으로 때리면 얼굴도 뭉개지고, 고통 때문에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고…….”

죽은 용황제에게서는 고약한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엘리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죽음을 보아왔으니까.

“그냥 사람 새끼였군요, 정말로.”

용황제는 신처럼 위대해 보였다. 엘리는 그를 증오할지언정 그의 존재를 작게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 엘리의 손에 죽은 용황제는 그냥 사람 새끼에 불과했다.

그 사실이 엘리에게 묘한 감흥을 안겨주었다.

엘리가 용우를 돌아보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고맙습니다.”

자기 손으로 직접 용황제를 쳐 죽였는데도, 아직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손에 남은 끔찍한 감촉과 피비린내만이 그녀가 겪은 일이 현실임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엘리가 물었다.

“이젠 어쩌실 건가요?”

“남은 일 한 가지만 처리하고 나면, 떠나야지.”

엘리는 그 남은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용우는 마왕들을 절멸시킬 생각이리라.

“사악한 용황제도 사라지고, 신화의 재앙도 사라지고, 그리고 마왕들까지 전부 사라진다니… 세상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고, 모두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것만 같네요.”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엘리는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겠죠.”

절대군주였던 용황제가 사라지고, 그를 추종하며 대륙의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던 천 명의 드라칸까지 사라졌다.

하루아침에 발생한 거대한 권력 공백은 혼돈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평화는커녕 피바람이 세상을 집어삼키리라.

“하지만 그건 우리의 일이죠.”

초월적인 힘을 가진 용우에게 기댈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인간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설령 그로 인해 많은 피가 흐를지라도, 그것은 이 세계의 인간들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이리라.

용우가 물었다.

“넌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야?”

“일단은 저항군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리고 이 소식을 알리고 움직여야겠죠.”

“그러고는?”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 것 같네요. 힘들고 위험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할 수 있겠죠.”

엘리는 후련한 표정으로 용우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제 돌아가죠. 이 소식을 알려주면 모두 기절초풍할 거예요.”

“그래.”

용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리가 용황제의 죽음을 알리자 저항군 수뇌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들은 평생 동안 싸워온 적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사실에 허무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뻐했다.

마침내 절망적인 싸움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는 늘 절망만이 있었다. 목숨을 바쳐 제국과 싸웠으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승리하는 현실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해 왔다.

저항군은 당장 내일부터 맞닥뜨려야 할 현실을 제쳐두고 잔치를 벌였다. 모두가 흥청망청 취해서 용황제의 죽음을 축하하고, 정의가 이루어졌음을 찬미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 * *

용황제가 죽은 다음날 새벽, 엘리는 골목길을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신님이나 따라갈걸!”

용우는 저항군의 잔치에 참가하지 않고 떠났다. 남은 마족과 마왕을 모조리 처치하겠다면서.

엘리는 그를 불러낸 사람으로서, 그가 이 세계에서 하는 일의 끝을 지켜볼까 고민했다. 하지만 저항군 간부로서 이런 날을 기념하는 자리에 빠질 수 없었기에 결국 남을 수밖에 없었다.

“말할 체력 있으면 더 열심히 뛰어!”

그 옆을 달리는 엘리의 호위병, 마우디가 외쳤다.

쉬이익……!

그런 그녀들을 향해 빛을 발하는 화살 다발이 날아들었다. 마법이 걸린 화살이었다.

파바바바밧!

마우디가 돌아서서 화살들을 쳐냈다. 고속으로 날아드는 화살들을 어렵지 않게 쳐내는 그녀의 전투기술은 달인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콰광……!

하지만 그때 그들의 진로 앞이 폭발하면서 건물 벽이 무너져 내렸다.

“젠장!”

마우디가 짜증을 냈다.

그녀는 곧바로 엘리를 붙잡아서 어깨에 들쳐 메고 땅을 박찼다. 초인적인 도약력으로 벽을 박차고 반대쪽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가서 계속 달려간다.

하지만 화살을 쳐내고, 앞에 장애물이 발생해서 주춤한 시점에서 적들이 그들을 따라잡았다.

“엘리, 마우디. 얌전히 투항해라. 너희들의 목숨까지 빼앗고 싶지는 않다.”

다수의 전투원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은발의 청년이 말했다.

모두의 신뢰를 받는 저항군의 핵심 간부 중 한 명이며, 잔치를 벌이고 술에 취해 뻗어 있는 저항군 간부들을 상대로 피바람을 일으킨 배신자였다.

“잘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군. 벨론, 오늘 몇 명이나 죽였냐?”

마우디가 으르렁거리자 은발 청년, 벨론이 말했다.

“사망자가 나온 건 유감이다. 하지만 많은 간부들을 생포했지.”

“마치 간부가 아니면 목숨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군.”

“…….”

벨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희생이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새로운 시대? 네놈의 사리사욕이겠지. 벨론, 어디하고 거래한 거냐?”

“브라인 왕국이겠죠. 예전부터 긴밀한 커넥션이 있었으니까.”

엘리가 끼어들었다.

“벨론, 당신은 아트나의 왕족이죠. 아니, 내가 왜 존대를 해주고 있는지 모르겠네.”

벨론이 놀랐다. 자신의 측근들 말고는 모르는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꿈의 세계에서 알아낸 건가?”

그는 제국의 정복전쟁으로 멸망한 나라, 아트나 왕국의 왕족이었다. 그 사실을 철저하게 감춘 채 저항군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가 말을 이었다.

“브라인 왕국과 커넥션을 만들어둔 건, 언젠가 아트나 왕국을 부활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두 왕가는 사이가 좋았고, 혈연관계도 많았으니까.”

“…….”

“기를 쓰고 우리를 붙잡으려는 걸 보면 그쪽이 우리를 원했나 보지? 정확히는 나겠지. 내가 몽상가라서야, 아니면 황족의 일원이라는 거짓 명분으로 써먹을 수 있어서야?”

“정말 모르는 게 없군그래. 거기까지 안다는 것만으로도 너를 원할 이유는 차고 넘치지 않나?”

“그렇긴 하네.”

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지닌 몽상가의 능력은 저항군에게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능력의 실체를 안다면 어느 세력이나 그녀를 손에 넣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난 이제 누군가의 도구로 살아가지 않을 거야.”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벨론이 손짓하자 주변에 수십 명의 전투원이 나타났다. 그중에는 마우디가 일대일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실력자도 두 명이나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이도 준비했군. 브라인 왕국에서 지원해 준 건가.”

마우디가 식은땀을 흘렸다.

벨론이 말했다.

“엘리, 마우디를 살리고 싶다면 순순히…….”

“난 인질극이 싫어.”

문득 벨론의 말을 자르며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엘리가 흠칫했다.

“화신님?”

“마지막으로 인사나 하려고 왔는데,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상황이지?”

용우가 홀연히 나타나서 엘리에게 걸어왔다.

엘리가 놀라서 물었다.

“마지막 인사라면, 혹시…….”

“이제 더 이상 이 세계에는 마족도, 마왕도 없어.”

용우는 불과 하루 만에 나머지 마족과 마왕을 몰살시킨 것이다.

“이놈은 또 뭐야?”

그때 벨론의 부하 중 하나가 나섰다.

아니, 그는 사실은 벨론의 부하가 아니었다. 브라인 왕국에서 벨론에게 지원해 준 정예 병력이었다.

벨론을 위해 싸우기는 하지만 그의 지시를 받지는 않는다. 오히려 벨론이 그들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가며 싸워줄 것을 부탁하는 처지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저항군 간부 모두가 아는 정보, 용우에 대한 것을 알지 못했다.

“잠깐…….”

“잘됐군. 저놈부터 죽여 버려! 그럼 저 엘리라는 계집도 자기 처지를 깨닫겠지!”

벨론이 그들을 막으려고 했지만, 지휘관은 의도적으로 그의 말을 무시하고 명령을 내렸다. 브라인 왕국 소속의 전투원들이 사납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석궁을 든 자들이 방아쇠를 당기자 마법이 걸린 화살 세 발이 용우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용우 앞에서 전부 멈췄다.

“…어?”

불가사의한 현상이었다.

다들 당황해서 얼어붙은 가운데, 용우가 코웃음을 쳤다.

퍼억!

그리고 정지했던 화살이, 용우에게 날아들었던 몇 배는 더한 기세로 되돌아가서 브라인 왕국의 전투원들을 관통했다.

퍼버버버버벅!

그것도 단지 되돌아가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한 명을 관통하고 나서는 절묘하게 궤도를 틀어서 다른 전투원을, 그리고 또 다른 전투원을 꿰뚫었다.

“아아악!”

“이, 이건 뭐야?”

채 10초도 안 지나서 브라인 왕국의 전투원들이 몰살당했다.

“…….”

벨론은 할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상황이 눈 깜짝할 새에 반전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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