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
용우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관객이 없어져 버렸군.”
<아직 한 명은 남아 있지 않으냐? 곧 사라지겠지만.>
엘리만이 유일하게 남은 이 전투의 관객이었다.
그러나 그녀 또한 이제 곧 죽게 될 것이다. 용황제는 용우가 더 이상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하긴 나머지야 어차피 다 죽여 버릴 놈들이었으니까 상관없나. 그런데 별에 봉인되었던 재앙의 악마는 무슨 소리지?”
<능청을 떠는가? 그래봤자 짐은 네 정체를 알고 있다.>
“그래그래. 그 알고 있는 정체란 게 뭔지 말해보라고.”
이제까지 용우는 용황제의 질문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해 왔다. 그러니 용황제 또한 똑같은 태도로 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용황제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드라칸을 모두 희생시킨 것은 그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단지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황제는 고독한 존재였다. 그가 쥔 권력이, 그가 해내야만 하는 일이 고고한 철혈의 지배자가 될 것을 요구했으니까.
이 자리에서 죽어간 자들은, 용황제에게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었다. 그에게서 비밀을 들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약간, 아주 약간이나마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용황제는 그런 자들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희생시켰다.
눈앞의 악마에게 승리하기 위해, 그로써 인류를 지키기 위해.
이 순간 그는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였다. 이제는 아무도 그가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였다. 용황제는 자신이 죽여 없애야만 하는 적에게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적이기에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용황제가 이런 짓까지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리게 만든 존재니까. 그가 품은 진실을 이야기하기에 이 이상 어울리는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짐은 세계의 전체상을 관측하였다.>
용황제는 세계의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팔라시아 대륙과 오디언 군도 너머의 문명에 대해서.
저 하늘 너머, 광활한 어둠이 지배하는 우주에 떠 있는 달에 잠들어 있는 신화시대의 악마를.
그리고 그보다 열 배 이상 더 먼 곳, 죽음의 별에 봉인된 멸망의 재앙을…….
<그들이 한 시대를 끝냈다. 위대한 신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그들로 인해 끝났지.>
신화는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 정말로 천지를 개벽하고 온갖 기적을 일으키던 신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들은 세계를 침략한 재앙의 악마들과의 싸움으로 사멸했다.
<신들은 지고의 기보, 이계의 일곱 성좌로부터 비롯된 권능을 담은 별의 돌 일곱 개를 만들어 세상을 지켜내고자 했다.>
그러나 7개 중 3개만을 만든 시점에서 그들 모두가 파멸하고 말았다.
<신들은 파멸을 대가로 재앙의 악마들을 세계 바깥에 봉인했지.>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의 바깥, 별의 대기권 너머에…….
학자들만이 그 존재를 학문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고 있는 우주 저편의 달과 그보다 훨씬 더 먼 곳에 있는 태양계의 또 다른 행성에 봉인해 버렸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가 증명했듯이 모든 봉인은 깨지기 위해 있는 것. 영원한 봉인 따위는 없다. 신들은 파멸을 유예시켰을 뿐이다. 언젠가 신들의 힘이 다해 봉인이 깨어나고 재앙의 악마가 다시금 이 세계를 덮칠 것이다…….>
파멸을 막기 위해서는 신들을 능가하는 힘이 필요하다.
인류가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별의 돌 7개를 모두 완성하는 것뿐이었다.
<짐은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것이 신들의 유산을 계승하고 진실을 안 짐의 사명!>
“…….”
엘리는 말문이 막혔다.
용황제가 미치광이로 보여서가 아니었다.
텔레파시를 통해 그의 진심이 느껴져서였다.
‘거짓말이 아니야.’
용황제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삶을 바쳤다. 다가올 파멸을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싸워왔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숨이 턱 막혔다.
엘리에게 있어서 용황제는 증오스러운 악마일 뿐이었다. 그를 타도하는 것은 개인적인 복수인 동시에 이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용황제가 옳았다면?
정의가 용황제에게 있고, 그에게 맞서는 자들이 모두 악(惡)이라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엘리.”
혼란스러워하는 엘리에게 용우가 말했다.
“녀석은 진심을 말하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진심이 곧 진실은 아니지.”
그 말에 엘리는 용우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랐다.
그때 용우는 그렇게 말했다. 엘리는 진심을 말하고 있지만, 그게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저놈 개인의 믿음일 뿐이다.”
<감히 짐이 망상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용우는 빙긋 웃었다.
“엘리, 너는 지금 너무 강력한 텔레파시에 취해 버린 것뿐이야.”
사람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다. 목소리의 높낮이, 빠르기, 음색, 발음 등이 문자로 써놨을 때는 알 수 없는 정보를 전달해 주니까.
텔레파시로 말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
절제되지 않은 강력한 텔레파시는 그 자체로 강력한 공격 수단이다.
인간은 강력한 공감 능력을 가진 존재이기에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런데 타인의 슬픔 그 자체를 머릿속에 직접 주입받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신의 것이 아닌 감정, 자신의 것이 아닌 심상에 정신이 오염되고 만다.
“잘 생각해 봐라. 설령 이놈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도, 이놈이 너한테 한 짓을 용서할 수 있겠냐?”
용황제는 무고한 100만 명을 제물로 바치고, 수많은 인간의 인생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면서 파멸로 던져 넣었다.
그 희생자 중 하나인 엘리는 과연 용황제가 ‘올바른 신념’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인가?
그녀가 겪은 혹독하고 절망적인 삶이, 타인이 추구하는 ‘올바름’을 위해 강제로 지불된 비용이었음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요.”
엘리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로부터 비롯된 강렬한 감정, 그녀를 지금까지 지탱해 온 증오가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된 용황제의 의념을 몰아내었다.
“그래도 재앙의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군.”
용우의 인식이 대기권 밖, 우주 저편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이미 광활한 우주 공간을 돌아다닌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확실히 달에는 뭔가가 봉인되어 있었다. 강력한 힘을 지닌 괴물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태양계의 다른 행성, 지구가 속한 태양계로 치면 수성에 해당하는 행성에는 무수한 괴물들이 돌이 되어 봉인되어 있었다. 인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괴물의 군세였다.
<당연히 진실이다. 네가 바로 그 증거가 아닌가?>
용황제는 용우가 그 둘 중 하나에 속한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용황제는 세계의 진실에 도달한 자였다. 세계를 보는 시각이 이 별의 그 누구보다도 넓고, 깊었다. 그가 스스로를 신에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그 세계관에 속하지 않는 적이 나타나 자신을 위협하니, 자신의 세계관 속에서 그 적을 이해할 수 있는 답을 도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진실을 위해 100만 명을 제물로 바쳤나?”
<그렇다.>
용황제는 부정하지 않았다.
별의 돌-불꽃을 만들기 위해서 100만 명 이상의 희생이 필요했다. 그가 일으킨 정복 전쟁도, 마족을 굴종시킨 것도 모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세 번은 더 그런 짓을 저지를 거고?”
<물론이다.>
용황제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끔찍한 죄악이라고 손가락질당해도 상관없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악마라고 비난한다 해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흔히들 그렇게 믿는 면이 있지. 불굴의 신념은 아름답다. 저토록 눈부신데 아름답지 않을 리 없다…….”
용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사실 아름답기만 한 것 따위는 없어.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추악할 수도 있는 거야. 신념도 마찬가지지.”
신념이란 말의 울림이 아름답기에, 누군가는 그것을 면죄부로 생각하고 만다.
“목적을 위해 전쟁을 일으켜 수도 없이 많은 희생자를 낳고…….”
용우가 용황제가 품은 별의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100만을 넘는 인간을 희생시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영혼을 제물로 바쳐 자신이 휘두를 힘을 완성했지. 그런 대량 학살과 인신 공양조차 ‘신념’이라는 말로 포장하면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아무리 추악하더라도 인류를 구할 수 있다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그 누군가가 너일 필요가 있을까?”
<짐만이 할 수 있었다. 이 광활한 세상에 모래알처럼 많은 인간 중에 오로지 짐만이 진실에 도달했지.>
“너 혼자일 필요가 있었을까?”
<인간의 뜻은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와 같다.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철혈의 의지를 지닌 통치자가 필요하지. 강력한 권력과 올바른 의지를 가진 통치자가 없는 시대에 인류의 힘은 혼돈으로 낭비될 뿐! 짐이야말로 이 시대에 인류의 총력을 모아 세계를 구원할 운명을 가진 자다.>
용황제의 의지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재앙의 악마, 인류 멸망의 첨병이여. 네가 어떤 말을 지껄인다 해도 짐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짐은 인류의 의지를 대변하여 이 자리에 섰도다.>
“별로 흔들 생각은 없어. 네 의지가 흔들리건 말건 상관없거든. 설마 내가 널 설득하려고 이러고 있겠냐?”
<뭣이?>
“그냥 호기심이 좀 들었을 뿐이야. 이 미친 새끼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용우가 웃었다.
“이제 호기심도 해결했으니 끝내주마.”
<착각을 교정해 주마, 재앙의 악마.>
용황제의 마력이 폭풍우가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힘을 끌어 올리는 것만으로 지축이 뒤흔들리고 작열의 사막에 거대한 모래 폭풍이 불어닥친다.
분노하는 것만으로도, 싸울 의지를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재해를 일으키는 자.
그것은 진정 신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힘이었다.
“일시적이지만 종말의 군주를 능가하다니, 좀 놀랍군.”
완전히 종말의 군주를 압도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마력의 크기를 키우는 데 있어서만큼은 경이로운 성취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용우가 양손대검의 형태로 변한 별의 돌-새벽을 허공에다 던져 버렸다. 그러자 그것이 아공간 속으로 사라지고, 대신 또 다른 검이 소환되었다.
그 또한 거대한 양손 대검이었다. 표면에는 시시각각 색이 변해가는 빛의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불꽃의 활, 대지의 로드, 빙설의 창, 새벽의 해머, 광휘의 검까지 성좌의 무기 다섯 개.
하스라 코어, 볼더 코어, 두라크 코어, 소우바 코어, 에우라스 코어까지 군주 코어 다섯 개.
이 열 가지 요소가 하나로 통합된 궁극의 융합체-네뷸라였다.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당연하지 않은 일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야, 내가 왜 네가 변신하는 동안 그냥 구경만 했는지 모르겠냐?”
용황제가 대륙 곳곳의 드라칸을 희생시켜 저 힘을 갖추기까지, 용우가 공격할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용우는 용황제가 완전해질 때까지 그냥 지켜봐 주었다.
드라칸들이 용황제에게 희생당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래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
자신의 호기심을 푸는 것을 우선해도 될 정도로,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오만을 부숴주마.>
용황제가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이었다.
파악!
뭔가가 그의 몸을 베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