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
문득 엘리가 물었다.
“그런데 이 별 전체를 통틀어서라뇨?”
“말을 안 해줬던가? 음, 이 세계가 둥글다는 건 알지?”
“누굴 바보로 아세요? 제가 이래봬도 읽기, 쓰기, 셈법은 물론이고 3개 국어를 한다고요. 학식도 제법 깊거든요?”
“직접 공부한 거야?”
“아뇨. 꿈의 세계에서 얻은 지식이에요.”
“…….”
“헤헤. 인생이 싸우고 도망 다니는 것뿐이었는데 언제 학식을 쌓고 있겠어요? 언어도 정신감응이 있으니까 딱히 깊이 있게 공부할 필요가 없고요.”
“아니, 내가 놀란 건 꿈의 세계에서 그만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용우가 혀를 내둘렀다.
엘리는 리사와 똑같은 몽상가였다. 하지만 몽상가로서의 능력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 올라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일생 동안 그 체질을 이용해서 생존을 모색해 왔을 테니 당연한가?’
용우는 이 세계에 그녀 말고도 다수의 몽상가가 있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어쩌면 몽상가로서의 수준은 엘리가 최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의 돌을 써서 나를 부른 것만 해도 그렇지.’
성좌의 화신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이 세계에서 잊힌 지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만큼이나 오래된 고대의 비밀이다.
그런데 엘리는 꿈의 세계를 몽유하면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꿈이 아니라 이전에 켜켜이 쌓인 꿈속에서 필요로 하는 지식을 찾아내었다.
게다가 별의 돌은 누구나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딱히 의지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워낙 거대한 힘인 데다가 그것을 통제해 주는 안전장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일반인이 이 힘을 쓰려고 했다가는 파멸한다. 일반인만이 아니라 고위 마법사까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엘리는 그 힘을 제대로 끌어내어서 세계 너머에 있는 용우에게까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경이로운 일이었다.
“하여튼 인간이 살 수 있는 세계는 둥근 형태를 하고 있어. 그리고 팔라시아 대륙과 오디언 군도 말고도 사람이 사는 대륙들이 있고.”
“아, 그건 알아요.”
“안다고?”
“네. 꿈의 세계에서 봤어요. 뭐 알아봤자 공간좌표까지 확보할 수는 없어서 가볼 수는 없었지만요.”
“그렇군.”
정말로 엘리야말로 최강의 몽상가일지도 모르겠다.
“제국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다니, 그건 좋네요.”
“넌 뭐든지 기준이 그거구나.”
“인생 전부가 그런걸요.”
엘리가 슬프게 웃었다. 그녀의 인생은 좋든 나쁘든 용황제와 제국의 존재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 두 가지를 빼고는 그녀의 인생을 말할 수 없었다.
“엘리, 넌 용황제가 죽어버리면 뭘 할 건데? 그걸로 만족할 수 있겠어?”
“그건 상상이 잘 안 가네요.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지 아니면 더 뭔가를 바라게 될지…….”
그렇게 말하던 엘리가 눈을 빛냈다.
“그런 걸 물어보시다니, 용황제 처치해 주실 거예요?”
“생각 중이다.”
“제가 일생을 바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무슨 주머니에 든 사탕을 꺼내서 줄까 말까 고민하듯이 말씀하시네요.”
“그런 소리를 웃으면서 하는 너도 참…….”
용우는 엘리의 그런 점에는 살짝 질려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그야 화신님의 힘을 계속 보고 있으니까요. 화신님이라면 진짜로 용황제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을 보고도 ‘용황제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몰라’야?”
“용황제는… 우리 앞에 선 재앙신 같은 존재거든요.”
이 세계 사람들은 용황제를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별격의 존재였다. 고대에 이 세계를 떠났다는 신, 아니면 지금도 인류를 농락하는 마왕 같은 존재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가 없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힘을 모아 대항한다는 게 의미가 없었죠. 저항군을 상대한다는 건 용황제에게는 놀이나 다름없었을지도 몰라요.”
“그걸 알면서도 계속 싸운 거냐?”
“달리 선택지가 없었으니까요.”
엘리가 말하는 ‘선택지’는 현실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리라.
그녀의 능력을 생각하면 분명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저항군의 일원이 되는 대신 원한과 복수를 포기하고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엘리의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 누군가는 현명한 삶이라고 평할 만한 길을 그녀의 마음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용황제의 마음이 흠집이라도 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용황제가 내 존재를 알고, 그로 인해 상처라도 입으면 좋겠다고… 참 비참한 비원이었죠.”
하지만 별의 돌을 손에 넣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힘이 있다면 좀 더 큰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항군이 기회를 만들어준다면, 용황제를 들이받아서 같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헛된 꿈임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엘리가 목숨을 바쳐 성좌의 화신을 초환하겠다고 결단한 것의 배경에는 절망이 있었다.
자신이 뭘 해봤자 용황제에게 상처조차 줄 수 없다는 무력감과 절망감.
그렇다면 허무맹랑하게 들릴지라도 신화의 존재에게 걸어보자. 자기 한 사람의 목숨으로 제국군의 소중한 전력이라도 쓸어버릴 수 있다면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그런데 그 선택이 엘리의 인생에, 그리고 이 세계에 대격변을 가져올 줄이야.
“그래서 지금은 용황제가 없어져 버린 세상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잘 모르겠네요.”
“넌 용황제에게 직접 복수할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
“그건 불가능하죠. 당신이 용황제를 처치해 주신다면, 그건 정말 목숨을 걸고라도 눈앞에서 보고 싶지만요.”
“그냥 상상해 봐. 만약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최고죠!”
엘리가 상상만으로도 흥분되는지 눈을 반짝였다.
“아, 당신이 용황제를 제압하고 저한테 칼을 쥐어주면서 마무리하라고 하거나 하면 가능하겠네요. 그래주실 수 있어요?”
“생각 중이다.”
“그런 일로 사람 놀리는 거 아니에요.”
엘리가 새초롬하게 눈을 흘겼다.
하지만 용우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먼 곳을 보며 말했다.
“진지하게 생각 중이야. 그리고 곧 결론이 나겠지.”
용우가 결론을 낸 것은 다음 날의 일이었다.
* * *
용황제는 눈을 떴다.
“성공했군.”
그는 희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눈앞에는 타오르는 듯 붉은빛을 발하는, 어린애 주먹만 한 구체가 하나 떠 있었다.
별의 돌 ‘불꽃’이었다.
“경하드립니다!”
그것을 제작하는 데 협력한 신하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축하해 주었다.
“공들의 협력이 있었던 덕분이다.”
용황제는 진심으로 신하들의 협력을 치하했다.
그가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 고위 마법사였던 그는 우연히 신화시대의 고대유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별의 돌-광휘를 발견했다.
또한 그는 그곳에서 고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신화 속의 신들, 그들이 남긴 ‘별의 돌 제조법’을.
별의 돌은 애당초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들의 무기였다.
이 세계를 노리는 미지의 재앙, 신화의 괴물을 막기 위해 신들이 벼려낸 최종병기.
그러나 본래대로라면 일곱 개가 존재했어야 할 별의 돌은 세 개뿐이었다.
신들이 세 개만을 완성한 시점에서 파멸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일곱 개 모두가 완성되었다면 신화시대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유적을 만들고 제조법을 남긴 누군지 모를 신은 그런 확신을 남겨두었다.
“짐은 이제부터 이 불꽃을 장악하는 작업에 들어가겠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용황제는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66마왕이 이 세계에 손을 뻗은 것은 신화시대가 끝난 후였다.
신들이 세계의 주인이던 시절, 그리고 그들이 별의 돌을 가진 동안에는 66마왕도 감히 이 세계를 넘보지 못했다.
‘셋의 힘을 가진다면, 나 또한 능히 마왕을 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왕을 멸하고 있는 미지의 존재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리라.
* * *
용우가 팔라시아 대륙에 온지 닷새째.
엘리는 신기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번화한 도시 한복판이었다.
하지만 도시의 번화함 때문에 그녀가 그런 기분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었다.
이 도시가 제국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국령 한복판을 이렇게 당당하게 활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엘리는 약간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은 제국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벨다디아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항군의 간부, 그중에서도 주요 인물인 엘리에게는 막대한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제국령 어딜 가나 그녀의 얼굴이 그려진 현상금 포고문이 있을 정도였다.
엘리가 강력한 정신감응 능력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고위 마법사쯤 되면 그녀의 정신감응 능력에 쉽게 당하지 않는다. 길 가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 제국령 한복판에서 추격당하는 몸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엘리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제국령에 들어오지 않았고, 들어오더라도 철저하게 남의 이목을 피해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대로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중이다.
생김새도, 차림새로 이질적인 용우와 함께 돌아다니는데도 아무도 이상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아까 전에는 고위 마법사와 스쳐 지나갔는데도 그랬다.
그만큼 용우의 텔레파시가 강력한 것이다. 고위 마법사조차 그의 텔레파시에 저항하기는커녕 위화감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문득 용우가 물었다.
“제국이 원래는 대륙 변두리의 국가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죠.”
“지금의 영토를 확정 지은 게 4년 전이고?”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수도가 이만한 대도시일 수가 있지?”
제국의 수도, 벨다디아는 인구 12만을 자랑하는 대륙 제일의 대도시였다.
물론 21세기 지구인인 용우의 기준으로 보면 인구 12만은 흔한 지방도시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용우는 이 세계, 이 시대에는 그 정도면 정말 어마어마한 대도시라는 기준을 이해하고 있었다.
“여긴 원래 벨다드 왕국령이 아니었거든요. 전에는 엘부트라는 이름이었어요.”
“정복하고 나서 천도(遷都)한 거군.”
용우는 사정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말했다.
“예전에 엄마한테 수도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는데… 하나도 안 맞네요.”
“…….”
“하긴 용황제가 천도를 해버렸으니까요. 엄마 이야기는 천도하기 전의 일이었죠.”
쓴웃음을 지은 엘리는, 침묵하는 용우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엄마는 벨다드 왕국의 다섯째 왕녀였대요.”
용우는 굳이 그녀의 이야기를 막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주변에 수많은 행인들이 있었지만 엘리의 이야기는 오로지 용우에게만 들렸다.
“어려서부터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서 일찌감치 마법사의 길을 걸으셨다죠.”
마력을 다루는 초인이 실존하는 사회에서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장차 왕실에 이익이 되는 정략결혼의 소재로 갈고 다듬어지기보다는 마법사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왕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던 분이었어요.”
벨다드 왕국에는 여왕이 즉위한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왕위 계승 서열이 그리 높지 않았고, 본인도 야심이 없었기에 왕위를 탐내본 적이 없었다.
“결국 왕실 마법부를 총괄하는 직위를 받고, 데릴사위를 들여서 혼인하셨는데…….”
그녀와 마찬가지로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던 왕족, 열여섯째 왕자가 피바람을 일으켰다.
“수하들을 드라칸으로 만든 용황제가 단 하루 만에 왕위 계승자들을 몰살시켜 버렸어요.”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는 아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참극의 날, 살아남은 왕족은 다양한 사정으로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몇 명뿐이었다. 그리고 엘리의 엄마 역시 그중 한명이었다.
엘리의 엄마는 젖먹이 때부터 같이 자란 시녀가 필사적으로 전해준 소식 덕분에 왕궁으로 돌아오는 대신 도주를 선택했다.
그때부터 앞날 없는 도망자의 삶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