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
마왕-47은 소멸했다.
용우와 엘리는 마왕-47을 고문하여 얻어낸 정보, 그리고 전리품을 갖고 다시 저항군의 아지트로 돌아와 있었다.
“생명의 돌이라…….”
용우는 피처럼 새빨간 빛깔을 띤 작은 구체를 들고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용우 입장에서 볼 때 마족 제리크는 용황제와 거래하는 하청업자였다.
그리고 그가 용황제에게 납품하는 물건은 ‘생명의 돌’이라 불리는 마법의 산물이었다.
사악한 흑마법, 그중에서도 최고위 수준에 이르러야만 만들 수 있다고 알려진 그것은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기적의 산물이었다.
무수한 인간을 제물로 바쳐서 만들어내는 이것은 사용자에게 아무런 리스크 없이 막대한 마력을 쓸 수 있게 해준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런 걸 모아서 뭘 할 생각이지?’
용우가 분석한 그 실체는 제물로 바친 인간의 생명력과 영혼을 쥐어짜 내어 얻은 영적 자원을 응축해서 안정시킨 결정체였다.
마력석보다 훨씬 뛰어난, 인위적인 가공을 통해서 만들어낸 마력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신매매 조직과 흑마법사들을 통해서 제물이 될 인간을 안정적으로 공급, 그들을 재료로 삼아 생명의 돌을 만들어낸다.
확실히 이 작업은 마족에게 맡기는 편이 좋았다. 생명의 돌 제조 자체가 마왕의 권능을 빌려서 하는 일이었으니까.
‘이미 혼자서도 세상을 씹어 먹고도 남을 놈이 왜?’
용우는 용황제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용황제는 사실상 세상을 정복했다.
‘정확히는 대륙 정복이지만, 이 시대, 이 대륙의 사람들에게는 대륙이 세상의 전부니까.’
또한 용황제의 힘은 이 세계에서는 신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다.
별의 돌 두 개를 가진 그는 물질세계에 강림한 마왕조차 격퇴할 수 있었으니까.
‘딱히 외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용우는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라도 있나 싶었지만, 이 별을 다 뒤져봐도 그런 존재는 없었다.
용황제는 팔라시아 대륙만이 아니라 이 별의 최강자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바다 너머의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서 그곳도 정복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엘리.”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우가 엘리를 불렀다.
옆에서 텔레파시로 저항군 동료들과 통신하던 엘리가 대답했다.
“네∼! 돌아갈까요?”
“일단 너만 돌려보내 줄게.”
“어, 왜요?”
엘리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 모습이 왠지 겁을 집어먹은 것 같다고 용우는 생각했다.
“난 마족을 몇 놈 더 때려잡을 거야. 가능하면 마왕도 좀 잡고.”
“…….”
엘리는 할 말을 잃었다. 군대를 동원해도 토벌할 수 없는 마족을 잡는 일을 무슨 동네 마실 나가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용우가 물었다.
“왜 그래?”
“뭐가요?”
“왠지 돌려보내 준다고 하니 겁먹은 것 같아서. 내가 잘못 봤나?”
엘리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심정을 고백했다.
“…당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줄 알았어요.”
용우가 이 세계에 흥미를 잃고 자신의 고향세계로 돌아가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용우가 피식 웃었다.
“넌 싸우는 데 방해가 될 것 같다고 죽으려고 했던 애가 그런 게 무서워?”
“무섭죠.”
엘리가 굳은 표정으로 용우를 바라보았다.
“목숨을 버리는 의미가 있다면, 그럼 괜찮아요. 다들 그랬거든요. 동료 살리겠다고, 제국군에 협력하는 개자식을 죽이겠다고 많이들 죽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돌아가는 건… 희망이 없어지는 거니까요.”
과거를 떠올리는 그녀의 눈이 아련한 슬픔을 띠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용우가 물었다.
“넌 내가 용황제를 쓰러뜨려 줄 거라고 생각해?”
“그래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뭔가… 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엘리가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정확히 끄집어내지 못하고 답답해했다.
“혹시 넌 용황제가 없어지면 모든 게 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 나쁜 놈이 쓰러져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엘리는 뭐 그런 황당한 소리가 다 있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왜?”
“그야 용황제가 미우니까요. 세상에서 제일 증오하는 원수를 죽여 버리고 싶은데 대의에 입각한 숭고한 목적이 필요해요? 아, 물론 저항군이라는 조직의 간부 입장에서는 그런 목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요.”
“…심플해서 좋군.”
새삼 용우는 엘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에게서는 익숙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예전의 우리와 닮았어.’
예전에는 용우도 그랬다. 마음의 균열에서 피어오르는 원한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용우는 달랐다.
복수는 그를 치유해 주었다. 그는 여전히 악몽을 꾸고, 군중 속에서 수많은 모르는 얼굴들을 보며 마음의 평화를 얻지만 예전처럼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광기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너는 어떨까?’
용우는 원하는 것을 이룬 엘리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엘리가 말했다.
“저기, 그냥 저도 같이 다니면 안 돼요?”
“아까 전 같은 경험을 또 할지도 모르는데?”
“지켜주실 거잖아요. 제가 다칠 일 없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엘리가 애교를 떨며 말하자 용우는 코웃음을 쳤다.
“그랬지. 그럴 거고. 네가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와라.”
“감사합니다! 그런데 마족은 왜 잡으시려는 건데요?”
“내가 마족 잡으면 이 세계에도 좋은 일 아닌가?”
“좋은 일이긴 하죠. 하지만 그건 뭐랄까,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수준의 이야기 아닌가요?”
“그렇긴 하군.”
비유라기보다는 진실 그대로였다. 용우가 마족을, 나아가서는 마왕을 처치하는 것은 인류의 진영 논리를 초월하여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길이다.
“마족과 마왕을 잡는 건 일단 호기심과 흥미, 그리고…….”
용우가 서늘하게 웃었다.
“놈들이 좀 내 나쁜 기억을 건드렸거든. 놈들의 존재 자체가 내 분노 스위치를 쿡쿡 눌러대는지라 그냥 놔두고 싶지 않군.”
* * *
폭풍 같은 나흘간이었다.
제국 수뇌부는 그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허허, 고작 30분 만에 또?”
드라칸이 되어 대마법사의 칭호를 얻은 4명은 한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채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난 나흘간, 아니, 정확히는 어제 오늘 이틀간 전 세계의 마법 전력이 3할은 깎여 나갔다.
마법사가 죽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스물한 번째라니…….”
마왕이 죽어서였다.
어제 오늘 이틀간 66마왕 중 21명이 소멸했다.
그들을 근원으로 삼는 마법 다수를 쓸 수 없게 되면서, 전세계 마법사들의 능력이 대폭 하락해 버린 것이다.
특히 대마법사들은 심각한 전력 감소를 느끼고 있었다. 마법에 통달한 그들은 그만큼 다양한 마법을 쓸 수 있었기에, 소멸한 21명의 마왕을 근원으로 삼는 마법도 많이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역사상 최초로 마왕이 소멸한 것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다.
그 일로 용황제는 제국 최강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4명의 대마법사와 12장군을 긴급 소집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30분 후, 또 하나의 마왕이 소멸했다.
한 시간 후, 또 하나의 마왕이 소멸했다.
그 다음 마왕 소멸은 그로부터 고작 5분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서 뭐가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네 번째 마왕 소멸까지는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마왕 소멸 지점에서 그들이 감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이 방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더 이상 압도적인 힘의 방출은 없었다. 그저 어느 순간 마왕이 소멸했음을 느끼게 될 뿐이었다.
그때 대마법사 중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정보부의 보고다.”
텔레파시로 연락을 받은 것이다.
“좋은 소식이 아니라면 듣고 싶지 않군.”
“유감스럽게도 나쁜 소식이다. 하지만 들어둘 필요가 있는 일이다.”
“뭐지?”
“정보부가 긴급 연락망을 돌려본 결과, 우리와 거래하는 마족 중 예순여덟 명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
“그중 열 명은 위험을 무릅쓰고 마경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았다는군. 그리고 마경 그 자체가 소멸한 것을 확인했다.”
대마법사들이 신음했다.
그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마왕을 소멸시키고 있는 정체불명의 적이 마족들을 하나씩 하나씩 토벌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부가 파악한 것만 저 정도니 실제로 살해당한 마족은 더 많을 것이다. 모든 마족이 제국과 거래하는 것은 아니니까.
“대마법사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는군. 그야말로 불가해의 존재…….”
“대체 왜 저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신 것도 당연하군. 최대한 빨리 해야 한다.”
대마법사들이 신음했다.
그들은 지금 12장군과 번갈아가면서 용황제의 의식, ‘불꽃’ 제작에 참가하고 있었다. 의식의 진행은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고, 앞으로 12시간이 지나면 완성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부디 그 안에 놈의 칼날이 우리를 향하지 않기를 빌어야겠군…….”
대마법사들은 진심으로 그러기를 기원했다.
* * *
용우는 마경을 유지하던 기운이 서서히 흩어지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하하. 이놈들 재미있는 짓을 하는군.”
“네? 뭐가요?”
엘리는 용우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전에 내가 죽인 놈 빼고 대륙에 남아있는 마족이 47명이었거든? 이 별 전체를 통틀어서는 380명쯤 되고.”
“새삼스럽지만 그걸 어떻게 아세요?”
“꿈의 세계에 들어갈 때 네 인식이 넓어지는 것과 비슷해. 난 이 세계 전부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넓어질 뿐이야.”
“아무리 봐도 신인데요, 그거.”
“특정한 존재를 탐지하는 것 정도니까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물론 누가 봐도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놈들이 마족을 감추기 시작했군.”
“감춰요?”
“마경을 없애 버리고 마족들을 은신시키고 있어. 철저하게 하겠다고 아예 마족을 죽여 버리는 놈들도 있는데?”
“마왕이 마족을? 자기 권속이잖아요?”
“꼬리 자르기인 거지. 자기가 위험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공들인 권속을 죽여서 없애 버리는 거야 인간도 하는 일이잖아?”
그렇기는 했다. 하지만 마왕에게 그런 행동을 강요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못해 황당한 일이 아닐까?
“어쨌든 참 하는 짓이 뻔하군.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하루 정도 유예를 줘봐야지.”
“계속할 생각이세요?”
“당연하지. 말했잖아? 놈들의 존재가 나를 화나게 한다고. 전부 없애 버릴 거야.”
“…….”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소멸시키지 못한 불멸의 존재, 66마왕을 몰살시켜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정말로 그 일을 실현할 능력이 있었다.
“은신한 놈들을 찾는 건 그렇다 치고, 아예 권속을 없애 버린 마왕은 어떻게 하시려구요?”
“놈들은 내가 마족을 통하지 않으면 자기 본체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21명의 마왕을 해치우는 동안, 그들과의 전투는 대부분 물질세계가 아닌 정보세계에서 이뤄졌다.
동족이 죽는 것을 본 마왕들은 권속인 마족이 죽건 말건 물질세계로 강림하지 않았다.
하지만 용우는 마족과 마왕의 연결 고리를 이용, 그들의 본체가 있는 정보세계로 가서 그들을 하나둘씩 해치웠다.
“하지만 놈들의 세계가 어딘지는 이미 파악했고, 언제든지 갈 수 있거든. 가서 하나씩 하나씩 죽여 버리면 되지. 시청자의 세계에 이어서 정보세계 또 하나를 자원 생산장으로 병합하게 됐군.”
엘리는 마지막 이야기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진짜로 마왕과 마족이 세상에서 없어지겠구나!’
마왕과 마족은 이 세계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세계관의 일부였다. 그런데 한 명의 이계인에 의해서 그들이 과거의 존재, 신화의 일부로 전락하게 생겼다.
‘혹시 신들도 이런 식으로 세상에서 사라진 게 아닐까?’
엘리는 성직자들이 알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었을 불경한 의문을 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