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
마왕-47에게 인질로 잡힌 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용우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하지 마라.”
그 말에 엘리가 움찔했다. 그녀는 앞으로 뛰어서 의도적으로 마왕-47이 자신을 해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용우가 텔레파시로 그녀의 결단을 읽고 제지한 것이다.
“너도 참 대단한 애다. 거기서 방해가 될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발상이 나오냐?”
용우는 감탄해 버리고 말았다.
확실히 엘리의 정신세계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실질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신적인 존재와 맞서 싸우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
용우가 마왕-47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좀 싸울 줄 아는 놈 같아서 놀아주려고 했더니만…….”
<뭐?>
예상과 다른 반응에 마왕-47이 의아해했다.
“이상한 거 못 느꼈냐?”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가?>
“지금 잠깐 치고받는 동안 발생한 여파가 상당하잖아. 그런데 걔가 왜 멀쩡할까?”
그 지적에 마왕-47이 흠칫했다.
엘리는 전투 지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방금 전의 전투로 발생한 여파만으로 시체로 변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다.
파지지지직!
순간 엘리에게서 격렬한 스파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에 손을 대었던 마왕-47 개체가 튕겨 나왔다.
<뭐지?>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엘리의 몸에서 강력한 반발력이 발생했다. 그 반발력이 너무 강해서 그의 허공장을 뚫고 팔을 부숴 버릴 정도였다.
“정보세계에서 물질세계를 관음하면서 인간을 갖고 노니까 자기가 뭐 대단한 존재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 모양인데…….”
그리고 용우에게서 거대한 힘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왕-47 개체 셋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거대한 힘이!
“네 하찮음을 깨닫게 해주지.”
용우의 손에는 별의 돌이 쥐어져 있었다.
-형상변화!
별의 돌이 빛으로 화했다. 그 실루엣이 급격하게 확장되더니 거대한 양손대검의 형상으로 변해간다.
새벽의 권능이 담긴 별의 돌, 아니 길이 2미터의 양손대검을 쥔 용우가 그것을 휘둘렀다.
-용참격(龍斬擊)!
순간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엘리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엘리 자신이 내지르는 비명조차도.
* * *
용황제는 너무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났다.
쿠당탕탕!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가진 그가 급히 일어나자 서류가 잔뜩 쌓여 있던 책상이 뒤집어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폐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기사들과 시종들이 놀라서 달려 들어왔다.
하지만 용황제는 그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짐 말고도 이런 힘을 가진 존재가, 이 세계에 존재했단 말인가?”
세계의 광활함에 비하면 인간의 존재는 먼지만도 못하다.
강대한 힘을 가진 자가 그 힘을 뽐낸다 한들, 그 여파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자리에 있는 자들뿐.
그러나 그 힘이 그런 수준을 넘어선다면 어떨까?
도시 어디서나 알 수밖에 없는 힘이 행사된다면?
그보다 더… 예를 들면 대륙 어디에서나 알 수밖에 없는 힘이 존재한다면 어떻겠는가?
용황제는 확신했다.
지금 이 순간, 대륙의 모든 마법사가 그 힘을 느꼈을 것이다.
“대마법사들과 12장군을 긴급 소집하라, 지금 당장!”
용황제는 동요를 감추지 못한 채로 명령했다.
* * *
쿠구구구구…….
엘리는 잠시 동안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던 소리가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굉음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족 제리크의 마경은 산악 지역 한복판에, 반경 5킬로미터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 엘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더 이상 마경이 아니었다.
용우와 마왕-47이 싸우던 곳은 건물 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방이 탁 트여 있었고, 앞쪽으로 보이는 지형 자체가 변해 있었다.
전방 5킬로미터에 걸쳐 산을 포함한 모든 지형이 반듯하게 깎여 나가고 그로부터 장대한 흙먼지가 피어올라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설마 이 모든 게…….’
용우가 일격을 가한 결과란 말인가?
엘리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정작 칼질 한번으로 천재지변급 파괴를 일으킨 용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돌렸다.
“자신의 하찮음은 좀 이해했나, 마왕-47?”
<별의 돌을 가진 자였느냐.>
“그래.”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힘을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별의 돌 하나를 가졌다고 이런 힘을 가질 수 있을 리가…….>
“그건 어쨌거나 상관없지.”
용우는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 남은 마왕-47 개체에게로 다가갔다.
마왕-47은 용우의 손길을 피해서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그 움직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용우의 손이 그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뭐……?>
마왕-47은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시간 동안, 뭔가가 어긋났다.
자신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용우에게 걸어가서 그의 손에 머리를 맡기고 있었다.
“너는 네 권속이랑 다를 것 같았어?”
<……!>
용우의 속삭임에 마왕-47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용우가 텔레파시로 자신의 정신을 갖고 놀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듣자 하니 66마왕은 불멸이라더군. 단언컨대 그건 잘못된 인식이야. 단지 정보세계에 본질을 둔 존재라 물질세계에서 퇴치해 봤자 본질에 타격을 줄 수 없을 뿐이지.”
용우가 잔혹하게 웃었다.
“너는 네게 진짜 상처를 줄 수단이 없는 무력한 인간들을 보며 비웃어왔겠지. 자신이 진짜 불멸의 존재, 인간을 굽어보며 농락하는 위대한 존재라도 된 착각을 즐겨왔을 거야.”
파지지지직…….
마왕-47의 머리를 쥔 용우의 손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이제 착각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마왕-47은 2천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물질세계를 관측하고 관여해 왔다.
그들은 오로지 66개체만이 존재하며, 인간에게 관여하기 위해서는 계약을 필요로 했다.
마족이 되기에 어울리는 욕망을 품은 존재들에게 접근, 그들과 계약을 맺어서 마족으로 만드는 것이 66마왕이 세상에 관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이 인간에게 관여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아주 뚜렷했다.
66마왕은 인간이 고통받고 절망하면서 망가져 가길 바랐다.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최고의 오락이었고, 그것을 위해 마족을 만들어 세상을 어지럽혀 왔다.
그런 그들을 위협할 존재는 없었다.
영웅이라 불리는 자들도 결국 마족 한둘을 잡고 일시적으로 그들을 패퇴시킬 뿐이다. 인간은 결코 그들의 본질을 해할 수 없으니, 그들이 인간에게 패하더라도 그것은 고작 한순간일 뿐.
마왕-47은 지금까지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푹!
별의 돌을 변형시킨 용우의 양손대검이 몸에 꽂히기 전까지는.
<그, 아아아, 악……! 이럴 리가, 이럴 수는, 없, 어……!>
정보세계의 그들은 언데드와 달리 육체가 없는, 의념과 정보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다. 시청자와 같은 과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의 본체는 영혼과 다르지 않다.
“축하한다, 물질세계를 만끽할 기회를 얻은 것을.”
용우는 마왕-47의 본체를 정보세계에서 물질세계로 끌어와 마족의 몸에다 가둬 버렸다.
예전에 괌에서 굉음의 군주 소우바와 새벽의 군주 두라크를 잡았을 때와 같은 방식이다. 그때는 볼더의 창을 매개로 써야 했지만 지금의 용우는 그런 도구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었다.
<으윽, 크으윽……!>
마왕-47은 몸부림쳤다.
지금까지 마족을 통해서 세상에 관여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다. 자신이 갇힌 마족의 육체가 제공하는 감각은 정신이 이상해져 버릴 정도로 생생했다.
“자극이 너무 강했나 보군. 하지만 벌써부터 그렇게 만족하면 곤란한데.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용우는 붙잡고 있던 마왕-47의 머리를 놔주었다.
마왕-47은 생생한 감각에 휘둘리느라 육체가 제대로 통제가 안 되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용우는 그런 마왕-47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 그럼 의무를 다할 시간이야.”
장구한 세월 동안 수많은 인간에게 지옥을 선사하며 즐거워했던 마왕-47은, 처음으로 지옥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 * *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마족의 불멸성이 파괴되면서, 66마왕의 권좌에 빈자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파급력은 대단히 컸다.
66마왕은 그저 마족을 만들어서 세상에 혼란을 가져오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마법사가 쓰는 마법의 뿌리이기도 했다.
마왕은 물질세계에 관여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의념을 투사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권능을 반영하고 있다.
마법 중에는 이것을 해석해서 형태화하거나, 아니면 그들과 약식 계약을 맺고 단지 대량의 마력을 바치는 것만으로 고도의 권능을 구현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중 마왕-47을 근원으로 삼는 마법 몇 개는 이제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 * *
대륙을 통틀어 4명만이 존재하는 대마법사,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광활한 제국의 영토 곳곳에 흩어져 있던 대마법사들은 용황제의 소집에 응하여 단번에 황실로 날아왔다.
“마왕이 소멸하다니…….”
대마법사는 마법에 통달한 자.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들의 세계에서 일어난 이변을 알아차렸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낸 적 없었던 위업이 달성되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충격에 빠졌다.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그건 오로지 폐하만이 가능할 것이다.”
대마법사 4명은 용황제의 축복을 받은 자, 드라칸 중에서도 격이 다른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감히 자신이 용황제와 비견될 만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용황제와 그들의 마력만을 비교해도 아득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마족을 퇴치하는 거라면 몰라도 마왕을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폐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믿을 수가 없군.”
마왕이 강림하는 일은 용황제의 등장 이전, 마족이 토벌되는 것 이상으로 드문 사건이었다.
마왕은 변덕스러운 존재였다. 그리고 직접 수하의 몸을 조종해서 물질세계에 개입하는 것을 별로 재미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마왕이 강림한다면, 그것은 상대가 어지간히 마왕의 흥미를 끌었거나 아니면 화나게 했다는 뜻이다.
용황제는 전자였다.
용황제는 제국령의 마족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세 번이나 마왕 강림을 마주했고, 그리고 이겼다.
신화의 신들조차 탐냈던 힘, 별의 돌을 두 개나 가진 용황제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모두 느꼈겠지.”
대마법사들은 자신들이 내뱉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이 공허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용황제가 놀라 벌떡 일어나는 순간, 그들 또한 경악하고 있었으니까.
이 세계의 존재가 발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힘.
마법사라면 대륙 어디에 있더라도 그 존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힘이 그 순간 자신을 드러냈으니까.
“폭풍 같은 사흘간이로군…….”
그 힘의 소유주가 저항군 토벌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이틀 전.
그리고 오늘, 사상 최초로 마왕이 소멸했다.
“모두 모였군.”
그때 용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마법사 4명과, 12명의 장군이 모두 일어나 예를 표했다.
용황제는 그들을 앉게 하고는 상석에 앉아 입을 열었다.
“마왕이 소멸한 지점은, 마족 제리크의 마경으로 파악되었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제리크는 본래 제국령에 존재하던 마족.
용황제가 직접 토벌하고, 맹약의 낙인을 찍은 존재였다. 그가 맹약에 따라 제국에 공급해 주는 것은 용황제의 목표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대마법사에 대한 방침은, 일단은 회유를 시도한다. 안 될 경우 총력을 투입하여 신속하게 제거한다.”
용황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중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자리에는 나 또한 참전할 것이다.”
좌중은 이 선언에도 놀라지 않았다. 용황제 없이는 정체불명의 대마법사를 상대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그를 제거해야 한다면, 시간이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 ‘불꽃’ 제작 작업에 들어가겠다.”
그 말에 좌중이 술렁였다.
그것은 황제의 비원, 그 첫 번째 계단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황제는 조금이라도 더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미루고, 또 미뤄왔던 도전을 지금 시도하기로 결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