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
용우는 복잡한 건물의 구조를 무시했다.
쿠과광……!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면서 일직선으로 전진한 것이다. 벽도, 함정도, 흑마법사와 그들이 부리는 괴물도 용우가 손짓 한 번만 하면 다 뻥 뚫린 길로 변해 버렸다.
두 사람이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족인 제리크는 인간을 약간 변형시킨 것 같은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회색 피부나 이마의 보석은 이 세계의 다른 인간과 같다. 하지만 눈은 눈동자와 흰자위의 구분 없이 전체가 붉게 타오르는 빛을 발하고 있었고, 이마에는 두 개의 굴강한 뿔이 솟아나 있었다.
‘정교한 코스프레 영상을 보는 것 같군.’
21세기 지구인인 용우 입장에서는 판타지 블록버스터 영화 속의 캐릭터를 보는 느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초월권족 때도 그랬는데, 이거 참…….’
그만큼 21세기 인류의 기술이 상상을 표현하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뜻이리라.
“네놈은 누구냐?”
“말해봤자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잠시 후면 세상에 없을 너한테.”
용우의 조롱에 제리크가 이를 악물었다.
“왜 나를 공격하는 거지?”
“이상한 질문이군. 너 혹시 그 이유를 물어봐야 할 만큼 선량한 삶을 살아왔냐?”
“…….”
인간이 마족을 죽이려고 왔는데 그 이유를 궁금해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제리크 입장에서는 있다.
‘이 미친놈이……. 세상에 단둘이서 마경에 쳐들어오는 놈이 어디 있어?’
용황제도 그런 짓은 안 했다.
용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너, 왜 안 도망쳤냐? 네 하찮은 부하들 증발하는 거 보고도 자신감이 넘쳐서?”
용우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력을 전개하지 않았다. 그의 마력 컨트롤은 그야말로 완벽한 수준이기에 제리크가 그의 마력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만 봐도 용우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고 용우를 맞이한 이유는 무엇일까?
‘해봤자 7등급 몬스터 수준인 놈인데.’
거기에 지금까지 만난 놈들과는 달리 허공장까지 가졌으니 이 세계 인류에게는 충분히 재앙으로 여겨질 만한 존재였다.
하지만 용우 입장에서는 도대체 뭘 믿고 버티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리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도망? 그런 건 내 주인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
“주인이라면 마왕 말인가?”
“그래…….”
제리크는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였다. 척 봐도 자신의 의지로 용우와 맞서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들은대로 마왕의 지배력이 절대적인가 보군. 마족도 결국 마왕의 유희를 위해 놀아나는 존재일 뿐인가.”
“큭큭큭, 인간 따위에게 이런 소리를 듣다니… 내 처지가 비참하군.”
“비참한 건 네놈의 오락으로 희생된 사람들이지.”
“정의의 사도인 척하고 싶은 거냐?”
“그게 네놈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그러도록 하지. 너를 위한 정의의 사도가 되어주마.”
“…….”
“제국과 어떤 거래를 한 거지?”
“혹시 그걸 말해주면 싸우지 않고 돌아갈 건가?”
“아니, 네게 선택할 권리는 없어. 넌 무조건 내가 원하는 답을 말하게 될 거고, 고통스럽게 죽을 거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오만한 인간이군. 용황제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거늘!”
제리크가 분노하자 용우가 비릿하게 웃으며 마력을 약간 개방했다.
순간 숨막힐 것 같은 압력이 제리크를 덮쳤다.
“뭐, 뭐야?”
제리크는 용우가 자신보다 강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부하들을 처리하는 과정만 봐도 도저히 자신이 승리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넌 대체 뭐냐? 인간이 아니구나!”
그러나 설마 자신을 아득히 능가하는 마력을 가졌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인간이야.”
용우는 딱 9등급 몬스터의 최저치 수준에 해당하는 마력을 개방했다.
9등급 몬스터와 7등급 몬스터의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제리크는 사자 앞에 선 들쥐가 된 기분이었다.
“자, 그럼 마족의 힘을 보여줘 봐. 얼마나 잘났는지 구경해 주지.”
“그래. 보여주마, 인간!”
물러설 곳이 없는 제리크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용우에게 돌격했다.
* * *
엘리는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세상에.”
그녀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세상에세상에세상에…….”
너무 충격적인 광경을 본 나머지 고장 난 로봇처럼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끝나기까지는 단 10초가 걸렸을 뿐이었다.
제리크가 혼신의 각오로 돌격했다.
그리고 용우의 허공장에 부딪쳐서 그 반발력에 허우적거렸다.
용우는 반발력으로 전신이 부서질 것 같은 격통에 시달리는 제리크를 붙잡고, 팼다.
불과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기관총 같은 연타로 제리크를 두들겨 댄 다음, 걸레짝이 되어버린 제리크를 벽에다 집어 던졌다.
“드라칸한테도 이 정도로만 힘을 조절하면 되겠군. 대충 기준 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저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음?”
문득 용우가 눈을 치켜떴다.
“뭐야, 게임도 아닌데 설마 2페이즈가 있는 거야?”
“2페이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직 안 끝났다는 뜻이야.”
그 말에 엘리가 걸레짝이 되어 벽에 처박힌 제리크를 바라보았다.
구구구구구……!
공간이 진동하면서 제리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과정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제리크를 붙잡아서 일으키는 것 같았다.
<재미있군.>
제리크의 입에서,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권속을 농락하다니, 인간… 아니,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자여, 너는 누구인가?>
그 목소리에는 강력한 정신파가 실려 있었다.
제리크의 몸을 차지한 누군가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아차렸다.
용우는 이 세계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척 이질적인 외모의 소유자다. 생김새도 그렇고, 복장도 그렇다.
또한 용우는 제리크와 이야기하는 동안 계속해서 한국어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도 제리크는 이 두 가지 사실에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용우가 이 세계에 온 후로 상시 걸어두고 있는 텔레파시에 뇌가 조작되었기 때문이다.
용우는 그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물었다.
“네가 마왕인가?”
<그렇다. 나는 마왕-47.>
“…그 성의 없는 모델명 같은 명칭은 뭐야? 마왕이면 뭔가 거창한 이름을 대야 하는 거 아닌가?”
<이름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륙에 종속된 존재에게나 의미 있는 것.>
“너희는 그런 존재인가 보군. 하긴 정보세계의 존재도 제각각이지.”
<너, 우리의 본질을 아는가?>
“알지. 아마 나만큼 잘 아는 사람 찾기 힘들걸? 근데 이렇게까지 예상한 대로 척척 들어맞다니, 유사인간계라 그런가?”
<유사인간계? 무슨 소리를 하는가, 인간과 비슷하지만 비슷하지 않은 자여.>
“호칭이 더 길어졌냐? 뭐 하여간 네가 정보세계의 존재라는 건 알겠다. 너희랑 비슷한 놈들이 있었지, 시청자라고.”
<내 물음에 답하라.>
“거절한다. 질문은 네 권리가 아니야. 넌 오로지 내 의문에 답할 의무만 있다. 그 사실을 이해시켜 주지.”
<건방지군.>
제리크, 아니 그의 몸을 차지한 마왕-47의 머리칼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제리크 본연의 마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마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맙소사…….”
엘리가 몸을 떨었다.
그저 마력을 개방했을 뿐인데 주변의 모든 것이 진동하며 부서져 간다. 도대체 얼마나 강대한 마력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나는 멀쩡한 거지?’
엘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자신에게 이상함을 느꼈다.
이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 눈앞에서 개방됐다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서 벌벌 떨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그러기는커녕 엘리는 지금 마왕-47의 마력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보호해 줘서? 하지만 이런 힘 앞에서도 그런 게 가능한 거야?’
용우는 마왕-47의 힘을 보고도 전혀 위축된 기색이 아니었다.
“이야, 훌륭한데?”
그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66마왕이라고 하더니 정말 수가 그것밖에 안 되어서 그런가? 제법 하잖아?”
* * *
용우의 손에 멸망한 정보세계의 존재, 시청자.
그들은 인류를 통해 욕망을 얻는 존재들이었다.
고차원적인 존재인 그들은 인류를 관음하는 것도, 그들을 지배하는 것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인류가 그들의 존재는커녕 자신의 존재가 지배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 진정한 공포였다.
용우는 66마왕이 시청자와 비슷한 존재이리라 추측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다만 마왕은 결정적으로 시청자와 다른 점이 있었다.
<건방진 자여.>
시청자는 고차원적인 존재라 인류가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을 뿐, 개체 하나하나의 힘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하찮음을 깨닫게 해주마.>
그런데 마왕-47은 9등급 몬스터를 능가하는 마력을 전개하고 있었다.
“고작 그 정도로?”
용우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하나로는 부족하겠지.>
다른 방향에서 마왕-47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리크가 아닌, 또 다른 마족이 텔레포트해서 나타났다. 그에게서도 마왕-47의 존재가 느껴지고 있었다.
<셋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이 나타나서, 거의 비등한 마력을 지닌 세 명에게서 마왕-47의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용우가 몸을 떨었다.
“어이구, 무서워라. 도망치고 싶어지는데?”
누가 봐도 조롱하는 것을 알 수 있는 태도였다.
‘이놈들 영적 자원을 펑펑 써대고 있군.’
정보세계의 존재이면서 물질세계에서 저만한 힘을 가진 개체 셋을 동시에 움직이다니, 대단한 일이다.
아마도 마족 자체가 인간보다 월등한 힘을 가진 개체이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게다가 대량의 영적 자원을 쓰고 있는 것이 감지되었다.
‘군단과 달리 자기 능력을 쓰는 데 제약이 없는 놈들은 이래서 짜증나.’
시청자가 그랬듯이 말이다.
‘하긴 나도 이 세계의 존재가 보기에는 마찬가지인가?’
마왕-47은 마족을 통해 물질세계에 간섭하면서 상당한 영적 자원을 축적했고, 용우를 제압하기 위해 그것을 아낌없이 투입하고 있었다.
마왕-47이 움직였다.
-파괴의 빛!
고밀도로 응축된 마력이 열섬광으로 변해 용우를 노렸다.
파지지지직!
열섬광이 용우의 허공장과 부딪치자 격렬한 스파크가 일었다.
동시에 마왕-47이 다른 개체를 움직였다.
-통곡의 마탄!
시커먼 기운의 덩어리가 용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동시에 용우도 움직였다.
파아아아!
허공장을 변형시켜 열섬광의 궤도를 바꿔 버리면서 마왕-47에게 뛰어든다.
퍼퍼퍼펑!
그 뒤를 이어 날아들던 시커먼 기운 덩어리들을 주먹으로 쳐서 분쇄하고, 그대로 발차기를 날린다.
-에어 바운드!
발차기가 닿을 거리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용우의 발차기가 허공의 한 지점을 치자 공기가 폭발했다.
퍼어어어어엉!
인간 수십 명을 찢어발기고도 남을 강렬한 폭압이 마왕-47 개체들을 덮쳤다.
마력에 걸맞은 허공장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쾅!
그대로 뛰어든 용우가 마왕-47 개체 하나를 강타해서 벽으로 날려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직각으로 궤도를 틀어서 다른 개체에게 뛰어드는데, 불쑥 그 앞에 다른 개체가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앙!
그 개체가 휘두른 검이 용우의 돌진을 저지했다.
“이야. 그래도 좀 싸울 줄 아네.”
용우가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리자 마왕-47이 반응했다.
<싸울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곧 그 생각이 바뀌게 될 것이다.>
마왕-47 개체 둘이 좌우에서 용우에게 대치한다. 그리고…….
“아…….”
벽에 처박혔던 개체 하나는 엘리의 등 뒤에 나타나서, 그 목에 손을 대고 있었다.
<어떠냐? 인질을 잡힌 기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