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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섬.
그곳은 오랫동안 종말의 군단이 심장부로 여겨왔던 곳이다.
독립된 여러 정보 세계를 하나로 묶는 중심 역할을 했던 그곳은, 언제나 죽음을 거부하고 침략자가 되기를 선택한 언데드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더 이상 그 시절을 추억할 존재조차 없는 그곳은 유령도시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런 왕의 섬 한복판을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서용우와 이비연이었다.
“딱 한 가지는 좋군. 썰렁한데도 쓰레기가 굴러다니지 않는 거.”
이 세계는 지속적인 청소가 불필요하다.
자연조건에 따른 당연한 변화, 물건 위에 먼지가 쌓이거나 뭔가가 썩어가는 일이 없다.
오직 누군가의 움직임에 따른 변화만 존재하기에, 마지막으로 군단이 총공세에 나선 순간 이후로 변화가 없었다.
쿠르르릉…….
“그것도 시간 문제긴 하겠지만.”
용우는 세계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굉음을 들으며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사실 허상이다. 물리적 거리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득한 어딘가에서 발생한 음파가 여기까지 닿을 리가 없지 않은가?
왕의 섬과 연결된 다른 세계, 과거에는 군단에 속한 강대한 존재들의 영지로 분류되었던 세계가 혼돈에 잠식당해 붕괴하는 소리였다.
용우가 그 소리를 듣는 이유는 간단했다.
“백성이 모조리 사라졌는데도 왕위는 존재한다니, 정말 웃기는 일이야.”
용우가 군단의 왕이기 때문이다.
최종결전에서 용우는 라지알을 죽이고, 그가 지닌 융합체를 빼앗았다.
그로써 용우가 지닌 융합체 네뷸라는 더욱 강대한 권능의 산물이 되었다.
불꽃의 활, 대지의 로드, 빙설의 창, 새벽의 해머, 광휘의 검까지 성좌의 무기 다섯 개.
하스라 코어, 볼더 코어, 두라크 코어, 소우바 코어, 에우라스 코어까지 군주 코어 다섯 개.
이 열 가지 요소가 하나로 통합된 것이 지금의 네뷸라였다.
네뷸라의 주인인 용우가 왕의 섬에 진입하는 순간, 군단의 시스템은 용우를 왕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용우는 왕의 섬이라는 거대한 요새에 존재하는 모든 기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자, 그럼…….”
용우가 운을 떼는 순간, 두 사람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한순간에 왕궁의 중심부로 이동한 것이다. 용우가 옥좌에 앉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아직도 78퍼센트나 남아 있나.”
군단의 세계는 혼돈에 잠식되어 사멸해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군단의 일원들이 혼돈과 맞서 잠식을 늦추고, 그 과정에서 얻은 소재를 가공해서 몬스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을 할 존재가 없기에 침식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한 달이나 신경을 안 썼는데도 1퍼센트 밖에 진행이 안 되다니, 혼돈도 별로 열심히 일하지는 않는군.”
“그렇게 침식이 빨랐으면 군단이 천년 넘게 버티지도 못했을걸.”
“그건 그렇지만.”
군단의 세계는 광활했다. 연합해 있는 세계의 공간면적을 전부 합치면 지구의 수십 배에 이른다.
물론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별로 넓은 것이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군단의 머릿수가 가장 많을 때도 200만 명을 안 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인구밀도가 낮았던 것이다.
이비연이 말했다.
“이래서야 이식은 꽤 먼 훗날의 이야기겠네.”
“서두를 이유도 없잖아. 쥐어 짜낼 만큼 쥐어 짜낸 후에 해도 늦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왜?”
“아니, 그냥. 여기 올 때마다 별로 기분이 안 좋아서.”
이비연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에게는 타락체 시절의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군단의 세계에 올 때마다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거북하면 앞으로는 나 혼자 처리할게.”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용우의 말에 이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왕은 아니었지만, 왕의 섬을 통제할 권한 일부를 갖고 있었다.
용우가 라지알에게서 빼앗은 세 개의 군주 코어 중 트라드 코어와 데바나 코어를 그녀에게 주었고, 그 결과 융합체 굉뢰는 성좌의 무기 두 개와 군주 코어 세 개가 합쳐진 권능의 결정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빠 혼자서 하면 그만큼 놓치는 전선이 많아지잖아? 기껏 여길 장악해놓고 그렇게 손해를 볼 수는 없지.”
군단이 전멸한 지금, 용우는 섬기는 자 하나 없이 왕관만을 가진 공허한 왕이다.
그럼에도 그 왕위는 쓸모가 있었다.
일단 왕의 권한으로 군단이 축적한 영적 자원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최종결전에서 막대한 양을 소모했음에도, 여전히 엄청난 양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잠식하는 혼돈은, 용우와 이비연에게는 마력석 광맥이나 다름없었다.
군단은 혼돈의 괴물을 죽이고, 그 시체를 재료 삼아 몬스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용우와 이비연은 굳이 몬스터를 만드는 대신 그 시체를 마력석으로 변환시키고 있었다.
작년부터 틈틈이 그 작업을 계속한 결과, 두 사람의 아공간에는 퍼스트 카타스트로피 이후 지금까지 지구에서 생산된 마력석 총량을 능가하는 마력석이 쌓였다.
설령 인류가 마력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온 핵융합 기술을 상용화하는 데 30년쯤 걸리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의 비축량이었다.
‘이 세계가 끝장날 때까지 비축하면 진짜 500년은 버틸 수 있을지도.’
게다가 용우에게는 거의 무진장의 영적 자원도 있다.
이 영적 자원을 마력석으로 변환하는 것도 가능하기에, 사실 마음만 먹으면 인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이다.
“5% 미만이 되려면 몇 년은 걸리겠군.”
“너무 아슬아슬할 때까지 버티는 건 안 좋지 않을까?”
“하긴 그래. 6% 정도 시점에서 이식하는 게 좋겠지.”
두 사람이 말하는 ‘이식’이란 이 왕의 섬을 군단의 세계에서 적출, 구세록 내부 세계로 옮기는 작업을 말한다.
왕의 권능으로 통제되는 왕의 섬은 쓸 만한 기능이 많은 시설이었다. 그래서 구세록 내부 세계로 옮겨서 두고두고 써먹기로 한 것이다.
구세록의 권능과 왕의 권능,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넣은 용우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영적 자원을 소모해서 일반인을 각성자로 만들 수도, 스펠 스톤을 찍어낼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는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었지만.
‘하지만 그래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용우는 군단의 기록을 보며 생각했다.
* * *
세계 곳곳에서 영토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한국은 그런 분위기와는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일단 한국은 전쟁 같은 것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다.
작년, 군단의 대공세로 입은 타격이 커서 국가를 정상화하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정말 위험했다. 자칫하면 국가 자체가 몇 개로 쪼개져서 내전을 벌이는 사태까지 갔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사태는 그렇게까지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현재 한국은 임시 정부를 수립, 행정 시스템을 복구하고 선거를 앞둔 상태였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놀라울 정도로,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기 때문이다.
정치권 인사들은 진영논리를 떠나 손을 잡았고, 재계의 인물들도 사회 안정화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퍼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했어도 이익을 도외시하고 하나로 뭉치기 어려운 것이 인간 본성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은 그런 경향이 두드러져서 미움을 받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이상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중은 그런 그들의 태도에 찬사를 보냈지만…….
진실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 * *
저벅…….
정적 속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물론 정말로 그 발소리가 컸던 것은 아니다. 모두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발소리의 주인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들렸을 뿐.
티디디딩…….
대리석 바닥 위로 작은 금속성의 물질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털썩! 털썩! 쿵!
장난감처럼 날아가서 벽에 처박혔던 거구의 군인들이 땅에 처박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히이익…….”
군인 한 명이 겁에 질려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신음을 냈다.
발소리의 주인, 백발의 청년 차준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다 했나?”
“뭐, 뭐라고?”
“해보고 싶었던 건 다 했냐고 물은 거다, 김 장군.”
“으음……!”
김 장군이라 불린 중년의 남자가 신음했다. 3성 장군인 그는, 자기보다 까마득하게 어린 청년의 지루해 보이는 시선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차준혁을 포함한 세 사람이 그의 집무실에 들어오는 순간, 완전무장한 채로 기다리던 군인들이 일제사격을 가했다.
사격을 가한 군인 중에는 각성자도 있었다. 수십 발의 소총탄과 에너지탄이 그들을 급습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공포스러웠다.
차준혁도, 그와 함께 온 두 사람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전원 허공장 보유자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마치 고등급 몬스터의 그것처럼 강력한 허공장이라, 소총탄은 물론이고 각성자 군인이 쏜 에너지탄조차 거기에 막혀 버렸다.
세 사람은 마치 아이들을 다루듯 쉽게 군인들을 때려눕히고 김 장군 앞에 섰다.
“각성자 부대라니,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쿠데타를 준비한 건 아니었군.”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차준혁의 뒤에 있던, 체격이 큰 중년 남자였다.
팀 블레이드의 사장 오성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다시 군부 독재를 꿈꾸면서 쿠데타를 준비할 줄이야. 정말 시대착오적인 발상인데, 요즘 세상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군. 예전에 비해 축소된 군대라고 해도 지방 군벌로는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고, 결국 내전으로 끌고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군부에 신경을 안 쓰기는 했지.”
선글라스를 낀 중년 사내, 팀 크로노스의 사장 백원태가 어이없어하며 말을 이었다.
“그 결과가 이거라니, 옛날 생각나는군. 안 좋은 추억이 떠오르는데?”
군부의 힘이 막강해서 장성의 기분을 거스르기만 해도 살해당할 것을 걱정해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백원태와 오성준은 각성자의 권익을 위해 일어나 군부의 권력을 파괴한 사람들이다. 이제 와서 다시 쿠데타를 위한 움직임을 보니 복잡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헌터를 중심으로 한 방위 시스템이 확립된 이후, 한국 군대는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되면서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힘이 있었다. 징병제 시절보다 훨씬 전문성이 높아진 인적 자원, 그리고 무수한 무인병기라는 힘이.
아직 사회가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타이밍이었고, 각성자 부대를 끌어들인 시점에서 쿠데타는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게 전부가 아니었다.
문득 차준혁이 말했다.
“하지 마라.”
“뭐?”
“하지 말라고. 책상 밑에 숨긴 권총.”
흠칫하는 김 장군에게 차준혁은 퍽 한심해하는 시선을 보내주었다. 그의 예지가 김 장군이 뭘 준비하는지 다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니, 해봐. 해보고 안 되는 걸 봐야 정신을 차리겠군. 일반 소총도 아니고 각성자용 소총으로, 증폭 탄두를 쏴도 아무 소용없다는 걸 확인했지 않나? 그런데도 권총으로 뭐가 될 거라고 생각하다니, 아무래도 지능지수가 낮은 것 같으니까.”
“이익……!”
김 장군은 몸을 부들부들 떨 뿐, 결국 총을 들지 못했다.
차준혁이 말했다.
“항복해라. 목숨은 살려주지.”
“안 하면 죽이겠다는 거냐? 새파랗게 어린놈이…….”
“만나보자 해놓고 다짜고짜 암살을 시도한 작자가 할 소리인가?”
김 장군을 중심으로 군부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백원태와 오성준은 일단 만나서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이 지정한 장소는 군부대 안, 그것도 김 장군의 집무실이었다. 철저하게 소지품 검사를 당한 세 사람이 약속 장소에 들어서는 순간, 완전무장한 병력의 일제사격이 쏟아진 것이다.
사실 차준혁 입장에서는 이 방에 있는 자들의 목숨을 살려둔 것만으로도 관대함을 보인 것이다. 그가 마음먹는 순간 공격자 전원이 뼛조각도 남기지 못하고 증발했을 테니까.
차준혁이 눈을 부릅떴다.
“……!”
순간 김 장군은 눈앞이 새하얘졌다. 항거할 수 없는 압박감이 그를 짓눌러서 터뜨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커억, 허억……!”
잠시 후 그 압박감이 썰물 빠져나가듯 사라지자 김 장군이 벌레처럼 바닥을 뒹굴면서 신음했다.
“아무래도 자기가 머리가 나쁘다는 걸 잘 모르는 것 같군.”
차준혁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말했다.
“……!”
김 장군이 공포에 질렸다.
갑자기 정신에 뚜렷한 이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말하려던 것이 띄엄띄엄 끊어지고, 당연히 알고 있던 것이 뭔지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생각이 안 나고,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그렇게 갈가리 찢겼던 사고능력이 다시 회복되었을 때, 그는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로 차준혁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여기서 죽여 버리면 일이 좀 귀찮아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람을 치워 버리는 방법은 죽이는 것만이 아니야. 예를 들어 쿠데타를 일으키려던 김 장군의 정신이 나가 버린다면 어떨까?”
김 장군은 질식할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방금 전의 체험만으로도 차준혁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깨달은 것이다.
“이, 이런 식이었나?”
김 장군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왔다.
“뭐가?”
“여태까지 다 이런 식으로 굴복시킨 건가? 그래서 다들 어울리지 않게 순한 양처럼 자기 걸 다 내놓은 건가?”
“상상에 맡기지.”
차준혁이 빙긋 웃어 보였다. 김 장군의 공포를 더욱 키우기 위한 연기였다.
“쿠데타에 대한 것을 공표할 필요는 없어. 그냥 다 내려놓고 은퇴하도록 해. 혹시 통제가 안 될 사람들이 있다면 한곳에 모아두고 날 부르도록.”
슬프게도 폭력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에게는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