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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우와 라지알은 다른 지역의 전력을 아득히 초월한, 우주적인 힘의 소유자들이다.
방금 전 서용우가 증명했듯, 그들이 잠깐 다른 전장에 눈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전세가 뒤집힐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둘은 일대일 상황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전장에 개입하려고 한눈을 파는 순간, 상대방에게 살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꽈아아아아앙!
둘의 위치가 정신없이 바뀐다.
인천 상공에서 시작된 전투가 안양을 넘어 수원으로, 다시 용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궤적에 걸려든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었다.
“크윽……!”
라지알이 신음했다.
용우의 방어를 뚫기 위해 저돌적으로 공격을 쏟아붓던 그는 결국 치명타를 피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물러나는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그러면 다 되는 줄 아는 놈들이 꽤 있지.”
용우가 라지알을 조롱했다.
스스로 불사성을 깨달은 라지알은 용우가 말한 대로의 전법을 취했다. 상처를 감수하면서 용우를 붙잡으려고 한 것이다.
속도는 밀리지만 마력은 자신이 우위니, 일단 붙잡으면 승기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용우는 그런 그의 심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읽어내면서 농락하고 있었다.
‘재생력 믿고 몸을 막 써가면서 달려드는 놈들 한두 번 잡아본 게 아니거든.’
그러는 동안에도 제한시간은 착착 줄어들고 있었다.
“36만.”
이제 군단원의 수가 36만 명 밑으로 떨어졌다.
급할수록 침착해야 한다. 전투에서 초조해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라지알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다. 당연히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란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초조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인간의 마음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설계된 인공지능의 사고 프로세스에 불과할 것이다.
‘괜찮다. 아직이야. 아직은 괜찮아.’
라지알은 애써 자신을 타일렀다.
몸을 아끼지 않는 전법으로는 용우를 당해낼 수 없다. 그렇게 판단한 라지알은 다른 대응책을 꺼냈다.
투콰콰콰콰쾅!
초당 수십 발의 섬광이 번쩍이면서 용우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라지알 본인이 일일이 통제하는 공격이 아니다. 정밀함도 떨어진다.
하지만 한발 한발의 위력이 용우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을 만큼 강력하고, 그러면서도 수가 많았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용우가 헬멧 속에서 웃었다.
라지알의 마력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출력은 그대로였다. 아까 전에 상승시킨 것이 한계치임이 분명했다.
커진 것은 마력의 규모였다.
마치 여러 명의 라지알이 부대를 이뤄서 일제 공격을 퍼붓는 것 같은 양상이다. 다만 그것을 통제할 라지알의 머리가 하나이기에, 하나하나의 정밀도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이 물량 공세는 속도에서 앞서는 용우를 상대하기에 적절한 대책이었다.
‘과출력에 대규모 물량공세까지, 과연 그 힘이 어디까지 갈까?’
이 공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라지알에게 엄청난 무리가 갈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용우는 속도 우위를 살려서 방어와 회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35만.”
용우가 잔혹한 사실을 고했다.
둘이 한반도를 초토화시켜가면서 싸우는 동안, 군단원의 수가 35만 명 밑으로 떨어졌다.
“반 이상 죽어 나갔는데도 하한선에 도달하지 않았군. 얼마나 남았지?”
용우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서서히 낭떠러지로 떠밀리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라지알은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역시 이 전개를 피할 수 없었다.’
지금 그와 용우의 전투 양상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절망적인 형국이다. 월등한 힘, 월등한 화력을 쏟아붓고 있는데도 압도적인 속도 차를 어쩔 수가 없다.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제한시간만 줄어들어 간다.
‘한 번이면 된다.’
그럼에도 라지알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형형한 눈빛을 뿜어내며 기회를 엿보았다.
‘한 번이면……!’
파악!
용우의 검이 라지알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34만.”
절망적인 카운트다운은 계속된다.
문득 용우가 거리를 벌리며 물었다.
“라지알, 너는 왜 싸우지?”
“뭐?”
“너희에게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야. 너희가 속아서 이 가짜 지구에 온 시점부터 그랬지.”
“시간을 끌고 싶어서 별 헛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이 싸움은 아무리 봐도 우리가 이겼어.”
용우는 조롱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자신의 승리를 이야기했다.
“왜 포기하지 않지? 타락체가 군단에 소속감을 느낀다고는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강하진 않다고 하던데.”
“…….”
“정말 승산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덤비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너희 스타일이 아니잖아? 이긴다고 확신하고 짓밟으러 갈 때나 투지가 넘치지, 절망적인 상황에서 발버둥 쳐야 하는 전투를 상상이나 해봤어?”
군단은 언제나 침략자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침략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맹수가 사냥감을 보는 시각을 갖지 않고서는 실행할 수 없는 일이다.
“패배가 눈에 보이는 상황이니 너 혼자 살자고 도망칠 수도 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지? 그 정도의 힘을 가졌으니 너 혼자라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
그 말에 라지알은 잠시 멈칫했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왠지 용우의 질문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도망치길 바라고 있는 투로군.”
“그 점은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왜 그렇게 사명감에 불타가면서 싸우고 있는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야.”
용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라지알이 싸움을 피해 도망치기를 바란다. 그가 그 선택지를 골랐을 경우, 절대 피할 수 없는 파멸의 덫을 준비해놓았으니까.
하지만 라지알은 그런 선택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번 죽음을 맛봤으면서도 더욱 강한 투지로 맞선다. 용우는 그 눈빛에서 단단한 사명감을 보았다.
“왕이라서인가? 군단의 왕이라는 게 그렇게 세상 모든 걸 다 짊어진 것처럼 목숨 걸고 신념을 실천하는 자리인가?”
용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라지알이 피식 웃었다.
“그런 자리는 아니지. 하지만 나는 선택했다.”
“무엇을?”
“진짜 왕이 될 것을.”
그는 이미 끝나버린 이야기의 부스러기로 남는 것을 거부했다.
더 이상 텅 빈 존재로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가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로서 운명을 개척할 것이다.
그것이 과거의 자신이 품었던 죄책감을 이해한 라지알의 선택이었다.
“이 싸움은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자리다.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하.”
용우는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시시한 이유일 줄은 알았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걸.”
“뭐라고?”
“그만큼 시간을 끌었으니, 들어줄 가치 정도는 있었다고 해주지.”
“네놈……!”
더없이 모욕적인 용우의 말에 라지알이 분노하는 순간이었다.
팟!
용우의 공격이 그를 위협했다.
라지알이 그것을 피해 물러나자 용우가 섬전 같은 연타를 날리며 비아냥거렸다.
“대화란 참 어려운 거야. 그렇지?”
예전, 왕의 섬에서 라지알이 용우를 조롱하며 날렸던 대사였다.
전투가 재개되었다.
그리고 그 전투 양상은 마치 비디오로 녹화한 영상을 재생하는 것 같았다. 아까 전과 똑같은 소모전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것도 무한히 반복되지는 않았다.
쾅!
용우가 발한, 허공을 격하는 공격이 라지알의 방어 위를 때린다.
뒤이어 날아든 검격을 라지알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으윽……!”
라지알의 마력 운용에 미세한, 너무나도 미세한 흔들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과출력 모드, 그리고 대규모 물량 공세를 지속한 반동이었다. 과출력에 시달린 그릇이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대규모 물량 공세로 인한 마력 소모를 마력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32만.”
한번 흐트러짐이 드러나자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었다.
라지알의 움직임 사이사이에 허점이 드러날 때마다 용우의 공격이 가차 없이 꽂혔다.
불사의 힘이 상처를 바로바로 재생시키고 있기에 버티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한순간에 균형이 무너졌으리라.
“31만.”
어느 순간, 용우의 검격이 라지알의 몸통을 깊숙이 가르고 지나갔다.
용우가 눈을 빛냈다.
완벽하게 들어갔다. 끝장을 낼 기회였다.
‘바로…….’
그리고 용우가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뛰어드는 순간, 라지알 역시 거짓말처럼 자세를 회복하며 용우에게 뛰어들었다.
‘지금!’
용우에게 일방적으로 농락당하면서도 참았다. 거듭 위험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의식이 날아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참고, 참고 또 참았다.
모든 것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
투콱!
라지알이 휘두른 검을, 용우가 네뷸라로 막아냈다.
하지만 그 순간, 라지알의 몸은 둘로 분화되고 있었다.
검을 휘두른 것은 환영을 덧씌운 분신이다. 본체는 분신의 존재감에 숨은 채로 용우의 사각을 찌르고 있었다.
‘끝이다!’
이 한방으로 전세가 역전된다.
확신을 담은 라지알의 주먹이 용우의 몸통에 꽂혔다.
-칼날 붙잡기!
그 순간 용우가 스펠을 발했다.
“……!”
라지알이 경악했다.
용우의 몸통을 친, 그의 주먹이 거짓말처럼 정지해 버렸다.
대상의 운동 에너지를 소멸시키는 방어 스펠이 발동, 공격을 무효화 한 것이다.
‘간파했다고? 이렇게 완벽하게?’
라지알은 아연해졌다. 그런 그에게 용우가 속삭였다.
“트릭이 들통난 마술은 이미 마술로써의 가치가 없지.”
섬뜩한 깨달음이 라지알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왕의 섬에서 용우의 분신과 싸웠을 때, 그는 몇 번이나 비기를 노출했다. 그때 용우는 최소한의 방어를 할 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설마.’
라지알의 뇌리에 절망적인 가설이 떠올랐다.
‘이 함정이, 그때부터 계획되어 있었단 말인가?’
그때는 분신에 농락당했다는 충격으로, 그 전투에서 비기를 사용했다는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설마 분신에게 비기를 노출했던 그때, 용우는 이미 라지알과 다시 한번 싸울 날을 대비하고 있었단 말인가?
꽈아아아앙!
사고가 끊겼다.
동요하는 라지알의 몸통에 용우의 무릎이 꽂혔기 때문이다.
-우우우우우우!
라지알이 비명을 토하기도 전에, 용우의 M슈트가 눈부신 빛을 발하며 주인의 마력을 폭증시킨다.
“두 번.”
차가운 선고와 함께, 빛 그 자체로 화한 네뷸라가 라지알의 몸을 갈라 소멸시켰다.
“……!”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가 회복되었다.
단순히 충격으로 의식을 잃거나, 잠을 자고 깨어나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 라지알을 덮쳤다.
그래. 이것은 마치 존재의 연속성이 단절된 것 같은 기분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 같은, 자신만 빼놓고 세상의 시간이 움직여 미래에 도달해버린 것 같은 감각.
“그래도 왕의 권능이라는 게 빈 깡통은 아니로군.”
사고가 회복되자마자 용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만으로도 라지알은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용우는 자신이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틈을 노려서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통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왕의 권능은 그런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28만.”
그러나 왕의 권능이 지켜줄 수 있는 것도 라지알 뿐이었다.
라지알이 되살아나는 동안 용우는 가차 없이 다른 전장에 공격을 가했다. 그 결과, 라지알은 눈앞에서 시간을 도둑맞은 것처럼 절망적인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이제야 답이 나왔군.”
그들이 선 전장은 지옥의 한복판이었다.
열기와 유독성 물질이 휘몰아치는 혼돈의 한복판이다. 그 속에서 자신과 마주한 채로 웃고 있는 용우의 모습은 라지알에게는 정말로 악마처럼 보였다.
“네 바닥이 어디였는지.”
마침내 라지알의 마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끝이다.”
희망은 사라졌다.
종말의 군단은, 그들이 염원하던 왕과 함께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영원히.
‘언제부터였지?’
라지알은 발이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멍 속으로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절망적인 추락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언제부터… 길을 잘못 든 거였지?’
그런 그에게 용우가 한 걸음 다가온다.
“겁먹었나?”
용우가 묻는다.
그 말에 라지알은 움찔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용우가 다가왔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꿀꺽.
자신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문득 용우가 손가락을 헬멧으로 가져갔다.
파삭.
손가락을 대고 긋는 것만으로 헬멧이 부서져서 흩어지고, 지금까지 바이저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용우의 표정이 드러났다.
용우는 웃고 있었다.
“이제는 너도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군.”
“무슨 소리지?”
“지금까지 네놈들이 뭘 흩뿌리고 다녔는지.”
라지알은 용우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공포.
자신을 지배하는 감정의 정체를 깨달은 라지알에게 용우가 공격을 가해왔다. 라지알은 황급히 피했지만…….
파악!
용우의 공격이 그의 팔을 잘라버렸다.
꽝!
발차기가 꽂히면서 다리가 꺾였다.
“세 번.”
섬뜩한 선고와 함께 용우의 검격이 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
또다시 존재의 연속성이 단절된 것 같은 감각이 라지알을 덮쳤다.
다시 그의 감각이 세상을 인지한다. 더욱 절망적으로 변한 현실의 정보가 그의 뇌리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그 정보를 모두 이해하기도 전에, 용우의 공격이 그를 덮쳤다.
“카악……!”
검이 몸을 깊숙이 가르고 지나가면서 격통이 내달린다.
푹! 푹! 푸푸푹!
용우가 투명한 푸른 불꽃을 휘감은 단검을 연달아 투척, 라지알의 몸 곳곳에 꽂아 넣었다.
“끄아아아악!”
라지알이 비명을 질렀다. 신경계를 불태우는 것 같은 격통이 그의 정신을 유린하고 있었다.
이 고통은 단순히 육체가 파괴되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 그 자체를 공격하는 힘이다.
이제 용우는 라지알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놓는데 집착할 필요가 없다.
라지알의 힘이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용우와 라지알의 마력 격차가 커져가고 있었다.
-아스트랄 버스트!
빛이 폭발했다.
망막을 태울 것 같은 빛이었지만, 물리적 파괴력은 전혀 없다. 오로지 정신을 파괴하는 힘이 라지알의 영혼을 불태웠다.
“네 번.”
차가운 선고와 함께, 또다시 존재의 연속성이 단절되는 것 같은 감각이 라지알을 덮쳤다.
“앞으로 몇 번이나 되살아날 수 있을까?”
또다시 부활한 라지알을 보며 용우가 잔혹하게 웃는다.
“마지막에 죽는 게 너일까, 아니면 군단일까? 정말 궁금하군.”
다가오는 용우를 보며 라지알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절망이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 * *
차준혁은 뭄바이의 해변에서 헬멧을 벗어 던졌다.
그의 헬멧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바이저에 생긴 균열 때문에 시야가 방해되어서 벗어버린 것이다.
땀에 젖은 백발이 열풍에 휘날렸다. 대기를 달구는 열기와 온갖 독성물질이 섞인 흙먼지를 위협으로 인식한 허공장이 반응하며 스파크가 튄다.
“후우.”
한숨 돌리고 있는 그의 앞에 다수의 적이 나타났다.
왕의 권능으로 강화된 다수의 타락체와 고위 언데드였다.
그들 앞에서 차준혁은 한 손에는 광휘의 검을, 한 손에는 대구경 권총을 들었다.
“이제 끝을 봐야겠군.”
<쥐새끼처럼 도망치기만 하는 것은 포기했나?>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차준혁이 웃었다.
그의 M슈트가 빛을 발하면서, 마력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M-링크 시스템으로 폭증한 그의 마력에 적들이 흠칫 얼어붙었다.
성좌의 화신이 된 차준혁은 군주를 능가하는 마력을 지녔다. 권희수의 최고 걸작, M-링크 시스템은 그런 차준혁의 마력조차 두 배 가까이 상승시키고 있었다.
“과연 도망쳐야 하는 쥐새끼가 어느 쪽일까?”
이 힘이 유지되는 시간은 짧다. M-링크 시스템의 가동시간은 통상 출력으로 3분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차준혁의 앞에 선 적들의 힘이 감소하고 있었으니까.
군단원의 수가 하한선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부터 라지알의 힘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해지는 것은 그의 힘만이 아니라 왕의 권능 그 자체였다.
“도망칠 테면 도망쳐봐라. 그래 봤자 갈 곳이 없을 테지만.”
지금까지도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더욱 격렬하게 그들의 편을 들 것이다.
그 절망 속에서, 군단의 종언을 고하는 학살극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 * *
군단의 수가 줄어드는 속도는 계속해서 가속되고 있었다.
왕의 권능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팀 섀도우리스는 아껴두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군단이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배치한 최정예는, M-링크 시스템으로 마력을 폭증한 그들에게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20만.”
군단의 머릿수가 20만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부터는 마치 구멍 난 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왕의 권능이 축소되는 수준을 넘어 붕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군단은 갈수록 거대한 규모의 힘을 다루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다루는 힘의 규모가 축소되면 도저히 팀 섀도우리스를 막을 수가 없었다.
“10만.”
더 이상 전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방적인 학살극이 펼쳐졌다.
구세록이 헤아리는 군단원의 수가 초당 수백 명씩 줄어들었다.
10만이 9만이 되고, 9만이 8만이 되고…….
네 자릿수로 떨어지고…….
마침내 단 한 명만이 남았다.
“끝났군.”
용우는 온통 혼탁하게 불타오르는 서울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앞에는 라지알이 서 있었다.
“마지막에 남는 건 왕이었군. 백성은 왕을 위해, 하지만 왕은 자신을 위해.”
용우는 괴물로 변해버린 그를 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한결같은 것들이야. 자기 손톱 하나가 아픈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수천 명의 목숨도 버릴 수 있는 것들.”
용우는 그런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 오랫동안 꿈꿔온 복수의 마지막이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래. 그런 자들이었지.”
문득 라지알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은 것일까?
라지알은 슬슬 그 사실을 기억할 수 없었다. 존재가 단절되는 감각, 그리고 용우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하는 일이 반복되자 점점 현실감이 옅어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든 것일까 궁금했다.”
라지알이 중얼거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정신을 붙잡은 채로 용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군.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었어. 나는 타락체가 된 시점부터 이미 선택지 없는 외길에 몰려 있었던 거야.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결국은 이렇게 되었겠지.”
“원래 세상일은 그렇게 부조리한 거야. 네놈들에게 유린당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용우가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 의사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제물로 선택되어 어비스에 처넣어졌던 것처럼.”
누군가는 운명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개개인이 선한지 악한지, 노력하는지 나태한지 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닥쳐오는 것.
만약 그것이 의지 없는 재앙이었다면,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진이나 태풍을 미워하고 복수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일은 누군가의 탐욕과 악의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용우는 복수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계속 궁금했지.”
용우가 라지알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치직…….
라지알의 몸 여기저기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상앗빛 피부가 쩍쩍 갈라져서 마치 깨지기 직전의 도자기 인형처럼 보였다.
군단이 소멸하자 왕의 권능도 붕괴했다. 수십 번이나 되살아난 라지알의 불사성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복수는 나를 치유해줄 수 있을까?”
“이제 알게 되겠군.”
“그래.”
“군주 살해자, 아니 왕을 살해하고 군단에 멸망을 가져온 자여…….”
라지알이 용우의 검 끝에 목을 들이대며 연극적으로 말했다.
“부디 네 상처가 영원하길 빌지. 적이 없는 공허가 너를 잡아먹어 파멸로 인도하기를!”
“괜찮은 유언이군.”
용우는 씩 웃었다.
파악!
그리고 라지알에게 마지막 죽음이 내려졌다.
“…….”
육체를 잃은 라지알의 영혼이 구세록의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용우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종말의 군단은 전멸했다.
지구를 침공한 71만 7,467명 모두가 죽고, 그 영혼은 구세록의 지옥에 사로잡혀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문득 용우는 과거의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놈들이 누구든, 무엇을 해왔든… 설령 세상 모든 사람에게 숭배받는 신이라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세상 전부가 적으로 돌아선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적이 그 어떤 존재라고 하더라도 용우는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우리를 상처 입힌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야.’
눈을 감으면 절규가 들어온다. 시공간적 의미를 상실한 지옥 속에서 온갖 고통으로 쥐어 짜내지는 자들의 목소리.
그 소리가 천상의 음률보다도 더 아름답게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아서, 용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하게 미소 지었다.
“끝났어.”
장대한 복수를 마무리 짓고 만족한 자의 미소였다.
에필로그 미지와의 조우(遭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