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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에우라스가 느끼는 불길함은 커져갔다.
어느 정도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게이트가 클수록 게이트 브레이크까지의 제한 시간도 길다. 에우라스가 있는 120미터급 게이트는 게이트 브레이크까지 150시간 이상의 여유가 있었다.
재해 지역의 특성을 이용한 게이트 브레이크가 실패할 경우, 이대로 게이트 안에서 시간만 보내다가 모든 게 끝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전의 때는 코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왔군.’
거대한 마력을 지닌 존재들이 게이트 안으로 진입해오기 시작했다.
‘성좌의 힘을 쓰는 자들.’
느껴진다. 그들이 품은 성좌의 힘이.
‘군주 살해자와 벙어리 공주가 없다.’
하지만 진입자 중에는 가장 위협적인 두 명이 없었다.
‘안도감을 느껴야 할지 아니면 아쉬움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군.’
지금의 에우라스는 9등급 몬스터를 훨씬 능가하는 힘을 가졌다.
하지만 게이트라는 제한된 전장에서 서용우, 이비연과 맞붙는다면 승산은 전혀 없다.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살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에우라스에게 주어진 실낱같은 활로는 서용우나 이비연을 격파하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융합체를 손에 넣는다면 그는 다시금 군주로, 아니 그 이상의 존재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어쩌면 불완전한 왕인 라지알에게 도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잘 된 건가? 라지알, 확실히 우리를 빈손으로 보내지는 않았군.’
순간 에우라스는 자신과 부하들에게 주어진 권능 한 가지를 깨닫고 놀랐다.
그는 다중코어를 가진 특별한 괴물이다. 그리고 그의 다중코어는 더 수를 늘릴 수 있었다. 성좌의 무기나 군주 코어, 혹은 아티팩트를 손에 넣음으로써!
뿐만 아니다. 지금은 하나의 코어만을 가진 그의 부하 여섯 명도 코어를 늘릴 수 있었다.
‘아티팩트를 사냥한다.’
진입해온 자는 여섯 명이었고, 전원이 아티팩트 보유자들이었다.
에우라스가 저들을 격파하고 아티팩트를 강탈한다면, 어쩌면 뇌전의 군주였던 때를 능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 와라. 사냥감들이여.’
그리고 팀 섀도우리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괌의 120미터급 게이트에 진입한 것은 리사, 유현애, 이미나, 차준혁, 휴고, 브리짓 여섯 명이었다.
용우와 이비연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게이트 밖에서 대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라도 게이트 안에 진입할 준비를 갖춘 채로 상황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과연 게이트가 사상 최대급일만 하군.”
구세록의 권능은 게이트 내부를 완벽하게 관측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권능은 예전에 계약자에게 제공되던 것 이상이었다. 게이트 내부에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 마력은 어느 수준인지, 코어 몬스터는 무엇인지까지 전부 데이터화해서 볼 수 있었다.
‘이런 것 하나하나에서 놈들의 악의가 느껴지는군. 정말 꼼꼼하게도 사람 열 받게 만드는 새끼들이야. 한번 숨 쉴 때마다 특권의식을 실감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들.’
구세록의 초월권족은 무엇 하나 완전한 형태로 제공해주지 않았다. 별로 의미 없어 보이는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진정한 권능에서 뭔가를 덜어낸 다음 계약자에게 제공했다.
지구 인류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이가 갈리는 진실이었다.
“확실히 연습은 되겠네.”
이비연이 중얼거렸다.
적이 언제 총공세를 가해올지 알 수 없으니 이 게이트는 최대한 빨리 공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굳이 용우나 이비연이 나서지 않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이비연은 지금도 다른 일로 바빠서이기도 했지만…….
“아주 적절한 연습 상대지. 어차피 지구에서는 전력으로 싸우기도 힘드니까.”
게이트에 진입한 여섯 명이, 새롭게 주어진 힘에 익숙해질 기회였기 때문이다.
“한 번이나마 제대로 연습해볼 수 있고, 거기에 아티팩트 굉음의 도끼까지 회수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용우의 눈이 빛났다.
* * *
<음?>
게이트 안에 진입해온 팀 섀도우리스를 살핀 에우라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놈들의 모습이 이상하군. 왜 변신하지 않지?>
그들이 성좌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셀레스티얼의 모습으로 변신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군단이 파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섯 명 중 누구도 변신하지 않았다. 다들 M슈트를 입고, 총기를 든 지극히 헌터다운 모습이었다.
부하가 말했다.
<탐색하는 동안에는 힘을 아끼겠다는 수작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 제3세계의 인류는 탐색에 이상할 정도로 공을 들이는 경향이 있었지.>
에우라스는 그럴싸한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지구 인류는 게이트 공략 작전에 헌터를 투입하기 전, 탐색에 굉장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지구 인류에게는 지극히 상식적인 전술 행동이다. 하지만 다른 세계의 상식으로 보면 그렇지 않았다. 지구 인류는 마력이 없는 대신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달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 패턴이 당연시되는 것이다.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놈들이 변신하기 전에 쳐서 한두 놈쯤 없애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좋다. 방심의 대가를 알려주어라. 전원 한 놈씩 맡아서 공격하도록.>
에우라스의 승인이 떨어지자 부하들이 웃었다.
그들의 모습도 에우라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닮은 빛의 실루엣이었다. 그들이 얼굴에 눈코입의 형상을 만들어서 웃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보여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여섯 명의 언데드가 일제히 텔레포트 해서 팀 섀도우리스를 기습했다.
쾅!
폭음이 울려 퍼졌다.
<커억……!>
그리고 기습한 언데드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티팩트 광휘의 검을 든 차준혁이 자신을 기습한 언데드에게 역습을 가했기 때문이다.
“오만하군. 일대일로 기습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나?”
헬멧 안에서 그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의 손에 마술처럼 소총 한 자루가 나타났다.
콰아아앙!
에너지탄이 발사되면서, 강대한 마력의 반동을 버티지 못한 소총이 박살 났다.
하지만 그만큼 강력한 위력으로 발사된 에너지탄이 언데드를 강타했다.
<카아아아악!>
일격에 허공장을 관통당한 언데드가 비명을 질렀다.
<어, 어떻게 이런 위력을? 설마 환영? 아니, 그럴 리가…….>
언데드가 당황했다. 기습을 완벽하게 예상한 차준혁의 공격력이 두려울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괴물의 몸으로 내던져졌다지만 9등급 몬스터를 능가하는 마력을 지닌 그에게 단 두 번의 공격으로 이런 타격을 입히다니?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차준혁이 이미 변신을 완료한 채로, 환영을 써서 자신을 속여 넘겼을 경우였다. 하지만 환영을 간파하는 스펠을 펼쳐 봐도 차준혁은 변신하지 않은 채였다.
“괴상하군. 9등급 몬스터보다도 강력한 괴물이라. 타락체도 아니고, 특수 지휘관 개체도 아닌 것 같은데 이번에는 또 뭐지?”
차준혁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물론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라 언데드를 조롱하기 위함이었다.
<이놈……!>
언데드가 분노해서 뛰어들었다.
에너지체인 그는 부상을 입어도 신체결손이 일어나지 않는다. 코어를 직격당해 파괴당하지 않는 한, 마력만을 손실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뇌리에 각인된 고통을 금방 떨쳐버리고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투콰콰콰콰!
비록 이런 몰골이 되었다지만 그는 본래 군주를 가까이서 섬기던 최정예 언데드였다. 다종다양한 스펠을 활용하는 탁월한 전투기술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하지만 차준혁은 그 모든 공격을 수월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예지 능력인가? 그 알량한 능력을 믿고 있다면…….>
언데드는 자신의 공격을 방어하는 차준혁의 움직임만으로도 그 사실을 간파했다. 그가 곧바로 전술을 대(對) 예지능력자용으로 바꾸는 순간이었다.
쾅!
섬광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크악!>
그가 거리를 벌리자마자, 차준혁이 아공간에서 대구경 권총을 꺼내서 사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쾅!
그것도 한발로 끝나지 않았다.
쾅! 쾅! 쾅!
한 발 쏘고, 망가진 권총을 버린다. 그리고 곧바로 새 권총을 꺼내서 또 한 발 쏘고, 망가진 권총을 버린다.
아무리 대구경 권총이라지만 소총보다는 증폭탄두의 용량이 적다. 그만큼 발사되는 에너지탄의 위력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신 소총보다 신속하게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크윽, 으윽…….>
언데드가 신음했다.
그 역시 뛰어난 전투기술을 가진 자였다. 초탄은 허를 찔려서 맞았지만, 그다음부터는 철저하게 방어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오싹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네놈, 어떻게 그런 마력을……!>
차준혁의 마력은 그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증폭탄두를 이용해서 사격을 가했으니 언데드의 허공장이 일격에 꿰뚫리는 것도 당연했다.
“한때는 내가 마력만 강해지면 무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차준혁은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예지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지금은 필요할 때 이용해 먹는 무기로 인식하고 있지만 말이다.
지금의 그는 구세록의 계약자였던 때보다 더 강해졌다. 그만이 아니라 팀 섀도우리스 전원이 그랬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용우는 그들을 결전에 투입할 주요 전력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개개인의 전투기술이 뛰어나다 해도 8, 9등급 몬스터 수준의 마력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절대적인 머릿수 격차를 극복하는 답은 압도적인 화력뿐.’
적은 수십만 대군이다.
그럼에도 서용우가 팀 섀도우리스를 주요 전력으로 생각한 것은, 팀원 개개인의 힘을 강화할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차준혁은 아직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다.
구세록의 제약이 풀리면서, 그들이 끌어낼 수 있는 마력이 9등급 몬스터 수준으로 올라갔다. 심지어 더 이상 셀레스티얼로 변신할 필요도 없이 그 힘을 쓸 수 있게 되어서 장비 활용의 폭이 넓어지기까지 했다.
“시간 없다. 빨리 끝내자.”
차준혁이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M슈트의 건틀릿 파츠 안쪽에서 강력한 마력 파동이 발생했다.
<아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한 언데드가 놀랐다.
차준혁이 M슈트 안쪽의 맨몸에 장착하고 있는 팔찌, 반지, 목걸이 그리고 벨트 등등이 강력한 마력 파동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자 차준혁의 마력이 폭증하는 게 아닌가?
서용우와 이비연이 구세록의 초월권족을 몰살시키고 노획한 아티팩트급 장비들이었다.
* * *
휴고는 차준혁처럼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았다.
“다들 너무 느려.”
여섯 명 전원이, 여섯 명의 언데드에게 기습당했다.
그리고 다들 수월하게 기습을 막아낸 뒤, 기습자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새로 손에 넣은 힘을 하나하나 시험해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휴고는 기습을 막아내고 역습으로 승기를 잡은 시점에서 바로 적을 쓰러뜨렸다. 그의 특기인 초고속 마력 컨트롤이 제대로 활용된 결과였다.
“휘유. 역시 마력석이 쏠쏠하군.”
그러자 대량의 마력석이 쏟아져 내렸다. 휴고는 그것을 아공간에 챙겨 넣고는 곧바로 에우라스에게 접근해갔다.
차준혁의 통신이 들려왔다.
[휴고, 정면으로 맞붙지는 마라.]
[내가 바보냐? 저런 거랑 정면으로 치고받게? 하여튼 빨리빨리 처리하고 따라오라고.]
동시에 휴고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발동했다.
우우우우우!
그러자 그의 마력이 폭증한다.
그의 몸 곳곳에 장착된 일곱 개의 아티팩트급 장비가 발동한 효과였다. 지금 게이트에 진입한 여섯 명 모두가 이 정도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하하! 정말로 내 꼴이 우습게 되었구나! 벌레들이 감히 나를 연습 상대 취급해?>
에우라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분노보다도 먼저 자신의 신세에 비참함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전락했다고 해도… 군주 살해자라면 모를까, 네놈들은 내 앞에서 오만할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