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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최정예 헌터 팀, 팀 블레이드의 사장 오성준.
그는 이미 은퇴한 몸이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도 실전에 나선 바 있었다. 최전성기에 미치지는 못해도 아직 현역 활동이 가능할 정도의 기량을 갖췄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건 너무하는군.>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4층 빌라만한 덩치를 자랑하는 4등급 몬스터, 블랙 드레이크를 일격에 참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전성기일 때도 그런 것은 망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지금 블랙 드레이크를 일격에 죽여 버리고 그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구세록의 힘인가.>
오성준은 페이즈9에 달하는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각성자들의 마력이 세대를 거듭할수록 높아진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여전히 현역에서도 통용되는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 오성준의 마력은 페이즈9 정도가 아니었다. 7등급 몬스터 수준의 마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평소와는 달랐다. 새하얀 갑옷이 전신을 감쌌고, 머리 위에는 굵직한 빛의 고리가 떠서 일렁이고 있었다. 등 뒤로는 하얀빛이 분출되고 있는데 마치 펄럭이는 망토처럼 보였다.
성좌의 힘을 나눠 받은 자, 셀레스티얼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 대사 뭔가 악당 같지 않나?”
오성준이 쓴웃음을 지으며 옆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며, 어둠 속에서 서용우만이 선명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오성준 역시 셀레스티얼이 아니라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그와 마주했다.
구세록의 정보공간이었다.
“이런 힘이 있으면 확실히 자네들이 없어도 지구를 지킬 수 있겠군. 지구를 지킨다라, 내가 이런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날이 다시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진지하게 했던 때가 있었습니까?”
“어린 시절에는 그랬지. 세계를 지키는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거나, 지구방위대가 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 많이 하잖나.”
“사장님한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누구에게나 있지. 사실 난 자네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상상이 안 가지만.”
지구의 운명을 좌우하는 초인, 서용우도 예전에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오성준은 용우를 아무리 봐도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오성준이 물었다.
“이런 힘이 몇 명에게 주어진 건가?”
“최종적으로는 35명이 될 겁니다. 지금까지 19명의 작업이 끝났고요.”
전 세계에서 선별한 35명의 각성자에게 셀레스티얼의 힘이 주어진다.
강한 마력뿐만 아니라 올라운더로 활약할 수 있는 다종다양한 스펠까지 주어지니, 팀 섀도우리스가 없더라도 지구를 게이트 재해로부터 수호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왜 나였나?”
오성준은 왜 용우가 자신을 선택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현역 수준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평가였다. 진짜 팔팔한 에이스급 현역들과 비교하면 노쇠한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용우는 자신을 선택한 것일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팔이 안으로 굽었다는 건가?”
“반은 그렇습니다. 나머지 반은… 이 힘을 쓰는 사람 중에, 이 힘의 의미와 한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지?”
“사장님은 저에 대해서 압니다. 그건 즉 지금 손에 쥔 힘의 한계를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죠.”
“…….”
용우의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오성준은 전율했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힘이다.
그 말은 즉, 세상을 뜻대로 바꿀 수 있는 힘이란 의미도 된다.
단지 뛰어나다는 이유로 힘을 준다면, 그중 누군가는 의무를 수행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지도 모른다. 세상이 혼란에 집어 삼켜진 지금, 힘이 갖는 의미는 더없이 크니 자신에게 주어진 힘에 취해버린다 한들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거에 이미 그런 존재들이 있었지요.”
1세대 구세록의 계약자 같은 존재는 그들로 충분하다. 용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사장님한테 드린 힘은 무한정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정된 자원을 쓰고 있을 뿐. 어차피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모든 게 끝입니다. 그때까지 잘 부탁합니다.”
용우는 그 말을 끝으로 정보공간에서 나왔다.
* * *
용우가 정보공간에서 나오자 그 앞에는 백발을 뒤로 질끈 묶은 청년, 차준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른다섯 명이나 되는 인원에게 힘을 나눠줘도 괜찮은 건가?”
차준혁이 물었다.
예전에는 성좌의 힘을 많은 이에게 나눠줄수록 좋았다.
한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힘에 제한이 걸려 있었고, 그 뿌리가 되는 성좌의 힘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구세록의 초월권족을 몰살시킨 용우와 이비연은, 그들이 걸어두었던 제한을 해제했다. 이제 두 사람은 자신의 그릇이 버틸 수 있는 한계치까지 그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을 다수에게 나눠줘 버리면 그만큼 용우와 이비연이 쓸 수 있는 힘도 줄어들지 않는가?
“괜찮아.”
차준혁이 묻는 뜻을 알면서도 용우는 태연했다.
“그 서른다섯 명에게 제공될 힘은, 너희들에게 제공되는 것과는 소스가 달라. 성좌의 무기로부터 공급되는 게 아냐.”
“무슨 소리지?”
“구세록에 비축되어 있던 힘이야.”
“그런 게 있었다고?”
“있었지. 초월권족 놈들이 자신들이 쓰기 위해 비축해놓은 힘이.”
용우가 이미 몰살시킨 적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내비치며 말했다.
“제물로 바쳐진, 제1세계의 사천만 명이 생산한 힘.”
구세록을 구축하고, 군단에 제약을 가했음에도 그 영적 자원은 다 소진되지 않았다. 잉여 에너지는 고스란히 구세록의 초월권족을 존속시키고, 언젠가의 전쟁을 위해 비축되었다.
“제2세계가 파멸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힘.”
군단이 제2세계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영적 자원을, 구세록의 초월권족도 나눠 가졌다. 그들은 그 힘으로 마력을 강화하고, 나머지는 전략 자원으로 비축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세계에서 발생한 힘까지 더해졌지.”
어비스로 납치당한 24만 명이 생산한 영적 자원.
군단이 게이트 재해를 통해 지구를 침략하면서 수확한 영적 자원.
“그리고 구세록의 계약자와, 그들에게 빙의당했다는 이유로 제물이 되고 만 각성자들의 영혼.”
그들은 구세록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지옥에서 영적 자원을 쥐어짜내어지며 고통받고 있었다.
“그렇게 생산되고, 비축된 힘의 양은 어마어마해. 서른다섯 명에게 할당해준 것은 그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걸 다 쓰려면 꽤 시간이 걸리겠지.”
적어도 그들이 최종결전을 치르는 동안 다 소모될 일은 없었다.
“남은 힘은 전부 우리가 쓸 거야.”
구세록의 초월권족이 비축해왔고, 그리고 이제는 그들의 영혼을 연료로 삼아서 발생시키고 있는 무진장의 영적 자원.
이 모든 것이 결전을 위한 전략자원으로 투입될 것이다.
“캡틴, 한 가지 꼭 대답해줬으면 하는 게 있다.”
“뭐지?”
“선생님은 어떻게 되신 거지?”
“이미 알고 있잖아?”
차준혁이 어렵사리 꺼낸 질문에 용우는 질문으로 대답했다.
“난… 선생님을 만났다.”
차준혁은 용우와 이비연이 구세록의 세계에서 지구로 돌아오는 순간, 자신을 찾아왔던 백일몽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건 정말 선생님이었나? 선생님의 영혼이 놈들에게서 해방되어 나를 찾아온 거였나?”
“그럴 거야.”
용우는 구세록의 지옥에서 고통받던 영혼들을 해방시켜주었다.
미켈레, 엔조 모로, 허우룽카이처럼 원한 관계로 맺어진 자들까지도.
그들에 대한 원한은 이미 해소되었다. 용우는 그들을 더 괴롭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용우는 그들이 고통받던 지옥을 초월권족의 영혼들로 채웠다. 지금까지 남의 고통으로 발생한 영적 자원의 수혜자였던 그들은, 이제 자신의 고통으로 영적 자원을 생산하며 속죄하게 될 것이다.
“선생님…….”
눈을 지그시 감은 차준혁이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그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고맙다.”
“날 원망하지는 않나?”
“왜?”
“다니엘 윤을 다시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죽게 내버려 뒀으니까.”
구세록의 세계 속에서, 초월권족은 영혼만 보존되면 얼마든지 부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 권능의 수혜를 입는 것이 초월권족에게만 허락된 일이었을까?
그곳에 있는 영혼이라면 누구나 가능하진 않았을까?
차준혁 역시 그런 가능성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용우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게 가능했다 하더라도… 선생님이 그걸 바라셨을 리가 없다.”
“…….”
“나도 안다. 그분은 지쳐 있었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은 그분에게는 해방의 순간이었을 거야. 그런 그분을 이제와 되살려 살아가길 강요한다면, 그건 내 이기심에 불과하겠지.”
차준혁은 슬프게 웃었다.
지금 그들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삶과 죽음의 가치조차 훼손된 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어찌 소중한 이를 되찾고 싶지 않을까?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바쳐서라도 소중한 사람을 살아 숨 쉬게 만들고 싶다.
하지만 슬프게도 삶이 축복이라는 명제는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삶은 고통으로 가득한 지옥이다. 눈을 뜨고,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다니엘 윤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상처투성이였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입은 채로 너무나 무거운 죄책감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내게 미움받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캡틴.”
“그런 쪽팔리는 생각은 한 적 없는데.”
“그런가. 오해해서 미안하군.”
“…….”
차준혁이 다 안다는 표정으로 사과하자, 용우는 입을 다물었다.
* * *
브리짓과 휴고는 산더미 같은 마력석을 앞에 두고 있었다.
“이렇게 쌓아놓고 보니 엄청나긴 하군.”
휴고가 혀를 내둘렀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비축해둔 마력석 저장고였다.
미국 정부는 설령 마력석 공급이 끊겨도 향후 5년간 미국 전역에, 지금까지와 동일한 규모의 전력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의 마력석을 비축해두고 있었다.
그것도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타락체들의 테러로 인프라가 파괴된 지금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더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으리라.
자국의 영토 수호를 넘어, 세계 곳곳에 헌터 전력을 파견해왔던 미국의 마력석 생산량은 그만큼 엄청났던 것이다.
“이걸 다 써버려서 놈들에게 이기고 나면… 그다음에는 괜찮을까?”
휴고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서용우는 두 사람에게 미국이 비축해놓은 마력석을 전량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군단과의 결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전략자원을 충분히 갖출 필요가 있었다. 용우와 이비연이 마력석을 활용해서 준비할 경우, 얼마나 큰 전력 향상을 이룰 수 있는지를 감안하면 타당한 요구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미국이 멀쩡했다면 들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애비게일 카르타라 해도 미국의 모든 것을 멋대로 하는 횡포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머니는 힘을 잃으셨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내 몫이야.’
애비게일 카르타는 미 정부의 핵심 권력자들을 장악함으로써 미국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군단의 대공세는 미국의 행정, 군사 시스템에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애비게일 카르타가 쌓아온 영향력에도 크나큰 타격을 입혔다.
브리짓이 말했다.
“걱정해 봐야 의미 없는 일이야. 이기지 못하면 모든 게 끝이니까.”
“그렇긴 하지만…….”
“넌 눈앞의 문제에 집중해. 뒷일은 내가 생각할 테니까.”
브리짓은 정보를 다루는 전문가였다. 그녀는 일찌감치 용우의 요구를 예측하고, 휴고가 떠올린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자원은 문제지. 하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야.’
세계가 혼란에 휩싸인 지금, 종말의 군단을 무찌르고 게이트 재해에서 해방되는 순간부터 수많은 문제가 인류를 덮칠 것이다. 브리짓은 그 문제들로부터 미국을 지켜낼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휴고, 너는 그런 일에 어울리지 않아.’
휴고는 자신을 과시하길 좋아하고, 대중의 관심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대외적 이미지와 자신의 본질 사이에서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설령 자기 목숨이 위험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뛰어들 것이다.
그 대상이 미국인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휴고는 해외에 파견되었을 때도 언제나 위험을 감수하며 최선의 결과를 내도록 노력해온 사람이니까.
‘휴고, 너는 영웅이야. 하지만 이제 혹독한 시대가 닥쳐올 거야.’
선량함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다가올 것이다.
인류를 괴롭혀온 재앙의 근원을 파괴함으로써, 인류는 그동안 잊고 있던 내적 문제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인류의 도덕성을 시험하는 지옥이 되리라.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런 길은 나 혼자만 걸으면 돼.’
미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 브리짓은 결국 자신이 1세대 구세록의 각성자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휴고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그는 천진한 영웅으로 남을 것이다. 브리짓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브리짓.”
갑자기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며,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무슨 일이죠, 제로?”
서용우가 그녀를 정보공간으로 소환한 것이다. 그를 보는 순간 브리짓은 마음속 한구석에서 공포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의 서용우는 인류의 유일한 대안이다. 인류의 운명은 그에게 걸려 있고, 동원 가능한 모든 역량을 그에게 쥐어줘서 군단을 멸해야만 한다.
그 사실에는 브리짓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과연 그 이후에는 어떨까?
군단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면, 그 후에는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민이 많아 보이는군.”
“…….”
텔레파시가 기본인 정보공간에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감정이 전달될 수밖에 없다. 용우는 그녀의 고민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이 뒤의 일을 생각하고 있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요. 지금 할 고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지금 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고민이니까.”
“당신 성격상 지금은 마음속에 넣어두라고 해도 그러지 못하겠지.”
“…….”
“걱정하지 마. 당신들은 내게 성의를 다했다.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에게서 힘을 거두어가지 않을 거야.”
브리짓은 용우가 말하는 ‘쓸데없는 짓’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확답을 해준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에 안도감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탁할 게 하나 더 생겼어. 긴급한 건이야.”
“뭐죠?”
“그건…….”
용우가 꺼낸 용건에 브리짓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