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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은 지구에 대공세를 가함으로써 막대한 영적 자원을 수급했다.
하지만 이번 작전을 위해 영적 자원을 극심하게 소모하였기에, 영적 자원의 수급만으로 따지면 이익을 봤다고 보기 어려웠다.
물론 이번 작전에서 영적 자원의 수급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작전 목표는 지구가 게이트 재해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크게 약화시키는 것.
이 목표는 확실히 달성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단은 그 사실을 기뻐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그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 * *
<라지아아아아알!>
뇌전의 군주 에우라스가 포효했다.
꽈르릉! 꽈아아아앙!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뇌전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 위력은 수백 발의 낙뢰가 떨어지는 것과도 같다. 그야말로 뇌전의 폭풍이다.
“하하하. 이거 참, 내가 에우라스 당신을 너무 낮게 평가했던 모양이야.”
그러나 그 살의가 향하는 표적, 라지알은 여유로웠다.
-뇌전 포식자!
허공에 무수한 빛의 점들이 명멸하면서 뇌전을 빨아들였다.
한순간에 날뛰는 뇌전의 위력이 급감하면서, 라지알이 백금의 광채를 발하는 양손 대검을 휘둘렀다.
<크아악!>
에우라스가 비명을 질렀다. 라지알의 검격에서 뿜어져 나온 섬광이 그를 가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제, 제길……!>
에우라스가 비틀거렸다.
방금 전의 일격은 제대로 먹혔다. 허공장이 갈라지고 몸통이 한번 갈라졌다가 다시 재생되었다.
그런 그에게 라지알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는 완전히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왼팔에는 백은의, 오른팔에는 황금의 건틀릿을 장착했고 몸에는 화려한 백금의 갑옷을 입었다. 그리고 손에는 백금의 광채를 발하는 양손 대검이 들려 있었다.
“설마 트라드도, 데바나도 아니고 당신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했을 줄이야.”
대지의 트라드와 광휘의 데바나.
두 군주는 살해당했다.
<이 배신자, 무슨 속셈이냐?>
그들이 아군으로 믿었던 존재, 라지알에게.
군단의 이번 대공세는 살아남은 세 명의 군주들을 처치하기 위한 라지알의 함정이었다.
특수 지휘관 개체는 세 군주가 신임하는 부하들이었다.
군주들은 라지알이 제공한 비술로 그들에게 힘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 비술은 군주조차 힘겨워할 정도로 힘의 낭비가 심하다. 대신 군주가 직접 빙의할 때와 달리, 지구에서 발목이 잡힌 채로 본체를 공격당할 염려가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군주들은 후자의 장점을 보고 이 비술을 전수받아 사용했지만…….
<그게 우리 힘을 빼놓고자 하는 수작이었다니……!>
라지알은 전자의 단점을 이용하기 위해 군주들에게 이 비술을 추천하고, 전수했다.
라지알은 군주들이 특수 지휘관 개체를 장시간 유지하느라 막대한 힘을 소모한 타이밍을 노려서 기습을 가했다. 군주들은 지치기도 지쳤지만, 그 상황에서 라지알에게 기습당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그 기습이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기습당한 트라드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라지알 또한 서용우가 군주를 살해할 때 선보인 스펠, 필멸자의 세계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바나는 상황을 인지하고 대비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특수 지휘관 개체를 유지하느라 힘의 소모가 극심한 상태였다. 그에 비해 라지알은 그들을 해치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니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데바나도 무력하게 살해당하고, 에우라스만이 남았다.
하지만 에우라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탈출로를 확보해두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놓치는 줄 알았지 뭐야.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야. 에우라스, 당신도 오늘 여기서 죽는다.”
라지알이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에우라스가 만약을 대비한 것에는 감탄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라지알이 상정한 변수에 속해 있었다. 단지 트라드나 데바나가 아닌 에우라스가 그 대상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뿐.
에우라스는 주인 없는 왕궁을 탈출하여 부하들을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미리 준비한 탈출로를 통해 밖으로 나왔을 때, 그곳에는 거대한 결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지알은 자신과 에우라스를 격리된 공간으로 이동시켰다. 과거 볼더가 지배했던, 이제는 빠르게 혼돈에 침식되고 있는 세계로.
<설마 전군을 왕의 섬으로 집결시킨 것도 이걸 위해서였나?>
“겸사겸사지. 실제로 그런 조치가 필요했던 건 당신도 인정하는 바가 아닌가?”
군단의 전 병력이 왕의 섬으로 집결하면서, 본래 그들이 존재했던 여러 세계는 텅 비어 버렸다. 라지알이 남몰래 함정을 준비하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네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군. 하지만…….>
에우라스의 외견은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호사스러운 군주의 의복을 입은 해골이었다. 격렬한 뇌전을 휘감은 그의 손에 열 개의 반지가 나타나 장착되었다.
“호오. 이런 것도 준비하고 있었나?”
라지알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에우라스의 손가락에 끼워진 열 개의 반지는 전부 아티팩트급 장비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바로…….
“마력을 비축했다가 본신에 충전해주는 아티팩트라니…….”
특수 지휘관 개체를 유지하느라 극심하게 소모되었던 에우라스의 마력이 엄청난 기세로 회복되었다.
“정말 철두철미한 성격이었군, 당신은. 오늘 여러 번 놀라게 되는데?”
마력을 회복한 에우라스가 장비를 교체했다.
비축된 마력을 전부 에우라스에게 전한 반지들이 사라지고, 다른 반지 열 개가 그 손에 채워진다.
뿐만 아니다. 양 손목에는 두 개의 팔찌가, 목에는 하나의 브로치가, 머리에는 왕관이, 마지막으로 손에는 장검이 나타났다. 전부 다 아티팩트급 장비였다.
-저주 중화 발동!
그 효과는 가지각색이다. 마력을 증폭해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방어 용도로 쓰이는 것도 있었다.
라지알이 구축한 결계의 갖가지 저주 효과가 중화되기 시작했다.
<비루한 타락체들의 우두머리 놈.>
분명 라지알은 강하다. 초월권족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신분의 일원이었던 그의 마력은 다른 타락체들을 월등히 능가한다.
하지만 그런 라지알조차도 마력으로는 군주에게 필적하지 못한다.
<과연 네가 준비한 함정이 나를 잡기에 충분한 것 같으냐?>
“확실히… 이 함정은 당신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지.”
군주 하나하나에게 맞춤 설계한 함정을 준비하는 것은 엄청난 자원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라지알도 트라드와 데바나에 대응하는 세팅만을 준비했다. 설마 에우라스가 이토록 철저하게 만약을 대비했을 것이라고는 예상 못 했기 때문이다.
지금 에우라스를 압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트라드와 데바나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저주들뿐이다. 에우라스의 권능인 뇌전에 특화된 대응책은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아.”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자신감이군. 하지만 왜냐? 왜 지금 이런 일을 벌인 거지?>
에우라스는 라지알의 배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군단은 위기를 맞이했다. 지금은 군단의 모든 역량으로 활로를 찾아야 할 때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 타이밍에 배신을 때렸는가? 군주들을 죽여서 그가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설마 구세록 놈들과 거래라도 한 거냐? 네 생존을 조건으로?>
“하하하. 그건 너무 상상력이 풍부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럴 일은 없지.”
라지알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군단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고. 그건 당신도 잘 알잖아?”
<…타락체의 비술이 완전하지 않다는 건 이미 증명되었지.>
“아, 비연이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그런 경우가 아냐.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건… 이게 군단을 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야.”
<뭐라고?>
에우라스는 당혹감을 느꼈다. 이놈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한 가지 의문을 갖고 있었지.”
천 년도 더 지난 의문이다. 그만한 세월이 지났음에도 가슴 속에 박혀서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기도 했다.
“라지알은, 왜 후회했을까?”
<무슨 소리냐? 역시 미쳐버렸나 보군.>
에우라스 입장에서는 생뚱맞은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라지알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잠깐만 인내심을 갖고 들어보라고. 내가 왜 이런 일을 했는지 알고 싶다면.”
<…….>
“역시 당신은 모두를 속이고 있었나 보군. 이렇게나 신중하고 인내 깊은 당신이.”
라지알은 에우라스의 태도에 놀라고 있었다. 모두에게 폭급함의 대명사로 알려진 그의 모습이 모조리 위장된 것이었을 줄이야.
“타락체가 되기 전의 나는, 사랑하는 혈육을 희생시켰어. 그게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지.”
왕위에 대한 야망을 위해서였다. 또한 군단과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던 자신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필요하다 판단해서이기도 했다.
“라지알은 그 선택이 옳다고 믿었다. 마지막까지. 하지만 동시에 한 가지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지.”
그리고 타락체 라지알은 천년을 넘는 장구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타락체가 되기 전의 자신은 그 선택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그는 후회했을까. 왜 평생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감정에 사로잡혔을까.
“나는 오랫동안 그 감정이 궁금했어. 그런데 이제 그 답을 얻었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나는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믿어. 내가 살기 위해서, 나아가서는 우리 군단이 살기 위해서는 이 길을 갈 수밖에 없어.”
그렇게 확신했기에 셋밖에 안 남은 군주들을 함정에 빠뜨려 죽인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아프군. 오랫동안 당신들은 내가 동격으로 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들이었지. 함께 군단을 지탱해온 존재들이기도 하고. 그런 당신들을 배신해서 죽였다는 사실이 내게 한 가지 감정을 가르쳐주었어.”
그 감정은 바로 죄책감이었다.
“나는 비로소 라지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감정의 크기는 다를 것이다. 초월권족 라지알이 품었던 감정이 훨씬 더 깊고, 무거웠다.
그럼에도 두 감정은 같은 감정이었다. 타락체 라지알은 처음으로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배웠고, 그로써 낯설기만 했던 과거의 자신을 이해했다.
<들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는, 언제 나오지? 슬슬 지루하군.>
에우라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계속 전투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라지알이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보고 있었기에 이야기를 들어준 것이다. 라지알의 개인사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들을 가치가 있었잖아? 그럼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지.”
라지알이 웃었다.
“우리는 이번 대공세로 많은 걸 얻었어. 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
<어차피 우리를 죽이기 위한 함정에 불과했으니까?>
“아니. 우리가 이번 일로 얻은 것은 전략적인 이득인데, 어차피 우리는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가 없으니까. 전략적 이점을 살려서 제3세계를 야금야금 갉아먹을 기회가 없단 말이야.”
<그건 그렇지. 하지만 설마 그게 네 선택을 정당화해줄 이유란 말이냐?>
분명 군단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군주를 제거하는 게 어째서 해법이 된단 말인가? 그나마 남아있는 파멸까지의 시간을 앞당길 뿐인데?
“이런 상황에서 군단을 살릴 방법은 한 가지뿐.”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왕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
종말의 7군주와 라지알은 모두 왕위계승권자들이다.
언젠가 그들 중 하나가 왕이 된다. 그로써 군단은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군단의 오래된 믿음이었다.
<다른 왕위계승권자를 말살하면, 자신이 왕이 된다.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것이냐? 네놈의 고향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을?>
하지만 군단이 바라는 ‘왕’은 지구 인류가 생각하는 ‘왕’과는 다른 존재다.
역사상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환상.
그렇기에 ‘왕위계승권’ 또한 역사 속에 존재했던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애당초 그들은 왕위에 도전할 권리를 가졌을 뿐, 서열화되어 있지도 않으니까.
“아니.”
라지알은 고개를 저었다.
“답을 알려준 것은 군주살해자였다.”
<무슨 뜻이지?>
“그는 군주들을 죽였지. 그리고 지금껏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기적의 산물을 만들어냈다.”
성좌의 무기와 군주 코어를 하나로 합친 결과물 ‘융합체’를.
“서로 대적하던 성좌의 힘과 군주의 힘이 하나가 되었지. 심지어 그 모든 힘이 충돌하지 않고, 하나로 융합되어 거대한 권능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하나의 개체가 두 개 이상의 성좌, 혹은 군주의 힘을 갖는다.
그것은 서용우의 등장 이전까지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일이었다.
성좌의 무기를 창조한 구세록의 초월권족도, 종말의 군주들도 똑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믿음은 깨졌다. 서용우는 그들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모든 법칙을 깨고 이 전쟁을 끝내려고 하고 있었다.
“융합체를 얻는 자가 진정한 왕이 될 것이다. 그것만이 군단을 살리는 길이다.”
<그럴싸하게 들리는 헛소리군.>
에우라스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미 네놈이 일을 저지른 이상, 그 방법에 걸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너와 나, 이겨서 살아남는 쪽이 그 도박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내가 왜 당신이 하는 짓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고 생각하지?”
차갑게 웃는 라지알의 옆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두 개의 빛덩어리였다.
하나는 눈부신 백색의 빛을, 하나는 은은한 흑색과 갈색의 빛을 띠고 있었다.
<설마…….>
그것을 본 에우라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미 융합체를 만들 방법을 찾아냈단 말이냐?>
라지알에게 살해당한 데바나와 트라드의 군주 코어였다.
“시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힘을.”
한번 파괴되면서 군주의 의지가 거세된 두 개의 군주 코어가 라지알 앞에서 하나로 융합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갑옷 가슴 부분에 박아 넣은 라지알이 말했다.
“자, 시작하자. 군단의 운명을 건 싸움을.”
왕좌를 갈망하는 타락체와, 군단 최후의 군주가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