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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넘게 왕 노릇을 했으면서도 인망은 없었던 모양이군.”
두 사람이 왕좌가 있는 알현실로 들어설 때, 그들을 막아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왕을 제외한 모든 초월권족이 죽었으니까.
“마지막까지 왕을 지키겠다는, 기개 있는 놈이 있기를 기대했는데.”
용우의 시선이 왕좌에 앉은 왕을 향했다.
앳된 외모의 소년이었다. 인간 기준으로는 열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인다.
하지만 용우도, 이비연도 그 외모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상대의 실체를 너무 잘 알았으니까.
왕이 두 사람을 노려보며 물었다.
“우리를 다 죽인다고 해서 너희들이 바라는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앳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강한 척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지만 눈빛에도, 표정에도 두려움이 가득했다.
용우는 그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왕좌를 향해 걸어간다.
“자살한 놈이 꽤 많았네. 현명하다고 해야 하나?”
이비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 알현실에도 자살자의 시신이 다섯 구나 널브러져 있었다. 분명 왕을 끝까지 수행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자들이었으리라.
“내,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왕이 겁에 질려서 물었다.
용우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푹!
네뷸라로 가차 없이 왕의 배를 찔러버렸다. 칼날이 왕의 몸통을 관통하고, 왕좌까지 관통해서 왕을 꼬치처럼 꿰어놓았다.
“아, 악……!”
전신을 내달리는 격통에 왕이 입을 벌리고 비명을 토해냈다.
용우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너희들을 파멸시키는 거야. 어때, 우리가 원하는 걸 못 얻을 것 같아?”
“아악, 으…….”
왕은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전 처음 겪는 아픔에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고통의 소리를 내뱉을 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는 김에 겸사겸사 네놈들이 쥐고 있던 구세록의 권한도 손에 넣으면 좋지. 근데 그건 말야.”
용우가 왕의 턱을 붙잡고 올려, 자신을 바라보게 하며 말했다.
“네놈들이 제발 빨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면서 우리한테 주게 될 거야.”
“……!”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들의 영혼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찾아냈으니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 명을 고문해서 알아냈다.
“영혼인 채로 고통받는 게 어떤 건지 시험해보고 싶으면 죽음으로 달아나는 걸 시험해봐. 네놈들이 여태까지 제물 취급해온 사람들에게 한 짓이 어떤 것이었는지 직접 느끼게 해주지.”
용우가 잔혹하게 웃으며 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자, 그럼 시작하자. 일단 한번 고통을 배우고 나면, 빨리 죽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초월권족 최후의 생존자가 죽음을 애원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지구의 상황은 시시각각 심각해지고 있었다.
타락체들의 테러로 한국을 비롯한 헌터 강국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몬스터들의 준동으로 인한 혼란이 퍼져 가는데, 그 혼돈을 통제할 시스템이 붕괴해 버렸다.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삼켜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으윽…….>
차준혁은 고층빌딩에 처박힌 채로 신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콰과과광!
초음속으로 날아든 에너지탄이 그를 강타했다. 그의 몸이 빌딩을 뚫고 반대편으로 튕겨 나왔다.
쿠르르릉……!
중간이 끊어진 빌딩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기 시작한다.
부러지는 빌딩의 한쪽 면에 무언가가 달라붙어 있었다.
“이제야 끝이 보이는군.”
상아인 타락체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타락체는 그 혼자가 아니었다.
쾅!
튕겨 날아가던 차준혁을 거구의 암석인 타락체가 덮쳐서 땅으로 쳐 날렸다.
“크하하하하! 끈질긴 놈, 여기까지다!”
암석인 타락체가 땅으로 추락하는 차준혁을 추격해갔다. 땅에 처박히는 차준혁을 그대로 내리찍을 셈이었다.
<웃기지… 마라!>
하지만 차준혁은 대지에 닿기 직전 몸을 반전시키며 광휘의 검을 휘둘렀다.
콰광!
대지와의 충돌을 피하지 않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공격이었다.
잔뜩 가속이 붙은 암석인 타락체는 그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크악……!”
암석인 타락체의 오른팔이 잘려서 날아올랐다.
물론 차준혁도 무사하지 못했다.
고속으로 땅에 처박힌 것은 허공장으로 무효화했다. 그러나 암석인 타락체의 공격이 그 위로 꽂히는 것은 피하지 못한 것이다.
<제, 제길…….>
차준혁은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며 신음했다.
그와 리사는 도버 해협을 건너는 9등급 몬스터 폭풍용, 그리고 그놈을 조종하던 특수 지휘관 개체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세계 곳곳을 테러한 타락체들이 합공을 가해왔던 것이다.
팀 섀도우리스는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다수의 타락체에게 합공 받아서 각개 격파당하고 있었다.
‘우리가 놈들을 너무 얕봤다.’
설마 이런 대공세가 가능할 줄 몰랐다.
게다가 마구 몰아치는 것만이 아니었다. 투입한 전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전술적 성과를 내고 있지 않은가?
재해 지역의 몬스터와 특수 지휘관 개체를 이용, 팀 섀도우리스를 끌어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 틈을 타서 단숨에, 국가의 시스템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테러를 가했다.
마지막으로, 테러를 끝낸 타락체들로 하여금 뿔뿔이 흩어진 팀 섀도우리스를 각개격파하게 한다.
군단의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빌어먹을. 우리가 있는데도 빈집털이를 당한 격이라니.’
서용우와 이비연, 둘 중 한 명만 있어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이 차준혁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 자식, 곱게 죽진 못할 줄 알아라!”
암석인 타락체가 격분해서 차준혁을 걷어찼다. 튕겨 날아간 차준혁의 몸이 버스를 부수고 그 너머의 아파트에 처박혔다.
쿠과광!
충격이 전신을 뒤흔든다.
‘위험해. 이제 허공장이…….’
차준혁은 슬슬 허공장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도버 해협에서 상당한 힘을 소모해버린 상태에서 서울을 테러한 세 명의 타락체에게 합공당했다. 그중 하나를 처치하기는 했지만, 슬슬 한계가 보이고 있었다.
<한 놈 정도는 더 길동무로 데려가 주지……!>
차준혁이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상아인 타락체가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그 투지에는 경의를 표하지. 하지만 의미 없는 일이다. 너는 여기서 죽고, 네가 가진 열쇠는 우리 것이 되겠지. 그리고 결국 이 세계는 멸망한다.”
<나를 죽여도,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는 안 될 거야.>
“아니, 그렇게 된다. 네 동료도 너와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래. 내 동료들도 다 죽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말이다.>
차준혁이 힘없이 웃었다.
<너희들은 결국 빈집털이범에 불과해. 곧 우리 캡틴이 돌아올 거야. 그럼 결국 너희들은 다 죽어.>
“캡틴? 아, 군주살해자를 말하나 보군. 확실히 그가 보이지 않았지.”
서용우와 이비연의 부재는 군단 입장에서도 의아한 점이었다.
본래 군단의 전술 계획은 팀 섀도우리스를 전선으로 끌어내고, 각국을 테러하는 것까지였다. 테러를 완료한 시점에서 타락체들은 철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서용우와 이비연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실이 군단이 계획을 보다 공격적으로 변경하게 만들었다.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돌아와 봤자 분통해 할 뿐이겠지. 이미 잃은 걸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안 그런가?”
상아인 타락체가 차준혁을 조롱할 때였다.
갑자기 이상한 기척이 그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음?”
상아인 타락체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뭐였지?”
그가 의아해할 때였다.
파지지지직!
갑자기 그의 허공장이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뭐야?”
앞으로 다가온 차준혁의 허공장과 부딪치면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갑자기 어디서 이런 힘이 난 거지?’
눈에 띄게 감소했던 차준혁의 마력이 급격하게 회복되고 있었다.
‘아니, 회복이 아니라 처음보다 더 강해지는 것 같다.’
놀라는 상아인 타락체 앞에서 차준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갑자기 실성한 것처럼 웃어대던 차준혁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중얼거렸다.
<난 말이지, 죽은 사람이 뭘 바라는지 알고 싶었다.>
상아인 타락체에게는 생뚱맞게 들리는 소리였다. 그에게는 차준혁이 갑자기 미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차준혁은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 소원을 이런 식으로 풀게 될 줄 몰랐군. 정말이지 인생은 예측불허야.>
* * *
다니엘 윤이 죽은 후, 오랫동안 차준혁은 괴로워했다. 루가루를 통해 그가 사후에 맞이한 잔인한 운명을 알게 된 후로는 더더욱.
죽은 자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지옥에 떨어진 후로도 다니엘 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이 차준혁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다니엘 윤의 유지를 지키는 것뿐이다.
“고생하는구나, 준혁아.”
차준혁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각오한 지금, 마음속의 갈망이 기억 속 다니엘 윤의 목소리를 귓가에 재생한 것이라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너를 괴롭게 만들었구나.”
하지만 곧 차준혁은 그것이 환청이 아님을 깨달았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던 차준혁의 눈에 흐릿한 실루엣이 보였다. 흩어지는 연기처럼 뿌연 무언가였다. 하지만 그 실루엣만으로도 차준혁은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 실루엣이 차준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부디 용서해주렴. 나도 한낱 인간일 뿐이라, 내가 어떻게 죽을지는 몰랐으니까.”
<선생님…….>
“넌 잘 해낼 거야. 믿고 있었단다, 언제나.”
실루엣이 흐릿해지며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 * *
<…….>
눈을 한번 깜빡이고 나자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차준혁은 자신의 의식이 잠시 시간의 틈새에 들어갔다 나왔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백일몽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난 아직 꿈에서 깨지 않은 거겠지.’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이 마력이 허상일 리가 없지 않은가?
<모두 들리나?>
그리고 꿈에 그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이 저 남자의 목소리를 이렇게 반갑게 느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사실이 우스워서 차준혁은 실소하고 말았다.
<우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난리가 난 것 같군.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일단 모두에게 선물을 주지.>
서용우가 모두에게 깜짝 선물을 날렸다.
<다들 힘이 차오르는 걸 느낄 거야. 구세록 놈들이 걸었던 제한이 풀렸거든.>
그 말대로였다.
차준혁의 마력은 서용우에게 성좌의 무기를 넘기기 전, 구세록의 계약자였던 그때 수준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방금 정보 공간 이용 기능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타락체를 탐지할 수 있는 기능을 업데이트했으니까 마음껏 쓰도록 해. 그리고 누구든 좋으니 짧고 간결하게 상황을 보고해주면 고맙겠군.>
재빨리 보고를 시작하는 브리짓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차준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당황한 타락체들을 보며 선언했다.
<너희들의 시간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