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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율하는 광휘의 화신 앞에 이비연이 내려섰다.
단발머리를 쓸어 넘기며 활짝 웃는 그녀가, 광휘의 화신에게는 너무나 두려워 보였다.
“슬슬 나한테는 부담스러운 수준인걸? 이쯤에서 끝내야겠어.”
성좌의 화신들의 마력은 여전히 상승 중이다. 한 명을 해치우는 사이 그들의 마력은 최고점의 6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의 우리와 필적하는 마력이라고? 처음부터?”
광휘의 화신은 아연해 졌다.
조금 전, 빙설의 화신을 처치하는 순간 이비연은 이 전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최대 출력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은 광휘의 화신이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광휘의 세계수, 이런 응용도 가능했단 말인가?”
“그런 것도 몰랐어?”
이비연이 웃었다.
광휘의 세계수가 이비연의 결전 병기로 불렸던 이유는 단순히 광범위한 화력 지원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일단 구현되고 나면 끊임없이 확장해가면서 이비연에게 무한히 마력을 제공해주는 반칙적인 동력원이다.
용우가 그녀와 싸웠을 때, 광휘의 세계수를 봉인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던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용우가 중얼거렸다.
“그래. 슬슬 부담스러워지긴 하는군. 수를 줄여야겠어.”
“뭐라고?”
용우를 포위하고 맹공을 퍼붓던 네 명에게는 어이없는 말이었다.
물론 빙설의 화신이 당한 것은 뼈아픈 타격이었다. 용우에게 의표를 찔린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용우는 직접 상대하는 네 명에게는 이렇다 할 타격을 주지 못했다. 네 명의 연계가 워낙 촘촘했고, 방어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광오한 소리를 하다니?
“도발이라기에는 너무 황당한 소리군. 우리야말로 본 실력을 보여주지.”
라무스가 눈을 빛냈다.
-박제된 찰나!
동시에 그가 받은 성좌-새벽의 해머의 권능이 발동되었다.
그를 포함한 네 명이 일제히 초가속 상태에 들어갔다. 그들은 뒤로 물러나면서 강력한 스펠들의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0점짜리 선택이다.”
그 순간, 용우의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뭐야?’
일반인은 ‘말’이라고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발음의 나열.
그것은 초가속에 들어간 네 화신의 시간감각으로는 평범하게 ‘다른 언어’로 들려오는 말이었다.
-오만의 거울 광역화!
네 화신이 퍼부었던 십자포화가, 용우가 구현한 에너지막에 튕겨 되돌아왔다.
-겸허의 거울 광역화!
10만분의 1초 차이로 또 다른 스펠이 발동한다. 오만의 거울을 깨고 들어간, 검을 형성해서 날리는 것처럼 물질을 형성해서 쏘아내는 공격들마저 튕겨 되돌아왔다.
콰과광! 콰과과과과광……!
네 화신은 되돌아온 공격들을 방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혼란 속에서 라무스는 섬뜩한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보다 빨랐다.’
용우의 반응이 그들보다 빨랐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용우는 일찌감치 초가속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그와 싸우는 네 명이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이탈해서 재정비해야 한다.’
흩어진 상태로는 각개 격파당한다. 빠르게 우선순위를 결정한 라무스가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용우가 폭발을 뚫고 쇄도해왔다.
“제기랄!”
판단과 행동 모두 용우가 한발 앞서가고 있다.
라무스는 천년의 세월 동안 녹슬어 버린 자신의 판단력을 원망했다. 그가 눈앞에 닥쳐온 용우를 요격하기 위해 공격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용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에게 돌진해온 용우는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환상으로 눈속임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타이밍을 빼앗겼어……!’
그들 개개인은 용우보다 마력이 훨씬 뒤떨어진다. 하지만 네 명이 합공함으로써 용우가 힘을 모으거나, 한 명에게 연속적으로 공격을 가할 수 없도록 타이밍을 빼앗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히 퍼부었던 공격이 반사되는 바람에 그 연계가 흐트러졌다.
그리고 혼란 속에서 환상에 속아 넘어가는 바람에 한 번의 타이밍을 빼앗기고 말았다.
세 명이 환영에 속아 넘어가서 주춤하는 시간.
그 짧은 시간은…….
“크악!”
용우가 한 명을 베어버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뇌전의 화신이 당했다.
용우가 내리친 검이 그의 몸통을 비스듬하게 가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피보라가 뿜어져 나오기도 전에 다시 되돌아온 검이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지금까지의 교전만으로도 우리 실력을 완전히 파악했단 말인가?’
라무스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뇌전의 화신은 용우를 상대하기 위해 붙은 네 명 중 가장 전투기술이 뒤처지는 편이었다. 짧은 교전 동안 그 사실을 파악하고 한순간에 쓰러뜨리다니.
‘이대로는 무너진다.’
라무스는 위기감을 느끼며 지시했다.
<모두 상공으로 대피해! 모여서 재정비한다!>
소음과 흙먼지 때문에 상황을 잘 파악할 수가 없다. 게다가 막 대규모의 스펠이 폭발한 직후라서 마력 탐지로는 모든 것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라무스는, 일단 모두를 눈에 보이는 곳으로 모으려 했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아.’
라무스는 흙먼지 위로 솟구친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같이 솟구친 동료, 굉음의 화신을 용우가 정수리부터 수직으로 베어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거리를 벌릴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마력과 신체 능력은 물론이고 전투기술도 용우가 우위에 있다.
그런데 그 앞에서 무작정 거리를 벌리겠다고 솟구친다?
용우에게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두 동강 난 굉음의 화신의 시신을 붙잡은 용우가 웃었다.
-에너지 드레인!
통제를 잃은 마력이 급속도로 용우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것을 보고 분개한 대지의 화신이 뛰어들었다. 굉음의 화신이 그의 형제였기에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이놈이!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뻔한 도발이다! 넘어가지 마!”
라무스가 말렸지만 이미 늦었다.
초가속 상태에서 한순간에 거리를 좁힌 대지의 화신이 검을 휘둘러 공격을 가한다. 용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검을 향해 자신의 양손 대검을 휘둘렀다.
파지지직!
격렬한 스파크가 꿈틀거리며 공간이 진동했다.
“크으으으윽……!”
대지의 화신이 온 힘을 다해서 용우에게 부딪쳤다.
현재 그의 본신 마력은 최고 도달점의 7할.
그런 그가 마력 증폭기로 출력을 올리고, 아티팩트급 장비의 힘까지 빌리자 용우와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다.
“젠장!”
라무스가 가세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대지의 화신까지 당해 버리면 모든 게 끝이다. 이대로 마력이 최고점에 도달할 때까지 버텨야 했다.
파파파파파파!
그때 상공에서 쏟아져 내리는 섬광의 비가 라무스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그리고 그 앞에 나타난 이비연의 검이 흉포한 기세로 라무스를 노려왔다.
‘그새 당했나!’
설마 이비연이 이 정도로 강했을 줄이야.
빙설의 화신이 죽은 것은 용우와의 연계 때문이었지만, 광휘의 화신은 이비연의 실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비켜라!”
라무스가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내리치는 검이 옆을 치고, 비스듬하게 올려치는 공격이 등 뒤를 찌른다. 예측불허의 초공간 공세가 펼쳐졌다.
투쾅!
그러나 그 공격이 막힌다.
이비연 역시 초공간 공세로 맞섰기 때문이다.
“……닮았어.”
문득 이비연이 중얼거렸다.
콰콰콰콰콰콰!
라무스와 이비연이 격렬한 검투를 벌였다. 움직임마다 공간을 뛰어넘고, 허공장과 마력을 부딪쳐가면서 싸우는 여파가 수 킬로미터 저편까지 미치고 있었다.
“겉모습만 닮은 게 아니라 마력 컨트롤도, 검술도 라지알과 닮았네.”
타락체 이비연은 욕망이 없는 존재였다. 향상심이 없는 그녀는 전투기술을 더 갈고 닦는데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타락체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기억에 존재하는 전투기술을 탐구하는데 관심이 많았다.
라지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2세계의 신성한 돌, 지구 인류 출신의 타락체들을 훈련 상대로 삼길 즐겼다. 초월권족의 것이 아닌 이질적인 전투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이비연은 수도 없이 라지알의 훈련 상대가 되어주었다. 비록 향상심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전투기술은 타락체 중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났으니까.
그 경험 때문에 이비연은 라지알의 전투기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라지알과 이비연 만큼 전사로서의 서로에 대해서 잘 아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닮았을 뿐이야.”
“무슨 뜻이냐?”
“당신이 라지알보다 훨씬 무디다는 뜻이지.”
이비연이 라무스의 공격을 뿌리치며 물러났다.
이미 라무스의 마력은 최고 도달점의 8할을 넘었다.
이비연과의 마력 격차는 꽤 커진 상태였다. 슬슬 공격을 허공장으로 받아내면서 치고 들어갈 수 있었다.
라무스가 전술을 바꾸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이런!’
라무스의 표정이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동료, 대지의 화신이 용우에게 쓰러졌다.
“이럴 수가…….”
대지의 화신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마지막 일합은 기괴했다.
용우의 검과 대지의 화신의 검이 부딪쳤다.
그리고 용우의 검이 대지의 화신의 검을 깨끗하게 잘라버리고, 대지의 화신의 몸통까지 갈라버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용우와의 마력 격차는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대등한 수준이 된 시점에서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 벌어지다니?
‘처음부터였나.’
라무스는 절망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짜 힘을 보여주지 않은 거였나.’
삶과 죽음이 교차한 한 합의 승부는 한 가지 진실을 라무스에게 가르쳐주었다.
용우의 마력은, 대지의 화신의 마력을 아득히 능가하고 있었다.
라무스는 용우가 탈라를 죽일 때 보여준 힘을 전력이라고 판단했다.
어비스 최후의 생존자가 지닌 힘, 초월권족에게서 노획한 아티팩트급 장비들 그리고 성좌의 무기 융합체가 더해져서 종말의 군주에게 필적하는 힘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추측은 완전히 틀렸다.
그것조차도 용우의 전력이 아니었다. 그때 보여준 것은 용우의 본신 마력이었을 뿐이다.
종말의 군주와 필적하는 마력을 지닌 용우에게 아티팩트급 장비의 마력 증폭 효과는 미미하게 적용되었다.
하지만 네뷸라는 달랐다.
네뷸라는 성좌의 무기 다섯 개와 군주 코어 세 개를 융합시킨 결과물이다. 네뷸라를 쥔 용우는 종말의 군주조차 압도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라무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랬군. 우린 처음부터 답이 정해진 문제를 풀고 있었던 건가.”
“이제야 깨달았군.”
“왜 굳이 우리와 놀아준 거지?”
“예행연습이었지. 좋은 연습 상대라고 생각했거든. 다른 놈들과 달리 너희 여섯은 싸울 줄은 아는 수준이라 좋은 연습이 됐다.”
무엇을 위한 예행연습인지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구세록의 초월권족들을 쓰러뜨리고 나면 용우가 싸울 적은 단 하나만 남을 테니까.
라무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끝났구나.’
모든 것이 끝났다. 라무스는 그 사실을 이해했다.
용우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혼자 남았군. 어때, 완전체가 된 소감은?”
“그게 의미가 있을까?”
“나한테는 있지. 풀파워라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긴 했으니까.
“…….”
라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침내 그의 마력 상승이 멈췄다. 최고점에 도달한 것이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몰살이라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성좌의 화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대단해. 근소하게나마 군주보다도 우위군.”
그렇게 최고점에 도달한 라무스의 마력은, 용우의 본신 마력을 웃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군주보다도 약간이나마 위였다.
과연 군주를 상대하기 위한 결전 병기라고 할 만하다.
용우가 물었다.
“타락체 라지알과는 무슨 관계지?”
“…그는 내 동생이다.”
역시 혈육이 아니고서야 이토록 쏙 빼닮았을 리가 없었다.
라무스는 용우가 자신과 동생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용우는 첫 번째 질문만으로도 흥미를 잃은 기색이었다.
라무스가 물었다.
“나도 질문 하나 해도 되겠나?”
“싫은데.”
“네가 대답할 생각이 드는 질문이라면 어떻겠나?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면 무시해도 좋다.”
“해봐.”
“성좌의 화신은 군단과의 최종전쟁을 위해 숨겨둔 결전 병기였다.”
군사 책임자로서, 라무스는 그 결전 병기를 쓰러뜨린 용우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이 힘으로 군단과 싸웠다면 어떻게 됐을 거라고 생각하나?”
“푸훗.”
이비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하!”
오랫동안 군단의 타락체였던 이비연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 질문이었다.
라무스가 물었다.
“내 질문이 그렇게 어리석었나?”
“응.”
“어느 부분이 그렇지?”
“그 질문도 어이가 없는데. 당신들, 여기서 천년 넘게 관객 노릇 했다면서? 종말의 군단이 제2세계와 한 전쟁도 처음부터 끝까지 봤을 거 아냐?”
“그랬다.”
“그런데 왜 당신들 머릿수로 군단을 당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
“…….”
“물론 머릿수만 문제가 아니지. 가뜩이나 적은 병력이 수준까지 미달인데.”
구세록의 초월권족들은 마력만 강할 뿐이다. 군단의 정예와 전사로서의 역량을 비교하면 상대도 안 됐다.
질적으로도 상대가 안 되는데 수적으로는 아예 비교가 안 될 정도다. 그런데도 저런 질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성좌의 화신이 대 군주용 결전 병기가 될 수는 있겠지. 당신들 수준으로는 절대로 군주들을 못 이기겠지만. 혹시 그건 이해하고 있나?”
“이해하고 있다.”
라무스가 한숨을 쉬었다.
용우에게는 그 대답이 의외였다.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는 결전의 때를 좀 더 먼 훗날로 보았다.”
“지구도 망하고, 그다음에 다른 세계도 몇 개쯤 더 망한 뒤에?”
용우가 비아냥거리자 라무스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와 군단의 차이는, 우리는 전쟁이 계속될수록 개개인의 마력이 계속 커지지만 군단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지. 그 이유는…….”
“군단이 받는 이익을, 너희들도 나눠 받고 있기 때문이지.”
“역시 모든 걸 알고 왔군.”
“필요한 건 루가루에게 다 들었지.”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지구의 시간 감각으로는 천년도 더 전의 일이다.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 생명을 버리고 언데드의 길을 선택한 종말의 군단이 다른 세계를 침략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Chapter55 강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