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순간 전장에 정적이 내리깔렸다.
“이, 이럴 리가…….”
부하들을 지휘하여 이비연에게 맹공을 퍼붓던 지휘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들의 결전 병기, 성좌의 화신이 단 일격에 무너졌다.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아니, 믿기 싫은 현실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 이제 이놈들을 치울 차례네.”
이비연이 손가락을 튕겼다.
쾅!
폭음이 울리며 지휘관이 튕겨 나갔다.
“뭐야?”
다른 초월권족이 놀랄 때였다.
쾅!
또 한 명이 뭔가에 맞고 나가떨어졌다.
“저, 저격인가?”
한 발을 막아낸 초월권족이 공격이 날아든 방향,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였다.
쾅! 콰콰콰콰콰쾅……!
하늘에서 섬광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피할 길이 없는 공격이었다. 사방팔방 어디를 봐도 수만 개의 섬광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하늘이…….’
부질없는 발버둥을 하던 초월권족은 피할 길 없는 섬광 너머의 풍경을 보았다.
빛이 하늘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규모는 반경 수백 킬로미터에 달한다. 거대한 빛의 결계는 그만한 덩치를 지녔으면서도 탐욕스럽게 하늘을 집어삼키면서 확장을 거듭했다.
-광휘의 세계수!
이비연이 구현한 빛의 결계였다.
그녀는 초전에서 용우가 발한 종말급 스펠 ‘땅 위의 태양’으로 발생시킨 에너지를 변환, 자신의 마력과 융합해서 하늘로 쏘아 올렸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순환 및 확장시키면서 저토록 거대한 빛의 결계를 구축한 것이다.
그 규모는 예전, 용우와 싸웠을 때 구현한 것보다도 월등히 컸다. 이제는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태양빛을 흡수해서 무한의 동력원으로 변해 있었다.
용우가 굳이 불굴의 벽을 걷어낸 이유가 바로 광휘의 세계수였다. 이비연의 전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환영과 마력 은폐 결계로 가려놓고 있었던 건가!’
저토록 거대한 빛의 덩어리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비연이 방금 전까지 대규모 환영으로 감춰두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환영은 이 자리의 초월권족들이라면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어도 간파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당장 눈앞에 거대한 존재감을 발하는 적이 있는데 하늘이나 쳐다볼 수 있겠는가?
“이건… 이럴 수는 없어!”
초월권족들은 필사적으로 재앙에 저항하고 있었다.
방어막과 허공장으로 섬광을 막고, 비껴내고, 블링크로 공간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도망칠 수가 없다.
유일한 방법은 텔레포트로 초장거리 공간도약을 하는 것뿐인데…….
-공허 문지기!
그것만은 용우와 이비연이 용납하지 않는다.
블링크로 이동 가능한 좁은 권역에 갇힌 채 압도적인 화력에 짓눌려가고 있었다.
-선다운 버스트 연속…….
“고맙기도 하지.”
그리고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대규모 스펠을 발하려고 하면, 그 순간 용우와 이비연이 그 틈을 찌르고 급습해온다.
콰직!
“크, 아……!”
이비연에게 심장을 꿰뚫린 초월권족이 허우적거린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고작 한 번의 죽음일 뿐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살아날 수 있어도, 죽음이 익숙하진 않은가 보네?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으면 미리 연습 좀 해두지 그랬어?”
이비연이 잔인하게 속삭이며 그의 숨통을 끊었다.
“아직도 부질없는 희망에 매달린다니, 동정을 금치 못하겠군.”
용우는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그들을 보며 웃었다.
이대로 즐겨도 좋겠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복수심이 만족하지 못한다. 내면에 자리 잡은 흉포한 악의가 더 잔인한 복수를 속삭이고 있었다.
-필멸자의 세계!
그리고 용우는 그 속삭임을 거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용우를 중심으로 주변 반경 10미터가 흐릿해졌다. 모든 것이 열화된 것 같은 그 영역 안에는, 용우의 손에 목을 붙잡혀 제압당한 초월권족 하나가 존재하고 있었다.
“잘 봐둬라.”
용우의 선언이, 아직 살아있는 초월권족들에게 똑똑히 전달되었다.
“너희들이 믿고 있는 불멸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거대한 양손 대검의 형태를 띤 성좌의 무기 융합체-네뷸라가 빛을 발하며 초월권족의 심장을 꿰뚫었다.
“……!”
그 광경을 본 초월권족들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말도 안 돼…….”
그들은 공포로 몸을 떨었다.
“그럴 수는 없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용우가 그들을 비웃었다.
“약속하지. 너희들에게 다음은 없어. 오늘로 모든 게 끝이야.”
그 일격으로 그들의 동족이 소멸했다.
부활하기 위해 필요한 것, 영혼마저도 부서져서 흩어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으아아아아악!”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동족 하나가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
초월권족 전사들은 패닉에 빠졌다. 이 상황에서 그들을 지탱하고 있던 것은 얼마든지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런데 용우가 그 믿음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아직 생존해 있던 15명 중 절반은 눈앞의 상황조차 잊고 몸을 돌려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 고작 이걸로 전의가 무너졌나? 유감이군.”
물론 용우는 단 한 명도 도망치게 놔줄 생각이 없었다.
파파파파파파!
온통 빛으로 가득한 하늘에서 빛의 호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영생과 불멸을 믿었던 자들이 하나씩 하나씩 죽어간다.
장구한 세월을 살아온 자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절규했다.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그쳤다.
* * *
섬광의 비가 그치자, 세계에서 소리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물론 착각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에는 소리가 가득하다. 급격한 온도 변화로 인해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그리고 아직 잦아들지 않은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피어오른 흙먼지가 움직이는 소리가…….
오직 의지를 갖고 말을 하는 존재가 지워졌을 뿐.
“오는군.”
그리고 용우가 그 제한된 침묵을 깨고 속삭였다.
결판이 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탈라가 죽고 나서 나머지가 몰살당하기까지는 채 2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때로 2분은 제법 긴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시간을 필요로 했던 초월권족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2분이었을 것이다.
쿠구구구구구……!
주변 가득한 흙먼지를 뚫고 빛이 솟구쳤다.
하나가 아니다.
여섯 개의 빛이 차례차례 밝혀지며 거대한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광휘.
굉음.
뇌전.
빙설.
대지.
새벽.
탈라에게 주어졌던 불꽃을 제외한, 여섯 성좌의 힘을 가진 존재들이 용우와 이비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초월권족의 결전병기, 성좌의 화신 여섯이 모였다.
그것은 마력만으로 보면 종말의 군주 여섯이 한자리에 모인 것과 같다.
그 힘의 설계 의도대로라면 그랬어야 했다.
“시간이 부족했겠지. 하지만 올 수밖에 없었을 거야.”
용우가 그들을 비웃었다.
여섯 명 모두 마력이 상승 중이었다. 최고점이 도달하기까지는 아직도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나온 것은, 나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용우와 이비연이 왕궁의 방어막을 깨고 진입하기 전에 막아야만 했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라니, 상당히 빠르네.”
이비연이 중얼거렸다.
초월권족들이 굼뜬 것은 아니었다. 지구의 군대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사태가 터지고 나서 5분 안에 전투력을 갖추고 출격할 수 있다면 그건 신속함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다.
“약탈자들이여.”
점잖은 인상의 청년, 광휘의 화신이 입을 열었다.
용우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말했다.
“저놈만 살려두자.”
투명한 빛을 휘감은 새벽의 화신, 라무스를 가리키면서.
“라지알 본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닮은 게 신기하니까.”
라지알과 한번 봤을 뿐인 용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쏙 빼닮은 용모였다.
“그러게. 형제인가?”
“부친일지도 모르지. 어쨌든 혈육일 거야.”
광휘의 화신은 말문이 막혔다. 이만한 마력을 가진 존재 여섯을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무시하다니?
“이토록 오만방자한 자들은 처음 보는군.”
“혹시 너희 문명에는 거울이 없냐?”
“뭐?”
“거울이 있으면 매일 같이 보고 살 거 아냐. 근데 처음 본다니까 거울이 없나 했지.”
“예의도 모르고, 품격도 없는 놈이로구나. 그런 힘을 가졌으면서도…….”
“오빠. 괜히 상대해주지 마. 시간 지날수록 귀찮아지는 거 뻔히 알면서.”
이비연이 대화를 자르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콰콰콰콰콰콰!
그리고 다시금 빛의 호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얕은 수작이다!”
광휘의 화신이 양손을 합장했다. 그러자 빛의 호우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게 아닌가?
-선다운 버스트 연속 투하!
그리고 하늘에서 가느다란 빛들이 연달아 떨어져 내리며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아!
전술핵급 대폭발이 연달아 터지면서 빛의 호우를 밀어내었다.
이비연은 미련 없이 빛의 호우를 취소했다. 광범위한 지역을 무한 난타하는 것이 빛의 호우가 가진 강점이다. 그 타격을 무효화할 수 있는 적이라면 다른 방법을 쓰는 편이 낫다.
파지지지직!
그런 그녀에게 광휘의 화신이 돌진해왔다.
“네놈들에게 겸손을 가르쳐주마.”
그뿐만이 아니다. 사나워 보이는 인상의 여자, 빙설의 화신도 합공을 가했다.
“오호라. 오빠는 무섭지만 나는 둘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판단하셨구나?”
“방심한 자신을 원망해라.”
광휘의 화신이 맹공을 퍼부으며 말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용우와 이비연은 느슨하게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완벽한 연계를 포기한 그 포진이야말로 여섯 화신이 찌를 수 있는 틈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유리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힘은 계속해서 오르고 있다.
용우와 이비연과 대적하기 위해 소모되는 마력은 막대하다. 그럼에도 매 순간 그들에게 공급되는 마력이 훨씬 더 컸다.
“과연 그럴까?”
문득 이비연이 웃었다.
파악!
그리고 그녀의 검이 불가사의한 궤도를 그리며 광휘의 화신을 베고 지나갔다.
“으윽!”
광휘의 화신이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비에만 전념하던 이비연이다. 그런데 한순간에 공세로 전환하면서 그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이 움직임은 뭐지?’
이 자리에 모인 여섯 화신은 ‘왕을 지키는 일곱 검’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앞서 죽은 탈라가 소속된 이 집단은 왕궁을 수호하던 근위기사단의 지휘관들이다. 구세록의 초월권족 중에서는 마력과 전투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들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비연의 움직임을 간파할 수가 없다.
파직!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이비연의 검이 그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섬뜩했다. 마력이 조금만 낮았다면 허공장을 뚫고 피를 봤을 공격이었으니까.
‘무서운 검술!’
광휘의 화신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둘이서 합공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벌써 자신의 목이 떨어졌을지도 몰랐다는 것을.
이비연의 움직임은 기묘했다. 분명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채 보고 있는데도 공격의 조짐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움직임이 예측대로 이뤄지질 않는다.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상정하고 맞붙어도 어느 순간 생각지도 못한 허점을 찔리고 있다.
‘마력도 생각보다 강하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비연의 마력이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강하다는 점이다.
지금의 그들은 최고 도달점의 5할을 넘었다. 전원이 탈라가 죽기 전보다 강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이비연을 밀어붙일 수가 없다.
단순히 전투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비연의 마력이 예상외로 강해서 화력전으로 몰고 갈 틈을 만들 수가 없었다.
‘어째서지? 융합체 때문인가? 융합체의 성능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군.’
이비연은 초전에서 아티팩트급 장비 두 개를 추가로 노획해서 총 세 개를 장착하고 있다. 그리고 굉음의 도끼와 뇌전의 사슬을, 소우바 코어를 매개체로 융합시킨 굉뢰까지 쓰고 있다.
이 무구들의 상승효과는 굉장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성좌의 화신 두 명의 맹공을 수월하게 받아내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딴생각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나 봐?”
문득 이비연이 속삭였다.
‘아차!’
의문 때문에 잠깐 주의가 흩어졌기 때문일까?
퍼엉!
이비연의 발차기가 그를 때렸다.
그 공격에 실린 뇌격이 광휘의 화신의 허공장을 뚫고 들어왔다.
“크윽……!”
그리고 연타가 들어온다. 광휘의 화신은 내리치는 검격을 방어했지만…….
파악!
이비연의 검격이 공간을 뛰어넘어서 그의 몸통을 베고 지나갔다.
‘초공간 검술인가! 이런 기술까지……!’
앞에서 휘두른 검이 뒤를 베고, 옆을 노리던 검이 머리 위에서 내리꽂히는 예측 불허의 초공간 공세!
꽈과광!
그리고 베인 부위에서 뇌광이 폭발하면서 광휘의 화신을 튕겨내었다.
“하나 줄이고!”
이비연이 결정타를 넣기 위해 뛰어들었다.
빙설의 화신은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화아아아악!
앞에 띠처럼 나타난 극저온의 빙결 섬광이 이비연을 저지했다.
주춤한 이비연에게 빙설의 화신이 돌진해왔다. 서리 맺힌 쌍검이 변칙적인 궤도로 이비연을 노리는 순간이었다.
“어?”
일순간, 세상이 둘로 나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뭐, 가……?”
빙설의 화신은 자신의 목소리가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사실에 놀랐다.
한 박자 늦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베였어.’
하지만 무엇에?
의문에 사로잡힌 그녀의 눈이, 용우의 눈과 마주쳤다.
용우는 허공에 검격을 날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
빙설의 화신은 전후사정을 깨달았다.
“응. 네 생각이 맞을 거야, 아마도.”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서 이비연이 속삭였다.
파학!
몸통이 잘린 빙설의 화신을 정수리부터 두 동강 내버리면서.
콰과과과과과……!
용우의 검격과, 이비연의 검격이 교차한 지점에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빙설의 화신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것을 본 광휘의 화신은 전율했다.
‘그 상황에서, 그걸 노리고 있었다고?’
이비연이 광휘의 화신을 원하는 지점으로 끌어들이고, 그 순간을 노려서 용우가 공격을 가했다. 네 명의 적을 상대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던 용우가 날린 공격이 빙설의 화신을 직격해서 두 동강 내버린 것이다.
‘우리는 놈들이 연계하기 전에 허점을 찔러 분단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한 가지 공포스러운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함정에 빠졌을 뿐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