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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은 술렁이고 있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세계를 떠받치는 일곱 빛기둥 아래 존재하는 도시는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낙원 같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위치한 왕국은 과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었다.
오래전, 그들의 고향 세계가 종말의 군단에 파멸하기 전의 아름다움을.
“얕보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듣지를 않는군…….”
왕궁의 심장부, 왕좌 앞에 선 초월권족 남자가 탄식했다.
다른 초월권족과 마찬가지로 상앗빛 피부와 뾰족한 귀를 가진 젊은 남자였다. 황금색 눈동자에 눈부신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그를 서용우와 이비연이 본다면 곧바로 누군가와 닮았다고 여길 것이다.
타락체의 우두머리, 라지알과 쏙 빼닮은 용모였으니까.
왕좌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무스 장군.”
“예, 폐하.”
라무스라 불린 남자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탈라가 출격을 요청하는구나.”
“병력을 얼마나 요구했습니까?”
“직속 병력만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탈라 직속이라면 15명 정도였을 겁니다.”
“허락해도 되겠나?”
“안 됩니다.”
“적은 고작 두 명이다. 그리고 초전으로 이미 전력이 파악되었지. 그런데도 말인가? 탈라가 페드말처럼 적을 얕보고 덤빌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안 됩니다.”
라무스의 태도는 단호했다.
앳된 목소리의 왕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저들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이냐?”
“이미 귀한 전투원을 예순여섯 명이나 잃었습니다. 전투를 놀이로 생각하는 얼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중에서 제대로 된 전투원은 드물고, 더 잃고 싶진 않군요. 확실하게 막을 수 있는 수를 써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불멸! 얼마든지 부활시킬 수 있다.”
“부활은 공짜가 아닙니다.”
초월권족은 구세록의 세계 속에서 불멸성을 얻었다.
설령 살해당한다 해도 그들의 영혼은 강력한 권능으로 만들어진 안정화 공간에 머문다. 그리고 구세록에 축적된 영적 자원을 소모함으로써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이 짜증을 냈다.
“하지만 주제도 모르고 우리의 성지를 흙발로 짓밟은 것들이다. 저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있느냐?”
“우리가 상정한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못 한, 종말의 군주를 살해하는 위업을 세운 존재들이기도 하고. 그런 자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자들의 격에 걸맞은 태도 아니겠습니까?”
“음……!”
“게다가 저들을 굴복시키는 것만으로도 기나긴 기다림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저들이 만들어낸 융합체의 가치를 생각하면 당연히 존중해줘야 합니다.”
성좌의 무기와 군주 코어를 융합시켜 만들어낸 기적의 산물, 융합체.
구세록의 초월권족 입장에서 그것은 너무나 탐나는 보물이었다. 저것을 손에 넣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천 년 동안 기다렸는데도 여전히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숙원이, 오늘 이뤄질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왕을 보며 라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천 년 만에 맞이하는 적이라.’
모두가 흥분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 역시도 피가 끓는 것을 느꼈으니까.
‘기다림에 지치다 못해 미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
구세록의 초월권족은 1,322명.
그것이 제1세계의 파멸에서 살아남아 미래를 도모하는 생존자 전부였다.
그들은 폐쇄된 세계 속에서 오로지 과거를 반추하며 살아왔다. 성장도, 변화도, 죽음도 없이 정체된 상태로.
제2세계가 파멸하기까지, 그리고 제3세계가 파멸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이 그들에게 제공되는 신선한 오락이었다. 그들은 세상 모든 것이 자기들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것 같은 감각을 즐기며 우월감에 젖었다.
그것은 이미 광기였다.
아무리 현명하고 선량한 자라 할지라도, 이런 환경에서는 영혼이 썩는 것을 피할 수 없으리라.
하물며 처음부터 현명하지도, 선량하지도 않았던 자들이라면 어떻겠는가?
“놈들이 이동하기 시작했군요.”
“어차피 대응할 것도 없지 않은가? 놈들이 불굴의 벽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을 구경하면 그만이지.”
왕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왕궁이 있는 도시는 ‘불굴의 벽’이라 불리는 방어막으로 보호받고 있다. 종말급 스펠이 연달아 터질지라도 멀쩡할 정도로 절대적인 방어력을 자랑하는 방어막이었다.
이 방어막이 전개된 이상, 침입자들에게는 방법이 없다. 그들은 조금 전부터 왕궁 안에서 준비되기 시작한 강력한 공격 수단이 완성되기를 손가락 빨며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무스가 말했다.
“만약을 대비하고 싶습니다.”
“음?”
“탈라에게 조건을 걸겠습니다. 성좌의 의식을 받아들이겠다면 출격을 허락하겠다고.”
“성좌의 의식을? 우리의 결전 병기를 고작 저런 놈들에게 쓰겠단 말인가? 그것도 굳이 죽음을 담보로…….”
“어차피 부활할 수 있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부활은 공짜가 아니라고 그대가 말했지.”
“이미 귀중한 전투원 예순여섯 명을 죽인 놈들입니다. 확실하게 막을 방법을 써야 합니다.”
“음…….”
고민하는 왕에게 라무스가 덧붙였다.
“그리고 좋은 기회 아닙니까? 지금까지는 리스크가 커서 시험 운용도 못 해봤으니까요.”
“하긴 그렇군. 승인하겠다.”
왕의 허락을 받은 라무스가 탈라와 연락했다. 탈라는 그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고, 그녀를 대상으로 왕궁에 비장 되어 있던 결전 병기 ‘성좌의 의식’이 발동되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음?”
라무스가 경악했다.
서용우와 이비연을 비추는 관측 영상에서 상상도 못 한 일이 터졌기 때문이다.
* * *
서용우와 이비연은 초월권족과의 초전을 압도적인 승리로 장식했다.
66명의 초월권족 전사들은 두 사람에게 생채기도 내지 못하고 죽었다.
“일단 루가루의 정보 정확성은 확인된 셈이군.”
루가루가 자백한 바로는 구세록의 초월권족들이 외부의 정부를 수집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루가루의 보고였고, 또 하나는 구세록의 계약자들이었다. 계약자들이 구세록의 기능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관측하면 그 정보는 구세록으로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놈들은 우리에 대해서 몰라.”
“정확히는 오빠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야겠지. 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게 됐을 거야.”
“글쎄. 너에 대해서도 ‘지금의’ 너는 모르지 않을까?”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아득히 먼 곳에 있던, 일곱 개의 빛기둥으로.
물리적인 거리는 2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텔레포트를 쓸 수 있는 두 사람에게는 무의미했다.
“크군.”
용우가 혀를 내둘렀다.
허공의 한 지점에서 발생해서 하늘로 뻗어 올라간 빛기둥은 거대했다. 굵기가 군단의 세계, 왕의 섬에서 봤던 일곱 기둥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아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도시가 있었다.
“이거, 무슨 판타지 게임 컨셉 아트 같은데.”
참으로 메마른 감상이었지만, 21세기 지구인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발달한 문명은 온갖 비현실적인 요소들을 그럴싸한 영상으로 구현해왔고, 거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대자연의 경이를 볼 때도 CG로 만든 비주얼 같다는 감상을 느끼게 될 정도니까.
그 도시를 돔 형태로 감싼 빛의 막을 보며 이비연이 혀를 내둘렀다.
“저 방어막 출력이 장난 아냐. 힘으로 저걸 깨는 건… 아무리 봐도 무리야. 종말급 스펠을 연달아 때려 박아도 막을걸.”
이비연이 방어막을 관찰하며 말했다.
“오빠랑 나랑 죽어라고 일점집중으로 깎아내다 보면 침입이 가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용우와 이비연은 시간에 쫓기는 몸이었다. 방어막 안쪽에서 초월권족이 엄청난 마력을 집중시켜가면서 비장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
“방법이 있어? 몽환포영으론 안 될 거 같은데?”
“당연히 확률 조작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 하지만 이거, 복잡하거나 세련된 구조는 아니잖아?”
“응. 아주 단순 무식해. 엄청난 출력으로 엄청나게 튼튼하게 만든 거야.”
절대 부서지지 않는 무쇠벽을 세워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단순하기에 오히려 공략할 틈이 안 보였다.
“이 방어막은 놈들이 믿고 있는 불멸과도 닮아있지.”
구세록의 초월권족들은 훼손되지 않는 절대 가치를 믿고 있다.
“그리고 그건 군단도 마찬가지였고.”
둘은 서로 거울에 비친 것처럼 닮아 있었다.
“이런 건 나한테는 별로 어렵지 않아.”
“뭘 하려고?”
“너도 본 적 있는 거야.”
“음?”
이비연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용우의 스펠이 발동했다.
-필멸자(必滅者)의 세계!
동시에 용우를 중심으로 반경 10미터가 흐릿해졌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열화된 것처럼 느껴지는 세계 속에서 용우가 양손 대검을 휘둘렀다.
“와…….”
이비연이 놀랐다.
절대 깰 수 없다고 판단되었던 불굴의 방어막이 저항 없이 갈라지는 광경은 허무하다 못해 현실감이 없었다.
“그 스펠, 그렇게도 쓸 수 있는 거였어?”
용우가 이 스펠을 이비연에게 보여준 것은 괌에서였다.
스스로 불멸의 존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군주들은 이 스펠로 인해서 필멸의 존재로 격하되었고, 죽었다.
갈라진 방어막 안으로 들어서면서 용우가 말했다.
“불멸은 그 자체로 모순이야.”
“무슨 소리야?”
“어비스에서 그런 경우 봤잖아. 우리가 몬스터를 처치함으로써 새로운 힘이 태어났어.”
전투를 통해서 죽음이 누적되면 누적될수록 다양한 특성과 스펠이 제공되었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절대’는 없었지.”
공간 간섭계 스펠이 무적의 힘처럼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안티 텔레포트 필드와 공허 문지기라는 봉쇄법이 나타났다.
초재생 능력으로 불사신처럼 보였던 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생력 억제라는 저주 능력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불멸도 마찬가지야.”
“불멸성을 만들어내는 힘이 존재한다면, 불멸성을 깨는 힘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게 오빠가 쓴 그 스펠이라는 거야?”
“그래.”
“그럼 어비스에는 불멸이 존재했어?”
이비연이 아는 한 그런 힘은 없었다. 그녀가 타락체가 되어 어비스에서 이탈하고, 모든 것이 끝나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용우는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한 것일까?
“그렇게 믿었던 힘은 존재했지.”
진정한 불멸성이 존재했던 적은 없었다. 용우의 손에 깨진 시점에서 더 이상 불멸이 아니니까.
“말도 안 돼!”
“불굴의 벽을 뚫고 들어오다니!”
도시 곳곳에서 초월권족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팔자 좋은 것들이군. 하긴 천 년 넘게 위험과 거리가 멀었던 놈들이 안정불감증이 아니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만.”
군대를 몰살시킨 적이 도시 밖까지 다가온 상황이다. 그런데 전투원이 아닌 민간인들은 그냥 자기 집에 있거나, 아니면 나와서 방어막 너머까지 다가온 용우와 이비연을 구경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다. 도시 곳곳에서 강력한 의식을 치르는 기척이 느껴진다. 딱히 방어력이 갖춰진 군사시설도 아니고 그냥 아무 곳에서나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이들은 정말로 도시를 감싼 방어막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트로이 목마에 무너지기 전의 트로이 시민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용우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네뷸라를 들어 올렸다.
“전시에 안전불감증을 뽐내다니, 그 대가를 가르쳐줄 수밖에 없군.”
그리고 그것을 느릿느릿하게 내려긋는다.
콰과과과과광!
그 궤적에서 빛의 해일이 쏟아지면서 아름다운 도시를 둘로 갈라버렸다.
용우는 그저 검을 느릿느릿하게 휘두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행위가 10킬로미터에 달하는 도시 전체를 베어버리는 대파괴를 발생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