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황금의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비유가 아니다. 서서히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태양 아래 정말로 금빛을 발하는 광활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용우와 이비연이 구세록의 세계로 진입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놀라지 않았다.
이비연이 중얼거렸다.
“하늘 빛깔은 다르지만… 참 옛날 생각나게 하는 풍경이네.”
어비스에서 비슷한 풍경을 봤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들판의 풀들은 태양이 떠 있는 동안 햇빛을 흡수해서 마력을 비축하는 성질을 지닌 특수한 성질을 가졌다. 어비스에서는 그 성질을 이용해서 몬스터들을 죽이는 부비트랩으로 활용하기 좋았다.
“알기 쉬운 세계군.”
용우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들판 너머, 아득히 먼 곳에 빛의 기둥 일곱 개가 뻗어 있었다.
하늘과 땅을 이으며 뻗어 나간 그 기둥을 이루는 빛은 일곱 성좌가 발하는 빛과 같은 색이다. 분명 저곳이 세계의 중심이리라.
용우가 물었다.
“결계는?”
“주변에는 없어. 저 진영에만 몇 개 구축되어 있네. 어떤 결계인지까지는 모르겠는걸.”
“행동이 느린 건지 아니면 시간이 없었던 것뿐인지 모르겠군.”
두 사람이 구세록 내부 세계로 진입해서 여기 도달하기까지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두 사람을 맞이할 병력을 배치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황금의 들판 너머에 1,000개체가 넘는 병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와, 저거 오랜만이야.”
이비연이 들판 너머에 포진한 적들 사이로 보인 커다란 덩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언뜻 보면 그것은 육중한 갑옷을 입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전신을 두르는 갑옷을 입는다고 해도 키가 5미터가 넘는 사람은 없다. 저것은 그런 형태로 만들어진 무인 병기였다.
“골렘. 저것도 제1세계의 군사 병기였나?”
용우가 중얼거렸다.
어비스에서는 골렘이라 불렸던, 육중한 냉병기를 들고 몬스터와 격투전을 벌였던 존재였다. 원시적인 격투전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허공장을 가진 데다가, 몸과 무기에 마력을 실을 수 있어서 초창기에는 꽤 도움이 되는 존재이기도 했다.
“어비스에 있었던 것들과는 다른 것 같군.”
“그쪽에는 고물들만 투입한 거 아냐?”
“그러게. 우리가 봤던 것들은 저급형이고 저것들은 고급형인가 본데.”
어비스의 골렘들은 개체에 따라 편차가 있긴 했지만, 최대 4등급 몬스터 수준의 마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저기 배치된 골렘들은 훨씬 수준이 높다. 최소한 6등급 몬스터 수준이고 눈에 띄게 덩치가 큰 것들은 8등급 몬스터 수준의 마력이 느껴진다.
이비연이 말했다.
“상아인… 아니, 초월권족은 50명도 안 되네.”
“딱 46명이군. 확실히 수가 적은 모양이야.”
“아니면 몸을 사리는 놈들이 대부분이거나.”
“그럴 가능성도 높지.”
“근데 골렘 진짜 많다. 게다가 인간형만 있는 게 아니잖아?”
“사족보행형은 전차 역할인가? 아, 저건 비행형인가 본데.”
골렘의 타입은 3가지였다. 중갑을 입은 인간형, 사족보행을 하는 짐승형, 날개를 가진 비룡형이었다.
그중에서 인간형과 짐승형은 크기가 여럿이었다. 인간형의 경우 20미터가 넘는 것도 있었고, 사족보행형 중에 제일 큰 것도 몸길이가 그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용우가 말했다.
“몇 개는 샘플로 포획해볼까?”
“정보세계에서 포획해봤자 무의미하지 않아?”
“뭐 그래도 시도는 해보자. 아티팩트급 장비처럼 양쪽을 오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두 사람이 긴장감 없이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게 걷고 있을 때였다.
“멈춰라.”
황금의 들판 너머에 포진한 군대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였다. 하지만 텔레파시가 실려 있었기에 용우와 이비연은 그 의미를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듣지 못했느냐? 멈추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완전히 그 말을 무시하고 계속 걷고 있었다.
“명령이라는데?”
“자기가 뭐라고 명령? 바보 아냐?”
심지어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텔레파시를 실어가면서 비웃어대고 있었다.
그러자 말을 걸어온 초월권족이 분노했다.
“감히 죄인 주제에 존귀한 자의 명령을 무시하느냐! 죽어야 할 곳에서 죽지도 못한 놈들이!”
“나 이 패턴 지겨운데.”
이비연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그냥 쟤네 문화가 저렇구나 해야지. 쟤도 저렇게 저능해지고 싶어서 저런 건 아닐 거 아냐.”
“응? 쟤네 문화가 저런 거면 쟤네 사회에서는 저게 훌륭한 사람의 태도일 수도 있잖아. 저렇게 되고 싶어서 저렇게 된 거 아닐까?”
“아,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더더욱 동정해줘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초월권족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척 봐도 신분이 높아 보이는 자였다. 상앗빛을 띤 얼굴이 드러나는 투구는 황금색이었고, 하얀 바탕 위로 백금과 황금으로 화려한 무늬를 양각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뜨거운 맛을 보여줘라!”
그가 격노해서 외치자 천 개체를 넘는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월권족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골렘들만이 진군하며 공격을 가해왔다.
제일 먼저 비룡형 골렘들이 공격해왔다.
고속으로 하늘을 날면서 지상을 향해 에너지탄을 다발로 떨군다. 수백 발의 에너지탄이 용우와 이비연을 덮쳤다.
콰콰콰콰쾅……!
그야말로 융단폭격이었다. 지구의 현대전과 비교해도 압도적이라고 할 만한 화력이 드넓은 황금 들판을 불태웠다.
그워어어어어!
그리고 인간형 골렘들이 움직였다. 한곳에 뭉쳐 있던 놈들이 넓게 퍼져가면서 포효하자 강력한 마력 파동이 퍼져나갔다.
“안티 텔레포트 필드군. 스펠을 내장하고 있나?”
용우가 혀를 찼다.
인간형 골렘들 하나하나를 안테나 삼아서 퍼져가는 것은 안티 텔레포트 필드였다. 둘의 도주를 막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이비연이 말했다.
“중심축을 여럿 두는 걸로 범위를 넓히고, 필드 디스펠도 차단하고 있어. 성능 좋다. 진짜 어비스 골렘들하고는 비교가 안 되네.”
어비스의 골렘들은 격투전 말고는 재주가 없었다. 그에 비해 이곳의 골렘들은 현대병기 뺨치는 화력을 장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형 골렘들보다 먼저 짐승형 골렘들이 쇄도해왔다.
크허허헝!
포효와 함께 벌려진 아가리에서 에너지탄이 발사되었다.
“역시 저놈들은 전차 역할이군. 재밌는데? 현대전하고 비슷한 짓을 하고 있어.”
비룡형 골렘으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폭격을 가한다.
짐승형 골렘으로 지상을 장악하고 중장거리 공격을 퍼부어대면서 밀고 들어온다.
인간형 골렘으로 공간이동을 봉쇄하고, 원거리 포격을 가한다.
용우와 이비연은 불타는 들판을 질주하고 있었다.
텔레포트를 봉쇄하고 천 개체의 골렘들이 쏟아 붓는 화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도약 스펠로 뛰는 것만으로도 그 폭격지점을 벗어날 수 있었다.
“대(對) 몬스터 전투에서는 꽤 쓸모가 있겠네.”
몬스터에게만 효율적인 게 아니다. 다수의 각성자를 포함한 부대라도 이 압도적인 머릿수와 화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분쇄당할 것이다.
하지만 용우와 이비연은 그런 규격을 초월한 존재들이었다.
-오만의 거울 광역화(廣域化)!
용우의 머리 위로 매끈하게 잘린 얼음판처럼 보이는 막이 반경 수십 미터 넓이로 펼쳐졌다.
비룡형 골렘들이 지상을 향해 투하했던 수십 발의 에너지탄이 모조리 거기에 튕겨서 그들에게 되돌아갔다.
콰콰콰콰쾅……!
반사된 에너지탄에 맞은 비룡형 골렘들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비연이 형상복원 스펠로 창 한 자루를 만들어냈다.
-초열투창!
붉은빛을 휘감은 창이 극초음속으로 짐승형 골렘을 덮쳤다.
콰광……!
일격으로 짐승형 골렘 한 마리가 분쇄되었다.
용우가 중얼거렸다.
“미적지근한데.”
적의 대응이 이상했다. 설마 골렘 부대의 공격만으로도 용우와 이비연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본대는 힘을 좀 빼놓고 나서 나서겠다는 속셈 아니겠어? 딱히 함정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잖아?”
“놈들의 의도대로 놀아나 줄 필요는 없지. 이대로 빠져나가자.”
텔레포트를 봉쇄당했어도 두 사람은 골렘들보다 월등히 빨랐다. 골렘들이 포위망을 형성하기도 전에 들판을 옆으로 가로질러서 공격권 밖으로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파아아아아!
들판 저편에서 빛기둥이 솟구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반대편에서도 같은 빛기둥이 솟구친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이비연의 안색이 변했다.
적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골렘 부대와 치고받는 동안 별동대가 포위를 위한 결계를 설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결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완성되게 놔두면 위험했다. 그렇게 판단한 용우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네뷸라 소환!
그러자 과거 트리니티라 불렀던 양손 대검과 동일한 외형의 양손 대검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이름이 다른 이유는 간단했다. 외형과 구성요소 일부가 같을 뿐,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
-박제된 찰나!
새벽의 해머에 내재된 권능이 발동하면서 용우와 이비연이 초가속에 들어갔다.
지금까지도 두 사람의 이동속도는 거의 음속에 가까웠다. 그런데 거기에 초가속이 더해지자 둘의 속도는 도저히 육안으로 쫓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빠져나왔다.”
초가속에 들어간지 채 1초도 안 지난 찰나, 둘은 17킬로미터 저편까지 와 있었다.
결계가 완성되기도 전에 결계 범위를 돌파해버린 것이다.
중심축으로부터 반경 30킬로미터 범위의 장대한 결계를 준비한 적들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몸을 사리지 말았어야지.”
용우가 그들을 비웃었다.
이것은 적들의 전술이 허술했기 때문에 가능한 탈출이었다. 초월권족들이 용우와 이비연을 상대하여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면서 결계를 구축했다면 꼼짝없이 안에 갇혔을 테니까.
용우와 이비연은 그대로 도망치는 대신 한 지점을 덮쳤다.
“이놈들!”
처음 빛기둥이 솟구친 곳이었다. 그곳에는 결계를 준비한 별동대 다섯 명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전원 피부가 상앗빛을 띤 초월권족이었다. 처음 말을 걸어왔던 지휘관만큼은 아니지만 다들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예장용으로 보이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검과 방패, 그리고 창으로 무장한 그들이 용우와 이비연을 공격해왔다.
꽈아아아앙!
충격이 폭발하면서 반경 100미터의 대지가 뒤집어졌다.
“상당한데?”
용우가 놀랐다.
다섯 명 전원이 9등급 몬스터 수준의 마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상아인 타락체들을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고위층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이 별동대는 초월권족 중에서 강력한 축에 드는 이들만 모여 있는 것일까?
“여기까지 온 것에는 찬사를 보내마.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위업이다.”
별동대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용우와 이비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너희들은 주제를 몰랐다. 우리는 위대한 성좌로부터 세계의 형상을 뜻대로 조각하는 권능을 받은 종족. 관용을 베풀 테니 지금이라도 투항해라.”
“…….”
“너희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 제3세계의 인류로선 도달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도. 하지만 그 힘은 이곳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별동대 지휘관은 용우와 이비연이 전혀 적수가 안 된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용우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시 받는 느낌에 씩 웃었다.
“머릿수만 믿는 건 아닌 것 같고… 루가루를 통해서 우리에 대해 파악했다 이건가?”
잠깐 대치하는 동안 다른 초월권족들이 텔레포트 해왔다.
결계 안쪽에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비룡을 타고 날아오는 중이었고, 다른 곳에서 결계 작업을 하던 별동대들이 모이는 것이다.
별동대 전원이 집결하자 그 수는 20명이었다.
최소한 9등급 몬스터 수준의 마력 보유자들이었고, 그중 세 명은 다른 이들보다 확연히 높은 마력을 뽐내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이들의 마력은 상아인 타락체들의 평균 수준을 월등히 상회하고 있었으니까.
과연 왜 이런 수준 차이가 나는 것일까? 초월권족 중에 수준 미달인 자들만이 타락체가 되었기 때문에?
‘절대 아니지.’
용우와 이비연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루가루라……. 그가 그런 이름을 썼었나.”
지휘관이 애석해하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네 추측은 맞다. 고귀한 희생을 자처한 우리들의 동지가 너희들에 대해서 알려주었지. 너희들에게 승산은 없다.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고통 없는 죽음을 약속하지.”
“하하하…….”
용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비연도 피식거리며 말했다.
“와, 이것들 진짜 황당할 정도로 오만하네? 마력이 좀 커지니까 세상 모든 게 하찮아 보이나 봐.”
그녀의 오른손에 칠흑의 건틀릿이 나타나 장착되었다.
그것을 본 지휘관의 눈에 분노가 깃들었다.
“동지의 장비를 강탈했느냐.”
루가루가 쓰던 아티팩트급 장비였기 때문이다.
이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건틀릿을 낀 그녀의 손에 온통 새카만 빛깔을 띤 서양식 장검 한 자루가 쥐어진다.
이비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주제 파악을 해야 할 쪽이, 어느 쪽인지 가려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