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세계의 귀환자-167화 (167/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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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오랫동안 군단의 일원이었던 이비연조차도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구에는 분명한 실마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구세록이지.”

지구 인류는 2012년 대실종을 시작으로 그 이전의 역사 속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격변을 맞이했다.

그 모든 것은 구세록의 출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실종으로 24만 명이 어비스에 떨어진 것도,

퍼스트 카타스트로피도,

권희수 박사나 차준혁처럼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것도,

그리고 각성자 튜토리얼을 통해서 각성자들이 출현하게 된 것도…….

모두 구세록으로부터 비롯된 사태였다.

인류는 구세록으로 인해 변화했고, 구세록으로 인해 구원받은 셈이다.

그러나 구세록을 좋게 보기에는 너무 수상한 점이 많았다.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문제였어.”

용우는 함께 캄캄한 동굴 속, 지하 300미터 지점을 걸으며 말하고 있었다.

대만 가오슝.

과거 허우룽카이가 구세록과 만난 장소였다.

“이게 구세록이구나.”

이비연이 중얼거렸다.

그들의 앞에는 소재를 알 수 없는, 매끈한 표면의 거대한 검은 기둥이 자리하고 있었다.

구세록이었다.

대만 가오슝의 구세록은 미국 애리조나의 구세록과 똑같았다. 공장에서 찍어낸 양산품처럼 다른 구석을 찾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용우가 말했다.

“전에 두 개 이상의 구세록을 한곳에 모아보려고 했던 적이 있었지.”

파지지지직!

격렬한 스파크가 발생하며 지하 공동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용우가 구세록을 아공간에 수납하려고 하자 강력한 반발력이 발생한 것이다. 구세록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안 됐어.”

“봉인은 시도해봤어?”

“완전히 무력화하더군. 단순히 힘으로 거부하는 게 아니라 봉인에 대한 대응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어.”

“계약자들에게 제공되는 것 이상의 권능이 잠재되어 있다는 거네.”

“아니마만 봐도 알 수 있지.”

허우룽카이는 구세록에 히든 페이지가 존재한다고 증언했다.

팬텀의 데이터에 연구 과정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은 A타입 아니마의 제조법, 그리고 아니마를 먹은 자 중 팔라딘과 셀레스티얼의 그릇이 될 수 있는 적합자를 알아내는 기술도 구세록의 히든 페이지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건 기술이라기보다는 ‘기능’이라고 해야겠지만.”

일일이 정밀 검사를 해보고 알아내는 것도 아니고 원거리에서 탐지하는 것으로 알아내다니, 지금 인류의 기술로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루가루가 말한 타락체의 위치를 탐지하는 방법처럼, 구세록이 사용을 허가한 ‘기능’이었을 거야.”

일곱 명의 계약자 중에 미켈레와 엔조 모로, 허우룽카이 셋에게만 은밀하게 그 기능을 알려주고, 사용하도록 허가한 것만 봐도 구세록의 의지가 얼마나 음흉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구세록이 그 기능의 근원은 아니겠지.”

용우와 이비연, 두 사람의 손에 있는 성좌의 무기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성좌의 무기는 구세록으로부터 힘을 받아오는 게 아니다. 그 자체로 거대한 힘을 갖고 있었다.

“놈들이 가진 것은 ‘권한’ 뿐.”

구세록은 성좌의 무기의 힘을 쓸 수 있게 권한을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구속력은 어디까지나 구세록의 계약자에게만 통용된다.

이비연이 말했다.

“그럼 가자.”

“…….”

“왜?”

“정말 같이 가야겠어?”

용우가 진지하게 물었다.

두 사람이 여기 와 있는 이유는, 루가루에게서 알아낸 진실 때문이다.

구세록의 내부에는 정보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세계는 구세록의 의지라 할 수 있는 자들의 본거지였다. 루가루 또한 그 세계의 주민이었다.

용우와 이비연은 이제부터 그 세계로 침입하여, 그 의지와 결판을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군단의 세계에 침입할 때와는 경우가 달랐다.

그 경우에는 언제나 지휘관 개체나 군주 개체처럼, 그쪽 세계에 본신을 두고 지구의 존재에 빙의한 자들이 있었다.

용우 역시 본체는 지구에 둔 채로 그들의 연결을 따라서 정신체만을 보냈었다.

그러나 구세록의 내부 세계로 침입할 때는 그럴 수가 없다.

루가루만 해도 꿈의 세계를 통해서 몽상가인 타카야마 준이치와 접촉, 완전히 정보세계에서 물질세계로 이동한 존재였다.

따라서 이번에는 용우와 이비연도 육체를 지구에 남기지 않고 완전히 정보세계로 이동하는 방식을 써야 한다.

군단의 세계에 침입했을 때처럼 언제든지 이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진입해서 적과 싸우기 시작하면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비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 없이 오빠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럴 수도 있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래도 너는 지구에 남을 거 아냐.”

“의미 없어.”

이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만약 여기서 오빠를 잃는다면… 오빠가 없는 세상을 내가 오래 참아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그 말에 용우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좋아지진 않았냐?”

“좋아졌지.”

시간이 지날수록 이비연도 조금씩 사람들에게 정을 붙이고 있었다.

서우희도, 리사도, 유현애도 좋았다. 이비연에게 조금이나마 이 세상에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는 리얼리티를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부족해. 오빠를 잃게 되면, 그 아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용우를 잃더라도 이비연에게는 복수심이 남을 것이다. 증오가 남을 것이다.

그 감정들은 군단과 싸울 동기로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을 지켜야 할 동기가 되진 못한다. 이비연은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오빠 없이도 군단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싸움이 끝나고 나면 이 세상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

“오빠, 미련을 버려. 나는 오빠와 함께 싸울 수는 있어도 오빠가 뒤를 맡길 안전장치는 될 수 없어.”

“그렇구나.”

용우가 체념의 한숨을 쉬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다.

용우가 달라진 세상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우희가 있어 준 덕분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족의 존재가 현실의 닻이 되어주었기에, 용우는 조금씩 이 세상에 적응할 수 있었다.

만약 우희마저 죽었다면, 용우는 자신이 이 세상에 적응했을 거라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오빠가 죽을 생각이라면, 차라리 나와 같이 죽는 게 현명한 일이야. 우리 운명은 이미 일심동체나 다름없다는 걸 받아들이라고.”

용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 * *

기록이란 곧 정보다.

인류의 역사는 기록함으로써 성립되어왔다.

시작은 어설픈 그림과 조각, 불확실한 인간의 기억에 의존하는 구전(口傳)이었다. 그리고 문자를 이용하는 경지로 발전한 뒤로는 보다 많은 문자를 오랜 시간 동안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의 연구로 이어졌다.

종이의 발명으로 인한 혁신, 거기에 인쇄술의 발달로 문명이 기록하는 정보량은 정점에 달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소리를 저장할 수 있게 되고, 영상 그 자체를 기록하는 경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제1세계의 역사인가?’

지금은 디지털 데이터로 인해 1세기 전의 모든 기록을 합친 것보다 많은 정보량이 하루하루 기록되고 있는 시대.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용우는 인류가 도달한 기록의 경지 그다음을 보고 있었다.

생생한 가상현실이 이러할까?

정보 그 자체로 이루어진 정보세계는 이제는 사멸한 세계가 존재했던 순간을 고스란히 저장해두고 있었다.

해질녘 들판을 스쳐 가는 산들바람이,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웅장함이,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놈의 말대로군.”

용우는 무수한 정보의 집합체들 사이를 지나며 중얼거렸다.

루가루는 지옥 같은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많은 정보를 말해주었다. 적어도 그 자신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정보를.

하지만 루가루 역시 하수인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용우는 그가 말한 정보를 100퍼센트 신뢰하지는 않았다.

문득 이비연이 중얼거렸다.

“이건 좀 부럽네.”

“뭐가?”

“무한히 과거를 곱씹을 수 있잖아.”

추억을 되새기는 것과는 다르다. 정말로 그 순간을 생생하게 되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죽은 가족의 사진조차 갖지 못한 이비연 입장에선 정말로 부러운 일이었다.

“그것도 이제 끝이야.”

용우가 차갑게 단언했다.

두 사람은 무수한 정보 집합체들의 군집 너머로 향했다.

문득 이비연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들켰어.”

“역시.”

루가루는 구세록의 세계로는 절대로 몰래 진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구세록의 세계의 문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무수한 정보 집합체들의 군집 영역을 지나는 순간 그 사실이 알려진다.

이 세계의 주인들, 구세록의 의지라 할 수 있는 자들…….

“이게 초월권족의 기척인가? 타락체하고 다르지 않군.”

용우가 중얼거렸다.

구세록의 의지는, 제1세계를 지배하던 초월권족이다.

제2세계와 달리 그들은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기지도 못했다.

이기지도, 지지도 않은 채로 뒷일을 다른 세계로 떠넘기고 지금까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비연이 물었다.

“어쩔까?”

“일단은 거만한 놈들의 낯짝을 봐야겠지.”

용우와 이비연은 긴 문턱을 지나서 구세록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 * *

라지알은 눈을 떴다.

“벽이 옅어졌다……?”

그는 당혹감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지구 곳곳에 거점을 만들고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고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일곱 기둥으로부터 비롯되는 힘이 급격히 약해지고 있다. 군단의 진입에 제약을 거는 장벽의 밀도가 크게 옅어진 것이 감지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비슷한 일들이 꾸준히 일어나기는 했다. 서용우가 구세록의 계약자들을 죽일 때마다 벌어진 현상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급격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다.>

광휘의 데바나가 말했다.

군단은 남은 자원을 대량으로 투입하는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말라죽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에 승부를 걸기로 한 것이다

지금까지 당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위험도를 최소화하는 안전장치도 투입했기에 다들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대지의 트라드가 말했다.

<아직 준비가 완전하지 않다. 이게 놈들의 함정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무슨 소리! 어차피 이번 공격은 자폭 공격이나 다름없다!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당장 쳐야 한다!>

뇌전의 에우라스가 호전적으로 외쳤다.

데바나가 물었다.

<라지알 장군, 지금 당장 공격을 개시하더라도 그 의식은 쓸 수 있나?>

그들이 이번 대공세를 결심한 이유는 라지알이 제공하기로 한 안전장치를 믿기 때문이었다.

제1세계의 초월권족 출신, 그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신분이었던 라지알은 놀라운 비술들을 다수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가 공개한 비술은 군주들도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가능하다.”

<역시 지금 공격해야 한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놈들이 약점을 드러낸 게 분명해. 회복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데바나와 에우라스가 찬성했고, 트라드는 반대했다.

결정권을 쥔 라지알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잘 풀리고 있었는데 시기까지 앞당겨지다니… 운명이 내 등을 떠밀어주는 것 같군.’

그는 절로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간다.”

그리고 군단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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