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세계의 귀환자-164화 (16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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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부터 한국 게이트 재해 연구소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권희수 박사의 존재만으로도 중요도가 높았던 곳이다. 그런데 미국의 보물로 불리는 아서 브래드 박사와 그의 연구팀이 와서 합동연구를 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용우는 권희수 박사의 요청을 받고 그곳에 와 있었다.

“웬일로 피곤해 보이네요?”

권희수 박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의자에 기대고 있던 용우가 정말로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용우를 알게 된 후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일이 많아서요. 오늘도 별로 시간 없습니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 해요.”

“괌에서 그만한 성과를 거뒀잖아요. 그런데도 전혀 여유가 없어 보이네요.”

용우는 권희수 박사를 단순한 협력자가 아닌 동료로 인정했다. 그렇기에 괌 전투에 대해서도 진실을 알려주었다.

“매번 말하는 거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용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까지 올린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구세록에 예정된 제약이 풀리면 풀수록 군단의 위험성은 폭발적으로 높아진다. 그들의 위험성이 더 커지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내야 했다.

“하긴 그러니까 당신이 그렇게 서두르는 거겠죠.”

그렇게 말하는 권희수는 피곤한 정도를 넘어서 폐인처럼 보였다. 용우가 요구하는 성과를 내기 위해 연구에 몰두한 결과였다.

‘그런데도 눈빛은 갈수록 살아나는 것 같군.’

용우는 자신을 보는 권희수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점점 초췌해져 가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고행을 자처하는 수행자들처럼.

‘역시 당신도…….’

용우는 그런 권희수에게서 익숙한 감정의 냄새를 맡았다.

예전에 나눴던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용우는 여전히 권희수의 과거를 모른다.

하지만 용우는 권희수를 재촉하지 않았다. 언제가 되든 좋다. 만약 영원히 지켜지지 않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권희수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구세록과 한바탕 했습니다.”

“음? 그게 한바탕 할 수 있는 대상이었나요?”

권희수는 용우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용우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렇더군요. 구세록에는 명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원칙에 의한 시스템이 아닌, 아주 인간적인 의지가…….”

그리고 그 의지는 대단히 음습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용우는 구세록의 사도를 자처하는 존재, 루가루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를 고문해서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있던 진실을 알아냈다. 마침내 용우를 괴롭혀오던 정보 공백이 메꿔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알아낸 시점에서, 팀 섀도우리스에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용우도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자세한 이야기는 일이 좀 정리되고 나면 해드리죠. 오늘 부른 용건이나 말해주십시오.”

“열쇠를 하나 더 샘플로 제공해주세요.”

“열쇠를?”

용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군단의 세계에서 훔쳐온 열쇠는 일곱 개였다.

그중 하나, 새벽의 힘이 깃든 열쇠는 권희수에게 연구용 샘플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아티팩트 새벽의 해머도 같이 넘겨주었는데, 이것은 새벽의 군주 두라크를 죽일 때 파괴되었기에 수리할 필요가 있어서이기도 했다. 망가진 아티팩트를 고칠 수 있는 것은 권희수뿐이었으니까.

“안 되나요?”

“솔직히 별로 쓸모 있는 물건은 아니니까 상관없습니다. 이유나 말해주시죠.”

용우는 군단으로부터 열쇠를 훔쳐왔을 때, 이걸로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금방 무너졌다.

군주들이 지구로 강림하기 위한 매개체가 아티팩트이듯, 열쇠는 구세록의 계약자가 군단의 세계에 강림하기 위한 매개체가 된다.

그뿐이었다. 융합을 시도해봤지만 실패했다. 아티팩트와 마찬가지로 열쇠도 코어가 핵심인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용우와 이비연은 열쇠 없이도 군단의 세계로 넘어가서 성좌의 무기를 자유롭게 쓸 수 있다. 그리고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열쇠를 써서 넘어가봤자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제약된다.

지금의 용우 입장에서 보면 열쇠는 쓸모가 없었다.

권희수가 말했다.

“실은 아주 재미있는 성과가 나오고 있거든요. 결과가 나오면 말해줄게요.”

“알겠습니다. 어떤 열쇠가 좋습니까?”

“굉음의 열쇠를 주세요.”

아티팩트 굉음의 도끼 또한 괌 전투 때 파괴되어서 권희수에게 맡긴 상태였다.

용우가 굉음의 열쇠를 넘겨주자 그녀가 신나서 미소를 지었다.

“우후후. 기대하세요. 제로 당신도 깜짝 놀랄 거예요.”

“기대하죠.”

용우는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했다. 용우는 누구보다 잘 싸울 수는 있어도 권희수의 업적을 흉내 낼 수는 없으니까.

* * *

일본인 소년, 타카야마 준이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헉, 허억…….”

뭔가 지독한 악몽을 꾼 것 같다. 하지만 그 악몽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온몸을 적신 식은땀에 불쾌감이 몰려올 뿐이다.

“여, 여긴 어디지?”

그가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왠지 주변이 온통 하얀 병실의 풍경도, 병원 특유의 냄새도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타카야마 준이치는 양팔을 끌어안고 불안에 떨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해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뿐만 아니라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긴 병원이다.”

불안해하는 타카야마 준이치에게 누군가 말했다.

병실 한구석에 앉아서 TV를 보던,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다. 머리는 부스스하고 면도를 안 했는지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라 있었다.

“누, 누구세요?”

“…….”

남자는 그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소년이 불안한 듯 몸을 움츠렸다. 그 반응을 본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난 사다모토 아키라다.”

그가 이름을 밝혔지만, 소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 사람은 왜 갑자기 자신에게 이름을 밝히는 것일까?

“병실을 잘못 찾아와서 기다리는 중이었지.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사다모토 아키라는 어색하게 둘러대고는 병실을 나섰다.

그가 병원 건물에서 나오자 그 옆에 불쑥 한 사람이 나타났다. 사다모토 아키라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었군.”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돌연 나타난 것은 서용우였다.

사다모토 아키라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기억상실이라니…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생각 못 했는데.”

“그 점은 동감이야.”

용우와 동료들은 구세록의 사도라 자처하는 존재, 루가루를 처치하고 타카야마 준이치를 구출했다.

그 과정에서 용우는 루가루가 사다모토 아키라에게 거짓말을 했음을 알아냈다.

루가루와 타카야마 준이치와의 계약은 사기 계약이었다. 그 계약을 지키지 않아도 루가루에게는 아무런 페널티가 없었다.

루가루가 필요로 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타카야마 준이치가 자신에게 몸을 내주는 일에 동의하는 것. 타카야마 준이치가 동의했기에 그는 아무런 반발 없이 그 몸을 쓸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시간을 버는 것. 몸을 차지한 후에 타카야마 준이치의 자아를 부작용 없이 지워버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타카야마 준이치는 악마 같은 루가루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가련한 존재였다.

사다모토 아키라가 물었다.

“기억을 되찾을 확률은 얼마나 되지?”

타카야마 준이치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기억상실은 흔히 말하는 경우와는 좀 달랐다.

루가루는 현실과 꿈의 세계를 오갈 수 있는 특수한 권능의 소유자였다. 그는 그 권능을 이용, 타카야마 준이치의 기억을 야금야금 갉아먹듯이 지워버렸다.

기억을 지움으로써 자아를 지우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자연스럽게 기억을 되찾을 확률은 없다고 봐도 될 거야.”

용우와 이비연은 루가루를 타카야마 준이치의 몸에서 분리한 뒤 몇 가지 실험과 점검 작업을 거쳐서 그런 결론을 내렸다.

“…….”

사다모토 아키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용우가 물었다.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나?”

사다모토 아키라는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구세록의 계약자로서의 역할이 끝난 지금,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진 것, 삶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다만 그는 그 죽음이 유용하게 쓰이길 바랐다. 타카야마 준이치가 복수심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저 아이가 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나?”

“힘들어.”

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시도해볼 만한 방법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성공할 가능성은 낮았고, 후유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설령 할 수 있다고 한들… 기억을 되찾아주는 게 저 애를 위한 길일까?’

타카야마 준이치의 정신은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경험만 해도 견디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팬텀의 실험체가 되어 고통 받은 시간이 더해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구출된 후로도 자살을 두 번이나 기도했고, 루가루의 유혹에 선뜻 넘어가 버린 것만 봐도 그 정신의 피폐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타카야마 준이치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과연 정말로 그를 위한 일인가?

용우는 그럴 수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얼마든지 기억을 되찾아줄 수 있었다면 이 문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을 테니까.

사다모토 아키라가 허탈해하며 물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글쎄. 난 별로 네 인생 상담사가 되고 싶진 않군.”

“그렇군. 알겠다.”

용우의 쌀쌀맞은 태도를 사다모토 아키라는 쉽게 받아들였다. 용우는 그에게 따뜻하게 대해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타카야마 준이치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앞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원은 해줄 거니까.”

어차피 타카야마 준이치를 팬텀에게서 구출했을 때부터 그럴 예정이었다. 타카야마 준이치는 크로노스 그룹의 후원을 받으며 사회에 적응해갈 것이다.

“그럼.”

용우는 그 말을 끝으로 텔레포트해서 사라졌다.

사다모토 아키라는 오랫동안 구세록의 계약자로서 세상을 지켜왔다. 동시에 일본에서 무수한 사람을 살해한 살인마이기도 했다.

하지만 용우는 굳이 그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그것은 사다모토 아키라가 구세록의 계약자로서 해온 일을 존중해서가 아니다. 그저 용우 자신이 도덕적 올바름을 이유로 누군가를 심판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용우가 죽인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존재들이라서 용우에게 살해당한 게 아니다. 용우를 적대했기에 그런 결말을 맞이한 것뿐이다.

사다모토 아키라는 루가루를 잡을 수 있도록 순순히 협력해준 인물이다. 그렇기에 용우는 그가 어떻게 되건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궁금하긴 하군.’

하지만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궁금했다.

구세록의 계약자가 아닌 사다모토 아키라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어느 정도의 마력과 초인적인 육체능력을 갖긴 했지만, 그뿐이다. 예전처럼 일본의 권력자들을 이용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다모토 아키라가 스스로 저지른 일들의 대가를 치러야 함을 의미한다.

만약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극소수의 권력자들이 그가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과연 끝까지 그럴 수 있을까?

* * *

용우가 사다모토 아키라의 선택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의 일이었다.

[자살했습니다.]

사다모토 아키라는 산으로 들어가서 자살했다.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쏜 뒤, 그대로 까마득한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방식으로 말이다.

용우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것은 애비게일 카르타였다.

그녀는 일본에 인원을 풀어서 사다모토 아키라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같은 1세대 구세록의 계약자이기에 그녀도 사다모토 아키라의 선택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군.”

[어떻게 할까요?]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까에 대해서라면… 당신 마음대로 해. 어떻게 했는지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어.”

예상한 결말이었다. 사다모토 아키라가 계속 살아가길 선택했다면 오히려 놀랐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애비게일 카르타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들렸다.

용우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제 1세대 구세록의 각성자 중 생존자는 그녀 한 사람뿐이다. 나머지는 용우와 적대하고 죽거나, 아니면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했다.

마지막 동지를 잃은 애비게일 카르타는 어떤 심정일까?

그녀 역시 삶에 대한 집착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녀는 스스로 부여한 의무에 따라 살아가고 있을 뿐, 살고 싶다는 욕망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이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까?

과연 계속해서 살아가는 길을 택할까? 아니면…….

“…….”

하지만 용우는 결국 애비게일 카르타에게 그 의문을 묻지 않았다.

용우의 고민을 눈치채지 못한 애비게일 카르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계시는 건은…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그녀가 언급한 것은 루가루에게 진실을 알아낸 대가로 팀 섀도우리스가 안게 된 문제였다.

“어차피 그 건에 대한 결론을 내는 건 당신이 아니라 브리짓과 휴고지. 걱정 마. 이미 정한 기한을 줄일 생각은 없으니까.”

애비게일 카르타와의 통화를 끝낸 용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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