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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늑대인간의 모습을 한 루가루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살폈다.
‘완전히 당했다.’
루가루는 자신이 적을 너무 얕봤음을 깨달았다.
차준혁은 여기 오기 전부터 루가루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동료들에게 루가루의 제안을 말하고, 루가루를 함정에 빠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그 과정을 짐작했는데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루가루가 바보라서 도망치는 대신 차준혁을 끝장내겠다고 한 게 아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이곳의 공간좌표는 구세록의 히든 채널에 공유하고 곧바로 텔레포트 시켰다. 혹시라도 타인에게 누설할 수 없도록.
그리고 이곳에 온 순간부터는 결계로 인해서 외부로 공간이동해서 빠져나가는 것도, 텔레파시로 연락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떻게 팀 섀도우리스 전원이 여기에 온 것일까?
그때 차준혁이 말했다.
<네놈은 너무 쉽게 바닥을 보였지. 상품이 결함투성이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들면서 사주길 바란다니 너무 양심이 없지 않나?>
이야기 속에서 인간이 소원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이유는, 악마가 그 소원을 들어줄 능력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가루는 어떤가?
그는 서용우가 예상 밖의 행동을 하자 곧바로 한계를 드러냈다. 서용우가 할 수 있는 일이 루가루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놈을 믿고 운명을 내던지는 도박에 나설 수 있겠는가?
루가루가 으르렁거렸다.
“그런 이유로 구원의 기회를 걷어차 버린 거냐?”
<물론 아니다.>
“뭐?”
<어디까지나 잠깐 흔들린 마음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어줬을 뿐이지. 설령 네가 말한 것들이 진실이라 해도 나는 네 손을 잡지 않을 거다.>
“어째서냐? 은인을 구하고 싶지 않은 건가?”
<죽은 자가 뭘 바란다고 생각하나?>
질문을 던진 차준혁은, 루가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산 자는 그 답을 알 수가 없지. 그저 멋대로 추측하고 상상할 뿐.>
그리고 그렇게 얻은 답은 진실이 아니라 산 자의 욕망이 빚어낸 허상일 뿐이다.
<내 망상으로 그분의 유지를 왜곡시키고 싶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놈은 지금 스스로 고백하지 않았나?>
“뭘 말이지?”
<선생님이 고통받은 원흉이 바로 네놈들이라는 걸!>
차준혁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쾅!
광휘의 검이 루가루를 후려갈겼다.
루가루는 오른손을 감싼 흑색의 건틀릿으로 공격을 받아내면서 뒤로 몸을 날렸다. 차준혁이 지체 없이 추격해 들어왔지만 그 순간 새벽의 해머에 내재된 권능이 발동한다.
-아지랑이 들판!
순간 차준혁이 돌입한 공간이 죽 늘어나면서 루가루와의 거리가 벌려졌다.
루가루는 그대로 몸을 날려서 유현애가 있는 방향을 뚫으려고 했다.
꽈광!
그러나 유현애에게 도달하기 전, 그 앞에 이비연이 나타났다.
단발머리를 휘날리는 그녀가 루가루를 쳐서 땅에 처박는다.
“커억……!”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가루는 스스로의 격투 능력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비연과 충돌하는 순간, 그녀의 움직임에 현혹당해서 정타를 허용해 버렸다.
콰직!
이비연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루가루가 태세를 바로잡기 전에 추가타를 넣는다.
파지지지직!
그리고 허공장이 충돌하며 격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공간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이비연이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웃는다.
“버러지가, 감히……!”
루가루는 연타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반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발하면서 마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헛소리하는 레퍼토리가 군단 놈들하고 똑같네? 혹시 한패인 거 아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루가루가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이비연의 마력도 폭등하는 게 아닌가?
그녀의 손에 들린 칠흑의 장검, 굉음의 도끼가 불러일으키는 효과였다.
“숨기고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일까 해서 기회를 준 건데… 별거 아니네?”
이비연은 그 마력만으로도 루가루를 찍어 누를 수 있었다.
“이대로 짜부라뜨려 줄까? 살고 싶으면 좀 더 힘을 내봐.”
잔혹한 조롱의 말을 던진 이비연은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허공장 공명파!
허공장 잠식이 가속화되면서 그 반동이 루가루를 덮치고 있었다.
“크, 어억……!”
루가루가 신음했다.
루가루는 어떻게든 찍어 눌러지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비연은 허공장을 잠식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특수한 기술을 사용해서 그에게 반동을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비연은 어비스의 각성자 중에서도 최고의 테크니컬 파이터이며 최강의 결계술사로 불리던 인물이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이 상황은 격투기에서 그라운드 기술의 달인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포지션을 잡고 상대를 농락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이이이익……!”
루가루는 이대로라면 정말로 압사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어쩔 수 없군.’
그에게는 아직 히든카드가 남아 있었다.
허공에서 갑옷 파편들이 나타나 그를 감싸기 시작한다. 이제야 성좌의 힘을 몸으로 받아들여서 변신하는 것이다.
“고작 이거였어?”
그것을 본 이비연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손을 쓰려는 순간이었다.
“비연아, 놔둬 봐.”
구경만 하던 용우가 한마디 했다.
그 말에 이비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예 몸을 뒤로 뺐다.
<오만방자한 것들! 내가 다 잡은 고기로 보이나 보구나.>
백은과 황금의 화려한 갑옷이 루가루를 감쌌다. 그의 마력이 조금 전과 비교해도 한층 더 상승한다.
‘부족해.’
루가루는 이 정도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용우나 이비연 둘 중 하나와 일대일로 싸운다면 승산이 있지만, 저들 모두와 대적하는 건 무리였다.
<성좌의 무기, 새벽의 해머의 개체별 제한 해제를 요청한다.>
루가루는 구세록의 히든 채널로 텔레파시를 날렸다.
<승인한다.>
잠시 후, 짤막한 대답이 날아왔다.
<하하하하하!>
루가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영롱한 빛을 발하던 새벽의 해머가 빛으로 이루어진 실루엣으로 화하면서, 한층 더 강대한 마력을 쏟아냈다.
성좌의 힘으로 변신한 시점에서, 그는 굉음의 도끼와 소우바 코어를 쓰는 이비연과 대등한 마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더더욱 마력이 상승하는 게 아닌가?
<이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진짜 그냥 두고 봐도 되는 거야?>
유현애와 휴고가 위기감을 느끼며 물었다. 루가루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우와 이비연은 태연했다.
“오빠 예상이 맞았는데?”
“뭐가?”
“성좌의 무기 말이야. 개체별로 공급되는 힘에 제한이 걸려 있었고, 그걸 풀 수 있는 모양이야.”
“아, 역시 그랬나?”
용우는 일찌감치 성좌의 무기에 잠재된 힘이 어마어마함에도 한 사람이 끌어낼 수 있는 힘이 제한적임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걸 알아차린 것은 용우만이 아니다. 허우룽카이도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팔라딘과 셀레스티얼을 이용하지 않았던가?
루가루가 흠칫 놀랐다.
<어떻게 그걸 알았지?>
“글쎄?”
이비연이 그를 놀리듯이 웃었다.
용우에게 악의를 통찰하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이비연에게도 특수한 능력이 있다. 그건 바로 텔레파시를 도청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 어떤 채널로 이루어지건 텔레파시라는 수단으로 이루어지면 절대로 그녀의 능력을 피하지 못한다.
과거 타이베이 게이트 브레이크 당시, 용우가 브리짓과의 텔레파시가 도청당해도 놀라지 않았던 것은 그래서였다.
‘역시 이놈들도 딱히 엄청나게 대단한 권능을 쥐고 있진 않군.’
군단도, 루가루도 보여주는 수법은 딱히 용우와 이비연이 머리를 맞대고 예상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충 볼 건 다 본 것 같군. 그럼 일단 주제 파악을 하게 만들어줄까?”
<주제 파악을 하게 되는 건 네놈들이다.>
루가루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새벽의 해머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낸 지금 루가루의 마력은 9등급 몬스터를 훨씬 능가한다. 굉음의 도끼를 쓰는 이비연도 저 아래로 내려다보는 수준이었다.
“도망칠 생각은 버렸나 보군, 잘 됐어.”
트리니티를 쥔 용우의 마력이 급등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것. 그건 분명 놀라운 기적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계약을 거부한 너는 제대로 쓸 수가 없지.>
여전히 루가루의 마력이 용우의 마력보다 훨씬 위였다.
루가루의 본신 마력이 워낙 높은 데다가, 제한이 해제된 새벽의 해머가 루가루에게 공급하는 힘도 그만큼 컸던 것이다.
“확실히 그 점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지.”
용우는 조금도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이 지금 눈앞에 있잖아? 아주 잘 됐어.”
<착각을 교정해주마.>
루가루가 새벽의 해머를 던졌다. 그러자 새벽의 해머가 일순간에 극초음속으로 가속하며 용우를 노린다.
꽈아아아아앙!
용우가 블링크로 피했지만 루가루가 곧바로 추격해왔다. 그 손에는 여전히 새벽의 해머가 들려 있었다.
‘형상복원이군. 그리고…….’
용우는 놀라지 않았다. 형상복원으로 모조품을 만드는 일이 자신에게만 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당장 이비연도 할 수 있었고, 어비스에서도 할 수 있는 놈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는 있었다.
콰광!
용우와 루가루가 격돌했다.
힘으로는 루가루의 압승이다. 부딪치는 순간 용우가 튕겨 나간다.
게다가 루가루는 힘에만 의존하는 타입이 아니다. 넘치는 힘을 활용할 기술이 있었다.
연속적으로 공간을 뛰어넘는 둘의 위치가 어지럽게 바뀌면서 충격파가 연달아 터졌다.
꽈광! 꽈과과과광!
공간이 깨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와, 제법 하네?”
감탄성을 흘리는 이비연은 전혀 용우를 도울 기미가 없었다.
그 사실이 루가루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뭐지?’
뭔가 이상했다.
마력 면에서는 그가 용우를 압도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붙어보니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용우의 기술이 너무 뛰어나서?
‘아니, 그게 아니야.’
힘으로 부딪치는 국면이 많은데도 용우가 밀리질 않는다.
‘뭐지? 격돌할 때만 놈의 마력이 오르고 있어!’
소름이 끼쳤다. 용우의 최대 출력이라고 판단했던 수준이 최대 출력이 아니었다. 격돌 시에만 루가루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마력을 뽐내고 있었다.
“알아차렸나?”
용우가 씩 웃었다.
“테스트는 이쯤 해야겠군.”
<이게 무슨…….>
루가루는 한 가지 변화를 알아차렸다. 용우와 싸우는 동안 이비연과 차준혁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들 모두는 결계 밖,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나가 있었다.
<설마?>
“눈치채는 게 늦어. 별로 눈썰미가 좋은 녀석은 아니었군.”
결계 밖으로 나간 이들의 마력이 용우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미나, 유현애, 리사 세 사람의 마력이다. 용우가 지닌 성좌의 무기에서 힘을 나눠 받는 세 사람이, 서로의 힘을 하나로 합쳐서 증폭시킨 뒤 용우에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제한을 우회했다고?>
“왜 놀라지? 허우룽카이도 했던 짓인데.”
이것은 허우룽카이가 팔라딘과 셀레스티얼을 이용해서 보여줬던 연구성과를 응용한 결과물이었다.
차이점이라면 용우에게 힘을 보태주는 세 사람은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마력을 제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허우룽카이에게 희생된 실험체들처럼 과부하로 죽을 일이 없었다.
“네 밑천은 다 본 것 같군. 이만 끝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