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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모토 아키라는 오래전부터 망가져 있었다.
살기 위해서 싸운 적은 없다. 살고 싶어서 살아오지도 않았다.
사명감은 없다. 즐거움도 없다.
게이트 재해로부터 일본을 지킨 것도, 문화를 탄압하려는 모든 움직임에 잔인한 유혈로 보복한 것도, 은퇴한 만화가로서 인터넷 그림 방송을 해온 것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이래야 해.
저건 저래야 해.
신념도, 만족감도 없이 기계적인 원칙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다모토 아키라라는 인간은 오래전에 죽었고, 지금의 그는 그 잔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다모토 아키라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나.”
텔레파시를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엿본다.
그 과정은 길지 않았다. 애당초 많은 시간이 들 이유가 없는 행위였으니까.
물론 서로의 내면을 샅샅이 훑어본다면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사다모토 아키라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그저 용우의 마음에 어떤 특정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제로, 너는… 속죄하고 싶은가?”
원하던 답을 구한 사다모토 아키라가 물었다.
용우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아니.”
“역시 그런가.”
사다모토 아키라는 공허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용우가 말했다.
“그걸 알고 싶었던 거냐?”
사다모토 아키라가 용우의 마음을 엿보았을 때, 용우 역시 사다모토 아키라의 마음을 엿보았다.
지금의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한 가지.
죄책감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그날, 그의 영혼을 산산조각 낸 그 감정이 그를 지금까지 움직여왔다.
사다모토 아키라가 말했다.
“이미 끝나버린 일들은 어쩔 수 없지. 잘 알고 있는데도… 뭔가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퍼스트 카타스트로피의 그날, 아내와 딸이 죽은 이후로 그는 삶을 실감할 수 없게 되었다.
‘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구세록을 발견했기 때문에.
구세록과 내용도 기억 못하는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대실종과 퍼스트 카타스트로피는 그 대가였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아내와 딸 역시 자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날의 사다모토 아키라는 지구상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권능을 가진 존재였다. 그럼에도 아내와 딸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사다모토 아키라를 사로잡는 저주가 되었다.
“다니엘 윤과 애비게일 카르타는… 어딘가 나와 비슷한 냄새가 났지.”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오랫동안 정보공간을 통해서 교류해왔다. 텔레파시를 통해 대화하다 보면 단순히 목소리로 대화하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상대의 감정을 읽게 되고는 한다. 서로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서로의 본질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
용우는 사다모토 아키라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니엘 윤을 죽였던 그때, 용우는 다니엘 윤이 품고 있는 진심을 보았다. 대실종 이후로 한순간도 내려놓지 못했던 죄책감을.
애비게일 카르타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하지만 세 명이 품은 죄책감은 각각 다른 모양이었다.
사다모토 아키라의 죄책감은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그는 아내와 딸을 자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다니엘 윤의 죄책감은 사명감이었다. 그는 자신이 빈 소원이 인류를 지옥으로 몰아넣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 있었다.
애비게일 카르타의 죄책감은 선택의 딜레마였다. 그녀는 늘 구할 존재를 선별해왔다. 자신의 선택으로 누군가는 죄를 저지르고도 구원받지만, 반대로 누군가는 무고함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물론 우리들… 구세록의 계약자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지.”
사다모토 아키라는 서용우에게 죽은 자들을 떠올렸다.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적도 없다. 하지만 그들 넷은 스스로의 속내를 과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자들이었다.
미켈레는 신의 사도로 선택받았다는 광신도의 믿음으로 움직였다.
엔조 모로는 다른 모든 인간은 자신의 보호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하찮은 존재이며, 자신은 위대한 존재라는 우월감으로 움직였다.
허우룽카이는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 자리 잡고 있던 증오와, 증오의 대상을 파괴하고 정복하겠다는 권력욕으로 움직였다.
프리앙카는 그 힘으로 세상을 뜻대로 바꾸고, 인류를 구원하는 위대한 존재가 되겠다는 야심으로 움직였다…….
“사실 나는 왜 너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사다모토 아키라가 용우를 만난 것은 반은 계획이었고 반은 충동이었다.
용우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품었는지 알고 싶다. 용우가 세상을 지켜줄 인물인지 알고 싶다.
하지만 왜 그런 의문에 집착하는지는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퍼스트 카타스트로피 이후 14년간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정한 원칙대로만 움직여왔다. 그리고 그 원칙은 스스로의 욕망이 아니라 죽은 자들, 어쩌면 자신이 죽인 것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바라던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다모토 아키라가 그들이 바란다고 생각한 것이다. 죽은 자가 무엇을 바라는지 산 자는 알 수 없다. 그저 멋대로 짐작할 뿐.
딸은 그림을 그리는 아버지를 좋아했다. 아버지가 그린 그림이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렇기에 사다모토 아키라는 은퇴한 만화가 신분으로 그림 방송을 계속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아내는 한때 만화가였다. 그와 같은 작가 사무실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다가 한발 앞서 데뷔했지만, 데뷔작이 당시 민감한 사회적 이슈와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강제로 연재를 중단 당했다. 권력의 폭압으로 꿈이 꺾인 것은 물론이고, 작품을 읽어본 적도 없을 권력의 추종자들에게 파렴치하다면서 음습한 괴롭힘까지 당했다. 그리고 만화가의 꿈을 접고 말았다.
그렇기에 사다모토 아키라는 모든 문화에 대한 탄압에 유혈로 보복하며 일본열도를 공포로 물들였다.
게이트 재해로부터 일본을 지킨 것은 결국 그 일들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죄책감의 원동력이 된, 너무나 개인적인 동기를 표출하기 위해서는 일본 사회가 지속되어야 했으니까.
사다모토 아키라는 그렇게 믿어왔다. 그랬는데…….
“그것만은 아니었군. 하하하.”
그는 스스로가 우습다는 듯 웃었다.
서용우의 내면을 보니 지금까지 몰랐던 스스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세상에 미안해하고 있었나.”
자신의 죄책감은 오로지 죽은 아내와 딸에게만 향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처가 너무 강렬해서 깨닫지 못했을 뿐, 그 역시 자신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품고 있었다.
아내와 딸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던 세상을 지켜주지 못한 것도 미안했다.
“제로, 나도 속죄를 원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용서받고 싶어서 싸워온 것이 아니다.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죄가 사라지길 바랐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죄책감이었다. 아무런 보상 없이 이 세상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속죄를 바라지 않는 이유는 서로 다르군. 너는 나와는 달라.”
“…….”
용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은 서로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았다.
사다모토 아키라는 용우의 마음속에도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후회했지. 끝없이 후회하는 삶이었다.”
사다모토 아키라는 용우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용우의 마음속에 후회는 없다. 어비스에서 해온 일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철저하게.
속죄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다. 누구도 그를 용서할 수 없다. 용서받아야 할 존재도 없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저지른 행위들은 상처가 되었다.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으로 자리 잡았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용우가 변해가는 것은.
지금의 용우는 단순히 복수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용우 자신도 그 변화를 실감하고 있었다.
“후회만 하다가 망가진 나보다는… 앞날을 생각할 수 있는 네가 낫겠지.”
사다모토 아키라는 그렇게 말하며 용우 앞에서 한 가지 조치를 취했다.
용우는 이 순간 자신이 새벽의 해머의 2순위 계승자가 되었음을 알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
사다모토 아키라는 후련한 표정으로 용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용우는 그의 부탁을 듣기도 전에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 전에 선수 쳐서 물었다.
“프리앙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왜 그렇게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지?”
“그녀도 네게 죽여 달라고 했나 보군. 아마 이유는 비슷할 거야. 이젠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살아있는 게 더 힘들어. 그리고 내가 죽어야 일이 진행되기도 할 것이고.”
“죽어야 할 이유?”
“제1순위 계승 후보는 스스로를 루가루라고 칭하는 놈이다. 너희들과는 이미 접촉했다고 들었는데.”
“역시 놈은 너와 같이 있었군.”
이미 예상하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용우는 놀라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사다모토 아키라는 용우와 동료들과의 접촉을 철저하게 피해왔다. 구세록의 정보공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루가루는 일본인 소년, 타카야마 준이치의 몸을 차지한 존재였다. 둘 사이에 접점이 없었다면 그 편이 더 의외였을 것이다.
용우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대충 이야기해주자 사다모토 아키라가 말했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루가루와 그 몸의 주인인 타카야마 준이치는 계약을 맺었다.”
“계약?”
“루가루는 타카야마 준이치의 몸을 무작정 강탈한 게 아니야. 타카야마 준이치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그 몸을 받기로 했지.”
그리고 타카야마 준이치가 바란 소원은, 루가루가 아버지의 원수인 사다모토 아키라를 죽여서 복수해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루가루는 나를 곧바로 죽이지 않았지.”
“어째서지?”
“놈의 말로는 구세록의 계약자에게 기다리는 운명을 동정해서, 그리고 지금까지 인류를 위해 싸워온 내게 경의를 표해서라고 하더군.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두라고, 그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 했지.”
순간 용우는 실소하고 말았다. 그런 개소리를 늘어놓았단 말인가?
“설마 그 말을 믿었나?”
“물론 안 믿었다. 나는 놈에게 나를 살려둬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방패막이였겠지.”
루가루는 사다모토 아키라를 즉시 죽이지 않는 대가로 자신을 새벽의 해머 제1순위 계승 후보로 설정할 것을 요구했다.
“나를 죽여봤자 새벽의 해머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손에 넣고자 그런 방법을 썼겠지. 하지만 나를 죽여서 새벽의 해머를 계승해 버리면 그때는 다른 구세록의 계약자들을 통해서 노출될 위험이 있었던 게 아닐까?”
사다모토 아키라는 루가루가 지금까지 자신을 살려둔 이유를 그렇게 추측했다.
“그럴싸하군. 그럼 네가 죽으려는 이유는? 타카야마 준이치에게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루가루의 손에 죽지 않으면 계약이 완료되지 않고, 그럼 타카야마 준이치가 몸을 돌려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어느 정도는 그런 마음도 있지.”
사다모토 아키라는 루가루가 말한 정보를 의심했다. 타카야마 준이치와 그런 계약을 맺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그리고 설령 계약을 맺은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 계약에 구속력이 있기는 할까?
“그래도 실험해볼 가치는 있지 않겠나?”
어쩌면 타카야마 준이치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은 의미가 있으리라.
‘과연 그게 타카야마 준이치를 위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우는 굳이 그런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알겠다. 하지만 순서를 좀 바꿔야겠어.”
“순서를 바꾼다니?”
“놈의 눈앞에서 죽여주지. 그게 확실하지 않겠나?”
사다모토 아키라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그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내가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죽는다면, 죽지 않고 그냥 새벽의 해머를 넘겼다고 의심할 수도 있겠군.”
확실히 사다모토 아키라는 미쳐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반응이 나오겠는가?
용우는 그런 그의 광기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물었다.
“그리고 말인데, 놈이 말한 구세록의 계약자에게 기다리는 운명이라는 건 뭐지?”
“나도 모른다.”
“……”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지만 나는 딱히 놈에게 정보를 캐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놈이 알아서 떠벌린 것밖에는 아는 바가 없군. 구세록의 계약자의 말로는 그저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뭔가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 정도만 짐작할 수 있을 뿐.”
사다모토 아키라는 루가루를 좋게 보지 않는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그를 적대해서 쓰러뜨리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용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왜 굳이 놈의 뒤통수를 치려는 거지?”
“네 마음을 알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멀쩡한 애 몸을 빼앗아서 음모를 꾸미는 놈보다 네 쪽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거 참…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용우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