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세계의 귀환자-158화 (158/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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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혁은 어두컴컴한 방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그의 앞에는 50인치 벽걸이 TV가 노이즈 가득한 화면을 띄우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차준혁은 마치 그 화면에 뭔가 내용이 있는 영상이 재생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잔뜩 집중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한참 동안 침묵하던 차준혁은 한숨을 쉬며 TV를 껐다.

그리고 철저한 방음설비 때문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방 안에서 무너지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선생님…….”

차준혁의 눈은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

다니엘 윤이 그에게 남긴 유언장.

그 영상은 딱 한 번 재생된 후에 자동으로 파기되었다. 다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기에 차준혁은 스스로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자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든 좋으니 알려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대답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

한숨을 쉰 차준혁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온 것은 번민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결정한 그는 방을 나섰다.

* * *

팀 섀도우리스는 괌 청소 작전을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미국이 포기한 재해지역이었던 괌에는 이제 더 이상 몬스터가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그 사실에 큰 의미는 없었다.

미국은 굳이 괌을 관리하지 않을 테니까. 시간이 지나면 또 게이트가 열리고, 아무도 공략하지 않아서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풀려난 몬스터들이 죽음의 땅으로 변한 괌에 자리 잡을 터.

하지만 재해지역 청소를 명분으로 삼아서 괌에서 벌어진 실질적인 일들은 크나큰 의미가 있었다.

용우가 말했다.

“결국 적자로군.”

“이렇게까지 하고도 적자라니…….”

그 말에 이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사람이 괌에서의 전투를 위해 소모한 마력석의 양은 무려 27톤에 달한다.

벌인 일의 규모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괌 전체를 감싸는 결계를 구축했다.

그 결계 영역 안에서 광범위한 정보세계를 구현했다.

그리고 군주 두 명의 영혼을 강제로 강림시켜서 살해했다.

그 결과 군주를 둘이나 끝장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싸게 먹혔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앞으로도 전투에서 이만큼 마력석을 소모할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미국이 대가로 지불한 3톤으로는 전혀 만회가 되지 않는다.

재해지역인 괌에 바글거리던 몬스터들을 싹쓸이하고, 군주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마력석을 꼼꼼하게 회수하고, 군단의 정보세계로 쳐들어가서 군주의 영혼 잃은 몸과 그 최정예 부하들까지 처치해서 마력석을 획득했는데도 결국 5톤이 넘는 적자가 났다.

“내가 뭐랬냐? 너도 나 못지않게 써댈 거라고 했지?”

“칫.”

용우의 지적에 반박할 말이 없는 이비연이 혀를 찼다.

“그런데 선생님.”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실에는 리사도 있었다.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녀가 물었다.

“아직도 선생님은 엄청나게 많은 마력석을 비축하고 계시잖아요?”

“볼더를 잡았을 때 획득한 게 많았지.”

확실히 그때는 볼더는 물론이고 그 휘하의 모든 부하들, 거기에 그가 다스리는 백성들까지 전부 몰살시키고 엄청난 양의 마력석을 획득했다. 작은 문명 하나를 끝장낸 결과가 마력석이라는 자원으로 환원되었으니 그 양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용우는 마력석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처럼 두 군주를 잡기 위해 엄청난 마력석을 투입한 함정을 팔 수도 없었을 터.

“그럼 이쪽에서 역공을 가하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나요?”

“역공이라면 어떤?”

“남은 마력석으로 선생님의 분신과 성좌의 무기 모조품을 다수 만들어서 저들의 세계를 공격한다면…….”

용우가 왕의 섬에서 열쇠를 훔쳐올 때 투입했던 분신은 활동시간이 제한적이긴 해도 굉장히 강력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런 분신을 여럿 투입할 수 있다면 군주의 본신도 충분히 암살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안 돼.”

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존재 지속력이 강한 분신을 운용하는 건 여러 모로 위험성이 커. 적이 그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면 더더욱. 지난번에는 어디까지나 허를 찔러서 놈들을 잘 속였으니까 먹힌 거지.”

“존재 지속력이요?”

“흠…….”

용우는 고민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난감해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이비연이 킥킥 웃었다.

“내가 설명해 줄까? 분신 제작 전문가는 자기한테는 너무 당연한 느낌이라 설명하기 힘들 수도 있지. 난 오빠보다는 훨씬 설명을 잘하는 편이지만…….”

“…….”

이 대목에서 용우가 이비연을 째려보았고, 이비연은 뭐 할 말 있냐는 표정으로 받아쳐 주었다.

“그래도 종종 결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한테 설명하기 힘들다고 느낄 때가 있어. 보통 분신이란 건 내 의식을 담아서 원격조종하는 방식으로 쓰는 거야. 그게 아니면 구현하기 전에 행동 패턴을 결정하고 투입하거나. 그리고 이 경우 분신의 존재 지속성은 약하고, 짧아.”

본체는 맞아봤자 조금 아프고 말 공격이라도 분신은 한 대 맞으면 해제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오빠가 만든 분신은 특별해. 한정된 시간 동안은 본체와 비슷한 능력을 발휘하고, 자율적인 의지까지 가졌지.”

타락체들의 정점에 선 라지알조차도 진위 여부를 간파하지 못했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완성도의 분신이었다.

“여유 있는 상황에 투입할 경우 자력으로 마력을 회복해 가면서 존재를 유지할 수 있을 거고, 어쩌면 본체와의 연결을 끊고 독립된 존재가 되려고 했을 수도 있어. 탁월한 분신이라는 건 그런 위험성을 안고 있는 거야. 그런 분신을 여럿 만든다는 건 자살행위가 될 수 있고.”

게다가 이 분신조차도 분신의 한계성은 극복하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놈들이 분신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오빠가 준비한 작전의 핵심은 그거였어.”

그 작전에서 중요한 것은 분신의 능력을 얼마나 뛰어나게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었다.

미술품의 위작처럼, 정밀한 감정 작업을 거치지 않고서는 가짜임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드는 게 가능한가였다.

“왕의 섬에는 라지알 말고도 분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약점을 찌를 능력이 있는 놈들이 수두룩했으니까. 사실 그때 오빠는 꽤 위험한 다리를 건넌 셈이야.”

분신은 본체와의 연결성을 갖는다. 그렇기에 분신이 제압당할 경우 분신을 통해서 본체가 공격당할 수도 있다.

용우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랬지. 내가 한 일을 놈들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

용우가 군단의 빙의체를 제압해서 본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던 것처럼, 적들도 그럴 수 있었다.

“아…….”

리사는 납득했다.

하긴 용우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그것이지 않았던가? 구세록의 계약자들도, 종말의 군단도 결국 안전한 곳에서 타인만을 희생시켜 가면서 목적을 이루려 하다가 용우가 찌를 약점을 제공하고 말았다.

“수법이 밝혀진 마술이나 마찬가지야. 같은 수법으로 놈들을 치는 건 내 약점을 때려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똑같지.”

그러니까 분신을 이용한 기만작전은 일회용이었다. 리사가 그 사실을 이해하자 용우가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이걸로 남은 군주는 셋.”

광휘의 데바나.

뇌전의 에우라스.

대지의 트라드.

일곱 군주 중 넷을 처리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저 셋뿐이다.

“그 셋을 처리하면, 이 전쟁이 끝날까?”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난 안 끝난다고 봐. 놈들은 분명 대체 불가능한 존재지만, 저놈들이 없다고 해서 ‘왕’이 탄생할 수 없는 걸까?”

이비연이 알고 있는 왕위계승권자들의 리스트만 봐도 군주만이 아니라 라지알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기둥’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어.”

군단은 성좌의 무기를 가리켜 ‘기둥’이라 부른다.

구세록의 계약자를 가리켜 ‘기둥의 제물’이라 부른다.

아티팩트를 가리켜 ‘열쇠’라고 부른다.

기둥의 의미 자체는 이미 밝혀졌다. 일곱 개의 기둥은 종말의 군단에게 침략당하는 세계를 지키는 방벽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기둥이 있기에 종말의 군단은 구세록의 규칙에 따른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놈들의 세계에서도 존재가 확인된 것은 ‘열쇠’뿐이지.”

“혹시 오빠는 군주 코어가 성좌의 무기에 해당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용우의 대답에 이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군주의 의지가 제거된 군주 코어는 거대한 힘의 덩어리다. 사용자의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 형상을 변화시켜 성좌의 무기와 융합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데 용우는 그것이 성좌의 무기에 해당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째서?”

“힘만 있으니까.”

“음?”

“성좌의 무기는 힘만이 아니라 그것을 쓰기 위한 방법도 같이 들어 있잖아. 하지만 군주 코어에는 그 군주가 휘두르는 권능의 근본이 되는 힘만이 있지.”

성좌의 무기에는 수많은 특성과 스펠이 내재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용우와 이비연이 갖지 못한 것들도 있을 정도다.

그렇기에 1세대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다종다양한 스펠을 구사하는 올라운더일 수 있었던 것이다.

“놈들에게도 그 부분에 해당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건 왕의 섬에서 본 일곱 개의 기둥일 것 같아.”

“근거는?”

“그냥 감이야.”

“하지만 그럴싸하게 들리긴 하네.”

이비연도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용우가 말했다.

“의문은 그것만이 아니야. 너는 이 전쟁에 공정한 규칙이 적용되고 있다고 말했지?”

“군단 수뇌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놈들은 내가 구세록의 계약자들을 없앴기 때문에 제약이 느슨해지고 있다고 말했어.”

성좌의 무기는 용우에게 계승되었지만, 계약은 계승되지 않았다. 계약이 소멸했기에 군단은 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내가 군주를 없앨 때마다 우리 쪽… 정확히는 지구 인류 측에도 뭔가 유리함이 발생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게?”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기에 이비연이 눈을 크게 떴다.

용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익이 발생한 것 같지가 않아.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 수 없지.”

종말의 군단은 모든 규칙을, 심지어 그 규칙이 상황에 따라 변칙적으로 적용되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인류는 아직 자신들이 휘둘리는 규칙조차 다 알지 못한다.

양쪽에게 주어진 정보의 불공평함이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누군가 우리에게 와야 할 이익을 가로채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을 지울 수 없군.”

“만약 오빠의 가설이 맞는다면 그건…….”

띠리리리리…….

그때 용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들어 보니 김은혜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무슨 일이지?”

* * *

김은혜의 공식적인 직함은 팀 섀도우리스의 매니저다. 매니저라고 하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녀의 권한은 막강하다. 팀 섀도우리스의 업무적인 부분 전부를 총괄하고 있으니까.

실질적으로는 팀 섀도우리스라는 기업의 고용 CEO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 그녀는 휴대폰을 여러 개 쓰고 있었다. 사적인 번호와 업무적인 번호를 나눠서 쓰고 있는데, 업무적인 번호에는 산더미 같은 번호가 입력되어 있었지만 그녀에게 직통으로 연락해올 만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만큼 팀 섀도우리스의 위상이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연락처에 번호 저장도 되지 않은 누군가가 연락을 해올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제로. 도쿄. 4월 21일.]

그래서 그 짧은 메시지가 전송되어 왔을 때, 김은혜는 당혹감을 느꼈다.

이걸 무슨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

한참 동안 고민해 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백원태와 오성준, 그리고 정부에 부탁해서 번호 추적을 시도해 봤지만 해외에서 발신되었다는 것만을 알아냈을 뿐이다.

무시하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하다.

그렇게 생각한 김은혜는 서용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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