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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군단은 갈망했다. 다른 존재의 몸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물질세계에 발 디딜 수 있기를.
구세록에 예비된 문, 지구 인류가 각성자 튜토리얼이라 부르는 현상이 한 번 일어날 때마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제약이 약해진다. 하지만 마지막 문이 열린다 해도 군주가 본신으로 물질세계로 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단 하나, 군주가 자신에게 대응하는 성좌의 무기를 손에 넣었을 때뿐이다.
하지만 용우는 그들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법칙을 깨부수고, 그들의 갈망을 이루어주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악!>
아득한 세월 동안 갈구하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 두라크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기쁨도, 환희도 없다.
그의 마음에는 절망과 공포만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정보 세계의 본체에서 뿌리째 뽑혀 나온 영혼이 강제로 지구로 끌려 내려온다.
이미 그 영혼을 담을 그릇도 준비되어 있었다. 용우에게 완벽하게 제압당한 그릇이!
뿐만 아니다.
‘힘이…….’
영혼이 지구로 강림한다고 해서 본신의 힘 그대로를 구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영혼을 잃은 본신은 텅 빈 그릇으로서 정보 세계에 남겨졌다. 그리고 영혼만이 본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허약한, 그것도 만신창이가 된 채로 적에게 제압당한 그릇으로 끌려온 것이다.
“성공했군.”
용우가 두라크를 보며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라크는 다 죽어가는 상태였다. 하지만 영혼을 끌고 오자 만신창이가 된 그의 마력이 차오른다.
부서진 아티팩트를 대신해서 진짜 코어가 그의 존재를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런 매개체 없이도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콰직!
그래봤자 본신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한 힘에 불과하다. 그가 꿈틀거리는 순간, 용우가 트리니티를 휘둘러서 그의 머리통을 정수리부터 둘로 쪼개 버렸다.
“자, 그럼 이제 마무리다.”
용우가 즐거워하며 또 다른 스펠을 펼쳤다.
-필멸자(必滅者)의 세계!
그러자 용우를 중심으로 주변 반경 10미터가 흐릿해졌다.
모든 것이 열화된 것 같은 세계 속에서 두라크는 낯선 공포를 느꼈다.
‘죽는다고? 내가?’
그것은 자신과는 영원히 관계가 없으리라 생각한 죽음의 공포였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두라크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자신은 불멸의 존재다. 눈앞의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존재해 왔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존재를 굴복시키며 군림해 왔다.
언젠가 이 거대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모든 세계의 왕이 되어 영원한 영광을 누릴 운명을 가진 왕위 계승권자가 바로 자신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
“아직도 현실 파악이 안 되나?”
<하루살이 같은 필멸자가 내게 죽음을 선사한다고? 나는 왕이 될 운명을 가진 존재다! 그런 일은 허락할 수…….>
“죽음은 네 허락 받고 오는 게 아냐, 얼간이 군주.”
용우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트리니티를 찔렀다.
콰직!
두라크의 코어가 트리니티의 칼날에 꿰뚫렸다.
<이, 이럴 수는 없, 어……!>
“있어.”
용우는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단언했다.
“너는 지금 죽는 거야. 너는 자신이 위대한 존재라서 다른 이들의 죽음을 내려다보면서 비웃어도 된다고 생각했겠지. 이게 그 착각의 대가다.”
<아아아아아……!>
터져 나오던 비명이 끊겼다.
용우가 그의 코어를 완전히 부숴 버렸기 때문이다.
새벽의 군주 두라크는 그렇게 죽었다.
* * *
군주의 죽음이 가져오는 여파는 작지 않았다.
서용우가 두라크의 코어를 파괴한 직후, 거대한 충격이 괌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팀 섀도우리스와 타락체들의 전투에도 치명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팀 섀도우리스는 군주가 죽고, 여파가 폭발하기 전에 미리 그 사실을 알고 대처했다. 그러나 타락체들은 그 타이밍을 모르고 있다가 폭발하는 힘의 격류에 쓸려 버렸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타락체 중에 사망자가 셋이나 나왔다. 그리고 나머지도 운이 좋거나 위기 감지 능력이 있는 네 명을 제외하고는 중상을 입었다.
승패의 저울이 결정적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 * *
두라크에 이어 소우바도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살해당했다.
그러자 다시 한번 충격이 괌 전역을 덮쳤고, 그것으로 팀 섀도우리스는 남은 타락체를 모두 처리하고 전투를 끝마쳤다.
폐허조차 안 남고 모든 것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 땅에서 이비연이 중얼거렸다.
“이거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분이네.”
그녀는 흥분으로 인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용우가 만족감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로 물었다.
“끝내주지?”
“응.”
이비연은 흥분으로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오랫동안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게 만든 원흉들을 죽였다.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원한을 품었으면서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새삼스럽지만 오빠는 정말… 대단해.”
용우와 재회한 후 몇 번이나 그에게 놀라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어비스의 모두가 포기하고 절망할 때 혼자 증오로 얼룩진 희망을 이야기하던 남자는, 이비연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 희망을 현실로 이루어내고 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 이 기분을 음미하면서 즐기는 건 마무리까지 하고 난 다음에 하자.”
용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봉인 해제!
그러자 허공의 한 점이 일그러지면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날이 사람 머리보다도 커다란 흑색의 도끼, 성좌의 무기 굉음의 도끼다.
“이제 네가 써.”
굉음의 군주인 소우바와 싸우기 위해서 봉인해 두었던 것이다. 소우바를 죽였으니 이제는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용우는 곧바로 그것을 이비연에게 계승해 주었다. 불꽃의 활, 대지의 로드, 빙설의 창은 융합해서 트리니티로 쓰고 있기도 하고 또 각각 유현애, 이미나, 리사를 계승 후보로 설정해서 힘을 공급해 주고 있기에 넘겨줄 수가 없다.
하지만 굉음의 도끼는 이비연에게 주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 오빠가 말한 게 이런 감각이구나.”
이비연은 계승받은 굉음의 도끼를 들고 살펴보면서 중얼거렸다.
계승받는 순간부터 굉음의 도끼가 소리 없는 유혹을 가해오는 것 같았다.
자신의 힘을 받아들이라고. 그로써 거대한 권능을 손에 넣으라고.
물론 이비연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변신하는 순간 내용도 모르는 채로 구세록과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것도 네가 써. 같은 속성이니 상성이 좋을 것 같군.”
용우가 건네준 것은 어른 주먹보다 좀 더 큰, 어둠 그 자체로 이루어진 것 같은 새카만 덩어리였다.
소우바를 죽이고 얻은 군주 코어.
그것을 받은 이비연이 혀를 차며 물었다.
“오빠 혼자 세 개나 갖는 거야?”
용우는 트리니티에 융합시킨 하스라 코어와 볼더 코어에 이어 두라크 코어까지 손에 넣었다. 그 점을 지적하자 용우가 씩 웃었다.
“넌 쌩쌩하잖아. 난 워낙 허약해져서 이렇게라도 전력 보강을 해야 한다고.”
“하여튼 말은 잘해요.”
이비연이 눈을 흘겼다.
용우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빨리 여길 정리하자.”
두 군주를 살해하고 그들의 코어와 막대한 양의 마력석을 획득한 두 사람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동료들과 타락체의 전투에 가세해서 빠르게 전투를 종료시켰다.
하지만 아직 그들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 * *
하스라와 볼더가 당한 이후로 종말의 군주들은 신중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안전하다. 불멸성을 얻었으니 패배해도 굴욕감을 느낄지언정 죽을 일은 없다.
그런 믿음이 깨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강력한 부하들로 하여금 곁을 지키게 했으며, 유사시에는 자존심을 굽히고 군단의 다른 세력에게 연락해서 도움을 청할 준비도 갖춰두었다.
하지만 그 모든 조치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적이 그들 앞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새벽의 군주 두라크의 곁을 지키는 고위 언데드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의 군주는 열쇠를 손에 넣어서 지구로 강림했다.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라 굉음의 군주 소우바와 함께.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이 지키는 군주의 몸에서 영혼의 기척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 그들이 지키는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은 강대한 힘의 덩어리일 뿐, 군주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아는 물론이고 종말의 군단을 통틀어 일곱 개만이 존재하는 불멸의 코어마저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들이 패닉에 빠져 있을 때였다.
콰아아아앙!
갑자기 그들 사이에서 솟아난 누군가가 거대한 양손 대검으로 그들을 후려쳤다.
단 일격으로 주변에 있던 고위 언데드들이 열 명도 넘게 쓸려 나갔다.
<아니?!>
경악하는 그들 앞에서, 이 세계에서는 이질적인 용모를 지닌 존재가 미소 지었다.
온통 생기 없는 존재들만이 가득한 크리스털 궁전 속에 단 한 명, 검은 머리칼의 인간 청년이 서 있었다.
종말의 군단에게 군주 사냥꾼이라 불리는 서용우였다.
“요즘 마력석 적자가 너무 심하거든. 초대형 광맥이 눈앞에 있는데 그냥 놔두고 갈 수는 없잖아?”
물론 적들은 용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콰콰콰콰콰!
용우는 기습의 이점을 살려서 폭풍처럼 그들을 휩쓸었다. 모든 방어진은 바깥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그 방어진 안쪽에서 출현한 용우는 완벽하게 허를 찌르고 있었다.
언데드들 입장에서는 최대한 빨리 방어진을 포위진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용우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막아! 잠깐이라도 막지 않으면… 크악!>
처음에 출현하자마자 지휘관으로 보이는 존재부터 해치웠고, 그다음에는 전열을 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고 어마어마한 힘으로 적들을 학살했다.
이미 승패는 갈렸다.
정보 세계로 넘어올 때마다 그렇듯이 용우는 어비스에서 도달했던 힘을 되찾았다. 그리고 트리니티를 구현한 지금은 볼더를 쓰러뜨릴 때를 능가하는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무리 군단의 최정예라고 해도 군주의 부하에 불과한 자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방어진을 구축한 채로 외부에서 충돌해 오는 식으로 싸웠다면 좀 상대가 됐겠지만 이렇게 허를 찔리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비연이도 잘하고 있겠지?’
* * *
같은 시각, 이비연은 굉음의 군주 소우바의 세계에 침입해 있었다.
서용우와 달리 이비연은 군단의 정보 세계에 침입해도 전투 능력에 변화가 없다. 아니, M수트를 쓸 수 없는 만큼 더 약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원래의 그녀라면 혼자서 소우바의 궁전에 침입하는 것은 위험한 행위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커다란 변수 하나가 있었다.
<벙어리 공주! 네년이 감히! 감히……!>
소우바의 호위를 책임지는 대장 해골 기사가 격노해서 이비연에게 뛰어들었다.
“넌 그런 말을 나한테 할 주제가 못 돼.”
그러나 이비연은 너무나 여유롭게 그의 공격을 막아낸다.
뿐만 아니다. 두 번의 공격을 방어한 반동으로 그의 기세를 끊어버리고, 그가 자세를 회복하기도 전에 섬전 같은 반격을 날렸다.
콰직!
표면이 새카만 한 자루의 장검이 대장 해골 기사의 허공장을 뚫고 그 몸통을 날려 버렸다.
<이럴 수가… 내가, 이런 버러지에게……?>
대장 해골 기사는 자신에게 닥친 일을 믿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이비연은 그가 감상에 빠질 틈을 주지 않았다.
쾅!
폭음이 울리며 대장 해골 기사가 산산조각 났다.
본신 마력만으로 보면 해골 기사 쪽이 이비연을 능가한다. 그런데도 방금 전의 전투는 어른과 아이가 싸우는 것처럼 일방적이었다. 이비연에게는 성좌의 무기 굉음의 도끼와 거기에 융합시킨 소우바 코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잠재된 힘을 생각하면 증폭률이 별로긴 하네.’
구세록의 계약자인 차준혁과 브리짓 카르타가 변신했을 때, 그들은 본신 마력에 비해 어마어마한 힘을 갖게 된다.
그들의 경우와 비교하면 이비연이 실감하는 힘의 증가 폭은 그리 크지 않았다. 물론 절대치로 보면 엄청나게 크지만, 계약을 거부한 채로는 끌어낼 수 있는 힘에 한계가 뚜렷하다는 뜻이다.
‘이래서야 오빠가 만족하지 못할 만도 해.’
왜 용우가 성좌의 무기 셋과 군주 코어 둘을 융합해서 트리니티를 만들어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구세록이란… 아니, 지금 생각할 문제는 아니겠지.’
이비연은 굉음의 소우바의 본신을 처치하고 전리품을 챙긴 것에 만족하고 물러나기로 했다. 이미 적들이 비상경계 체제를 발생시켰는지 이곳으로 향하는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으니까.
“비연아!”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의 앞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라지알.”
이비연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상아인 청년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군단의 타락체들을 이끄는 장군이라 불리는 자, 라지알은 이비연을 보며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그런 표정은 처음 보네.”
이비연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에 라지알은 순간적으로 넋을 잃었다. 그가 아는 이비연은 인형처럼 무표정한 존재였다. 그녀가 살아 있음을 실감할 만한 표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표정이 그의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았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닮았어.’
웃고 있는 이비연은 라지알이 타락체가 되기 전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설마 너, 원래의 인격을 되찾은 거야?”
“글쎄?”
“…….”
“조만간 또 만나게 될 거야.”
이비연은 그렇게 말하며 칠흑의 장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라지알의 모습이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라지알은 아직 소우바의 세계에 진입해 들어오지 못했다. 이곳에 침입한 것이 이비연임을 알고는 급히 환영을 보내왔던 것이다.
이비연은 그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지구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철저하게 파괴된 소우바의 궁전에 도착한 라지알은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너는… 어떤 사람이었지?”
이비연이 그의 적이 되었다.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조금 전에 자신을 향한 이비연의 미소를 보았을 때, 라지알은 처음으로 그녀가 살아 있는 존재임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실감이 이전에는 없었던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라지알은 그 의문을 안은 채, 파괴된 궁전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영원불멸할 줄 알았던 일곱 군주 중 넷이 죽었다. 그리고 절대로 깨지지 않을 줄 알았던 타락체의 비술이 깨졌다.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그들의 법칙이 무너져 내린다. 지금까지 상대에게 멸망의 공포를 선사해 왔던 종말의 군단은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암담함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Chapter49 배신당한 것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