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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연을 본 순간, 소우바는 한 가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이 결계는 벙어리 공주의 작품이었군.’
타락체일 때도 이비연은 군단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의 결계 전문가였다. 그녀가 괌을 감싸는 결계―영원의 장벽을 구축했다면 이 놀라운 퀄리티도 납득이 간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분명히 눈앞에 증거가 존재하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타락체를 원래대로 되돌린다고? 있을 수 없다……! 타락체의 비술이 깨질 리가 없어!>
위대한 권능을 사역했던 제1세계의 초월권족도, 무식하지만 강력했던 제2세계의 신성한 돌도 타락체의 비술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일단 비술에 걸리면 타락체가 되기 전에 죽여 버리는 것만이 그 영혼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응. 나도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라?”
이비연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의 눈에 기광이 번뜩이며 마력이 끓어올랐다.
-워 드레스!
마력 증폭기가 전개되자 푸른 섬광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M-링크 시스템 가동!’
이비연의 본신 마력은 9등급 몬스터 수준이다. 그런 그녀가 마력 증폭기를 전개하고, M슈트의 증폭 시스템을 발동시킨 결과는 어마어마했다. 지금의 소우바를 압도하는 수준의 마력이 휘몰아쳤다.
용우 역시 M-링크 시스템을 발동했다.
“3분이면 충분하겠지.”
M-링크 시스템의 유지 시간이다.
용우도, 이비연도 소우바를 압도하는 마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3분이면 승부를 내고도 남는다.
“그럼 끝내자.”
“응.”
소우바는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말도 안 되는 충격으로 가득했다.
쾅!
빛 그 자체로 화한 트리니티의 칼날이 그의 팔을 가르고 지나갔다.
꽈광!
그가 펼친 굉음결계를 종잇장처럼 찢어버리며 돌격해 온 이비연의 일격이 몸통을 파괴했다.
‘아니, 아직은 아니다.’
승산은 절망적이다. 타락체들의 지원조차 기대할 수 없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자폭으로 이 몸을 버리고 빠져나간다.
“어머.”
이비연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았어?”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했다.
소우바가 자폭하려는 순간, 그의 코어 역할을 하는 아티팩트 굉음의 도끼가 꿈틀거리면서 그 시도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아티팩트에 수작을 부려놨단 말이냐?>
소우바가 신음했다. 이비연이 괌을 감싸는 형태로 펼친 결계, 영원의 장벽이 아티팩트와 연동되어 있었던 것이다.
쾅!
그렇게 허점을 드러낸 소우바에게 이비연의 발차기가 꽂혔다.
“역시 군주님은 여유가 넘치셔. 나 정도는 한눈팔면서도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지?”
그들의 공방은 인간의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초고속으로 이루어진다. 소우바가 자폭을 시도하다가 주춤한 시간은 2초.
치명적인 빈틈을 드러낸 그 시간 동안 이비연은 그의 몸통을 발차기로 부수고.
콰쾅!
하단 돌려차기로 두 다리를 통째로 끊어버렸으며.
-노이즈 버스트!
극초음속의 7연속 접촉 타격으로 소우바의 마력에 노이즈를 발생시키는 쐐기를 박아 넣었고.
-죄인의 자리!
움직임과 마력 컨트롤을 둔화시키는 강력한 저주를 걸었다.
“어때, 군주님?”
주변에서 발생한 투명한 빛의 사슬 수십 개가 소우바를 휘감는다. 그 앞에서 물 흐르듯이 몸을 회전시킨 이비연이 내리찍기로 소우바를 쳐서 땅에 처박았다.
꽈아아앙!
폭음이 울리면서 대지가 원형으로 터져 나갔다.
“이제 너희들이 아무 생각 없이 싸지르고 다닌 절망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이해할 것 같아?”
그를 붙잡은 이비연의 아공간이 열리면서 마력석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그리고 그 마력석들이 일제히 빛 그 자체로 화하면서 이비연의 스펠이 발동했다.
<크윽, 보, 봉인인가……!>
소우바가 동요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멸성을 가졌다고 믿었던 그들이지만, 그때도 봉인만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어지간해서는 그들처럼 강대한 존재를 봉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은 실패할 거라고 낙관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최악이었다.
“아니.”
그러나 이비연은 그의 두려움을 부정했다.
“이렇게까지 공들여서 준비했는데 그렇게 말랑말랑한 방법으로 끝낼 생각은 없어. 안 그래, 오빠?”
“물론이지.”
이비연이 소우바를 제압하는 동안 용우도 두라크를 제압했다.
아티팩트가 부서져서 마력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는 두라크가 이비연을 보며 물었다.
<설마 그때부터였나?>
“뭐가?”
<열쇠 회수에 실패했을 때부터… 이미 원래대로 돌아온 거였나?>
두라크는 타이베이 게이트 브레이크 당시 이비연이 아티팩트 회수에 실패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당시에 주어진 활동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그녀의 능력이라면 해내고도 남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이비연은 그때 이미 원래의 자아를 되찾은 게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을 떠올린 것이다.
“글쎄?”
이비연은 두라크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았다.
상대가 곧 죽을 놈이라고 해도, 그리고 그가 원하는 답이 아무런 가치 없는 정보라고 해도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그 또한 상대에 대한 복수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것보다는 너희들이 이제부터 무슨 꼴을 당할지를 궁금해해야 하지 않을까?”
용우는 비아냥거리면서 아공간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투명한 소재로 이루어진 창이었다. 이비연을 구할 때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볼더의 창이다.
푸욱.
용우는 군주들이 떠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볼더의 창을 두라크에게 꽂았다.
후두두두둑…….
용우의 아공간에서 마력석들이 일제히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지출이 막대하군. 이번에도 또 적자야.”
미국으로부터 3톤의 마력석을 대가로 받기로 했다. 엄청난 양이다. 하지만 괌에 결계를 치고, 두 군주를 끝장내기 위해 퍼붓는 마력석의 양은 그 이상이었다.
우우우우우!
용우에 의해 연소된 마력석이 트리니티와 공명한다.
그 마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지금쯤 미군은 관측 장비가 전부 고장 나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몽환포영(夢幻泡影)!
그 거대한 힘으로 용우가 일시적으로 정보 세계를 구현했다.
구현자가 의도한 법칙을 강제하는 정보 세계가 구현되면서, 두라크의 몸에 꽂힌 볼더의 창이 빛을 토해내었다.
<크아아아아악!>
두라크가 비명을 질렀다.
상상도 못 한 고통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거인이 그의 머리통을 붙잡고 천천히 몸에서 뽑아내는 것 같은 격통이다.
<이, 이럴 수는 없어!>
군주는 그야말로 신화적인 권능을 가진 존재. 그들의 인지능력은 인류가 상상도 못 할 곳까지 닿아 있다.
그렇기에 두라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알아차리고 말았다.
<계약이 이런 것을 허용할 리가……!>
“계약 당사자들끼리야 그렇겠지.”
용우가 냉소했다.
“그런데 난 그 계약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거든. 너희들끼리 주고받은 계약서에 무슨 내용이 써 있든 나한테는 구속력을 발휘하지 못해.”
<기둥을 쓰는 자가, 그런 말을 지껄이느냐!>
“너희들은 강탈한 전리품을 쓰면서 원래 주인이 맺은 계약을 이행할 걸 걱정하냐?”
괌의 하늘이 진동하는 가운데, 주변의 풍경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혼돈으로 변해간다.
몽환포영의 힘이 계속해서 확장되면서 벌어지는 사태였다. 트리니티의 힘에 5톤이 넘는 마력석을 연소시켜 얻은 마력, 그리고 사전에 준비해 둔 이비연의 결계와의 연동까지 더해지자 그 결과는 끔찍할 정도였다.
괌 전체가 몽환포영의 영향권에 들어왔다. 괌을 감싼 결계 안쪽은 모두 용우가 원하는 법칙이 강제되는 정보 세계로 화한 것이다.
그야말로 용우를 위한 성역(聖域)이었다.
“모두들, 이제는 좀 더 싸우기 편할 거야.”
용우가 팀원들에게 말했다.
<엥? 뭐야, 이거?>
유현애가 황당해하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미나와 팀플레이로 타락체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녀에게 이상한 예감이 찾아들었다.
‘저길 쏘면 좋을 것 같은데?’
지금 교전 중인 적을 견제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포인트다.
그런데도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유현애는 한번 그 기분의 실체를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마력을 최대 출력으로 전개하며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 사선(射線)에 타락체 하나가 출연하더니 등을 정통으로 맞아버렸다.
<이거 혹시 예지 같은 거예요?>
차준혁의 공격을 피해서 급히 블링크로 회피한 타락체가 정확히 그 타이밍에, 그 지점에 나타난 것이다.
<하나 더 처리했다. 남은 건 열 놈이군.>
그렇게 유현애의 저격에 맞고 추락한 타락체를 차준혁이 처리했다.
그런 일이 전장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휴고가 아연해하며 중얼거렸다.
바로 직전까지도 그들은 타락체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비연이 난입해서 다섯을 치워주긴 했지만 그래도 쉬운 싸움이 아니었다. 여전히 적의 수는 그들의 두 배가 넘었고, 하나하나의 역량도 뛰어났으니까.
지금까지 그들이 해낸 것이라고는 휴고와 차준혁이 각각 타락체 하나씩을 처치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용우가 몽환포영을 펼치자 상황이 어이없이 흘러간다.
몽환포영의 영향권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혼돈, 확률적인 문제가 무조건 용우에게 유리하게 적용된다. 주사위를 백 번 던져서 백 번 다 원하는 숫자만 나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 영역이 광범위하게 구축되자 용우 본인만이 아니라 아군에게도 같은 효과가 적용되었다.
전투 중에 발생하는 크고 작은 우연이 전부 아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아군 전원이 예지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몽환포영의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들에게 예감이라는 형태로 공유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차준혁, 휴고, 브리짓, 유현애, 이미나, 리사 여섯 명의 연계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준의 효율을 내기 시작했다.
“자, 기뻐해라.”
용우는 두라크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이니까.”
정보 세계에 존재하는 군주의 본체, 그곳에 존재하는 영혼이 뿌리째 뽑혀서 지구로 끌려 내려오고 있었다.
* * *
치지직… 치지지지직……!
격렬한 노이즈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구세록의 힘으로 괌을 관측하고 있던 루가루에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으, 으윽.”
루가루는 감각과 사고에 노이즈가 발생하는 것을 느끼며 신음했다.
“이건 대체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사태였다.
구세록의 관측 능력은 탁월했다. 서용우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지구상의 모든 곳은 물론이고 게이트 안까지 엿볼 수 있으며, 관측자의 시선을 전혀 들키지 않는 완벽한 관측 능력.
지금까지 그 능력이 통용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사용자들의 신뢰도는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깨지고 있었다.
더 이상 관측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관측 정보를 망가뜨리는 노이즈가 관측자인 루가루의 감각까지 오염시키는 게 아닌가?
루가루가 관측을 멈추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바로 앞에서 그를 빤히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헉!”
루가루는 깜짝 놀라서 헛숨을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지?’
착각이었을까? 루가루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루가루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가 차지한 소년의 몸, 타카야마 준이치의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가슴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