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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혁은 격분한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당장 멈춰!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나!>
구세록의 히든 채널을 통해서 들려오는 루가루의 목소리였다.
<하스라를 격퇴했던 것 때문에 기고만장한 것 같은데, 그때와 똑같이는 안 된다! 놈들도 그때처럼 여유를 부리진 않을…….>
<이미 늦었다.>
하늘이 열리고, 군주들이 강림하고 있었다. 저렇게 된 이상 이미 늦었다.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친놈들…….>
<한 가지 부탁하지.>
<뭐?>
무덤덤한 차준혁의 말에 루가루가 당혹감을 느꼈다.
현장에 있는 차준혁은 눈앞에서 부풀어 오르는 거대한 존재감을 직접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하스라 때를 기준으로 판단했다면, 그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차준혁은 침착했다.
<넌 사다모토 아키라에게 연락할 수 있는 것 같으니, 그에게 잘 숨어 있으라고 해라. 혹시라도 새벽의 군주에게 인지되면 문제가 커지니까.>
<…….>
<바쁘니까 대화는 여기까지 하지.>
<잠깐……!>
루가루가 놀라서 소리쳤지만 차준혁은 일방적으로 텔레파시 통신을 끊어버렸다. 히든 채널을 통한 연락이라고는 하지만 일단 그 채널의 존재를 인식하자 닫아버리는 건 쉬웠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군.’
차준혁은 투구 안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놈은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야.’
서용우가 계획한 이번 일이 루가루 입장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사태였던 것이리라. 차준혁은 그 사실에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집중할 시간이군.’
차준혁은 상념을 떨쳐 버리고 눈앞의 상황이 집중했다.
두 명의 군주가 강림하고, 그들의 부름을 받은 타락체들이 집결했다.
이제 그동안 쌓아 올린 전력을 시험할 시간이었다.
* * *
괌은 제주도의 절반도 안 되는 작은 섬이다.
즉, 9등급 몬스터를 훨씬 능가하는 힘을 지닌 군주 둘과 싸울 전장으로는 너무 좁다.
그럼에도 용우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괌이 인류의 거주 지역과 아주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 한복판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로 괌은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의 땅이 될지도 모르겠군.’
전투는 시작되었다.
흩어지는 팀원들을 타락체들이 추적하면서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괌 곳곳에서 폭음이 울려 퍼지고 섬광과 불꽃이 치솟았다.
“내가 하나는 줄여줬다. 열일곱 남았군.”
통신에다 대고 말하는 용우의 손에는 상아인 타락체의 머리가 잡혀 있었다.
개전과 동시에 다른 팀원들이 아닌 용우에게 뛰어든 놈이었다. 그런 상황도 예상하고 있었던 용우는 감추고 있던 힘을 폭발시켜서 일격으로 끝장을 내버렸다.
<그렇군. 믿는 구석이 있었나?>
새벽의 두라크가 경계심을 보였다.
그가 본 용우의 마력은 몬스터로 치면 6등급에서 7등급 사이에 걸쳐 있는 수준이다. 군단의 타락체 기준으로는 중하위권 정도고 군주인 그의 입장에서 보면 대수로울 것 없었다.
그러나 용우가 타락체를 참살할 때 보인 힘은 그런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애써 준비한 게 날아갔잖아, 제길.”
용우가 짜증을 냈다. 두 군주가 자신을 얕보고 달려드는 순간에 제대로 한 방 먹여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분위기 파악 못 하는 타락체 한 놈 때문에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콰직!
용우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타락체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우우우우우우!
이렇게 된 이상 기습을 노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용우는 갖가지 수단으로 감추고 있던 마력을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용우의 마력이 폭등한다. 7등급 몬스터를 넘어서 8등급 몬스터 수준까지.
-워 드레스!
거기에 마력 증폭기가 펼쳐지면서 푸른 섬광이 용우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자 9등급 몬스터 수준까지 도달하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군주들은 살짝 놀랄 뿐이었다.
<과연 기둥을 쓰면 이 정도까진 되는가. 기둥에 형상변화를 적용할 정도면 관련된 특성도 가졌다는 건데… 제3세계의 인간에게 그런 힘이 있을 리는 없지. 역시 탈출자인가?>
두라크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주변에 무수한 빛의 구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염동충격탄 동시다발!
100발이 넘는 에너지탄이 일제히 용우를 노리고 쏟아졌다.
꽈과과과과광……!
괌 쉐라톤 라구나의 폐허가 일순간에 초토화되었다.
용우는 허공으로 솟구쳐서 그것을 피했지만 충격파가 그를 두들겨 댄다. 용우는 어쩔 수 없이 블링크로 거리를 벌렸다.
-공허 문지기!
그러나 그 순간, 굉음의 소우바가 펼친 스펠이 용우를 원래의 자리로 끌고 왔다.
쾅!
보이지 않는 충격이 용우를 쳐서 지상으로 내리꽂았다.
콰콰콰콰쾅……!
한 발이 아니다. 연타로 충격이 꽂히면서 용우의 몸이 급가속, 아직 빌딩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리조트 호텔에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앙!
직후 두라크가 발한 스펠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리조트 호텔의 폐허를 중심으로 수백 미터가 증발해 버렸다. 폭심지를 중심으로 흙먼지가 솟구치면서 괌 전체가 진동했다.
<우리가 연계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느냐?>
두라크가 돌풍을 일으켜 흙먼지를 걷어내면서 물었다.
“생각보다는 사이가 좋아 보이는데?”
폭심지 한복판에서 용우의 대답이 들려왔다
짧은 교전만으로도 반경 3킬로미터가 초토화되었다. 그런데도 용우는 아직 멀쩡했고, 두 군주도 그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다.
‘좀 놀랍긴 하군.’
군주들끼리 연계가 잘되는 것은 의외였다. 예전에는 이놈들도 서로 힘을 합쳐 싸운 경험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연계는 확실히 무섭다. 단순히 전술적 합이 맞는 것만이 아니다. 군주의 권능으로 서로를 강화시켜 주니 무서운 시너지 효과가 나오고 있었다.
그들 둘의 조합은 1 + 1 = 2 가 아니었다. 최소한 5 이상의 결과를 낸다고 봐야 할 것이다.
<넌 스스로의 전투 기술에 자신이 있었겠지.>
두라크가 재차 용우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수십 발, 아니, 수백 발의 에너지탄이 사방을 폭격해서 빠져나갈 길을 막고 있었다.
뿐만 아니다.
-잠자는 사자의 명령!
두라크가 권능을 발하자 초당 수십 발씩 쏘아지는 에너지탄들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본래 초음속으로 날아가서 폭발해야 할 에너지탄들이 특정 지점에 도달하면 멈춘 것처럼 느릿느릿해진다. 그리고 용우를 포위하듯이 주변에 계속해서 배치되는 게 아닌가?
-굉음결계!
뿐만 아니다. 울려 퍼지는 폭음을 굉음의 소우바가 제어해서 굉음결계를 구축, 용우의 움직임을 제약하기 시작했다.
<하스라와 싸웠던 경험으로, 자신의 전투 기술이면 강림한 우리를 상대로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두 군주를 상대로 버티면 동료들이 타락체들을 처리하고 돌아와 줄 것이다. 모두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두 군주를 당해낼 수 있다.
<그런 계산이었겠지. 하지만 너는 우리를 너무 얕봤다.>
두라크가 용우를 비웃으며 손을 들었다. 이미 천 개가 넘는 에너지탄들이 용우를 포위했다. 그가 원하는 순간 일제히 용우를 덮쳐서 폭발할 것이다.
<그 대가를 몸에 새겨라.>
그렇게 말할 때였다.
파악!
그들이 있는 공간에 빛의 궤적이 그어지면서, 일순간 공간이 둘로 어긋나는 것 같았다.
<음?>
두라크가 경악했다.
그 빛의 궤적이 그의 허공장을 가르고 몸에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뭐지?>
비록 작은 흠집 정도라지만 섬뜩한 일이었다. 그의 허공장을 일격에 뚫었다는 뜻이니까.
“네놈들은 참 하나같이 사교성이 뛰어나군. 부러울 정도야.”
용우가 특유의 심드렁한 태도로 말했다.
남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군주들은 하나같이 여유가 넘치고, 말하길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다. 용우 입장에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성향이다.
-끝없는 미궁!
용우의 앞에 공간왜곡장이 출현했다. 한 박자 늦게 용우를 덮친 에너지탄들이 모조리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버 커넥트!
용우는 에너지탄들을 집어삼킨 공간왜곡장을 워프 게이트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것을 본 두 군주가 반응했다. 특히 시공간을 다루는 두라크는 타이밍을 빼앗겼으면서도 권능을 발동, 일반적인 가속 스펠로는 도달할 수 없는 초가속으로 아슬아슬한 틈을 찌르는 게 아닌가?
-공허문지기…….
용우가 기다렸다는 듯 똑같은 스펠을 발했다.
-공허문지기!
동일한 스펠이 충돌하면서 상쇄되었다.
<아니?!>
두라크가 경악했다.
그것은 마치 날아오는 화살을 화살로 맞혀서 떨군 격이다. 용우가 두라크의 수를 완벽하게 읽고 있었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이 상황에서 고를 수단이야 뻔하지.’
아무리 두라크라고 해도 이 타이밍에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공간 이동 된 에너지탄들이 헛되이 폭발했다.
일순간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른 것 같았다.
괌 동쪽 바다에서 전술핵급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동쪽에서 발생한 빛이 시야를 하얗게 덧칠했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두라크가 분노했다. 그가 자신의 권능으로 다시금 초가속 상태에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투학!
용우가 절묘한 타이밍으로 돌격해 와서 양손 대검을 내려쳤다.
두라크는 그것을 막아내고, 반격하려고 했다.
파아아아아!
괌 서쪽 해상에서 빛기둥이 솟구쳤다. 날카로운 섬광이 하늘 끝까지 뻗어나가면서 대기가 진동한다.
<뭐지?>
소우바가 놀랄 때였다.
남쪽 해상에서도 똑같은 빛이 솟구쳤다.
뿐만 아니다. 대폭발이 잦아들지 않은 동쪽 해상에서도, 그리고 북쪽 해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서남북, 사방을 점하며 솟구친 빛기둥이 급속도로 변형한다. 일정 고도에서 휘어지면서 천공의 한 지점에서 이어지는 게 아닌가?
-영원의 장벽!
그리고 그 지점을 중심으로 투명한 힘의 장막이 발생해서 괌 전체를 감쌌다.
<결계?>
두라크가 경악했다.
괌은 퍼스트 카타스트로피 이전에는 한 해에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오는 관광지였다. 작다는 것은 국가의 영토 개념으로 볼 때 작다는 것이지, 섬 기준으로는 절대 작은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괌 전체를 감싸는 결계라니?
<이 세계에 이런 결계 능력자가 존재한단 말인가?>
이 정도면 군단에서도 최상급의 실력자다. 각 군주들이 가장 신임하는 실력자, 혹은 최정상급 타락체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오래 걸리는군. 기다리느라 힘들었다.”
두라크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용우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가볼까?”
<뭐라고?>
두라크가 흠칫하는 순간, 용우가 발차기로 그를 걷어찼다.
꽈아아앙!
굉음이 울리며 두라크가 튕겨 나갔다.
그리고 용우가 지금까지 쓰던 칠흑의 양손 대검을 뒤로 던져 버렸다.
‘무기를 버리다니?’
두 군주가 의아해하는 앞에서 칠흑의 양손 대검이 아공간 속으로 사라지고, 그것을 대신해서 또 다른 양손 대검이 나타나 용우의 손에 쥐어졌다.
손잡이와 중앙부는 암석인지 아니면 금속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검은색을 띠고 있었고, 테두리와 칼날 부분은 LED와 비슷한 느낌의 청록색을 발하고 있었다.
성좌의 무기와 군주 코어의 융합체, 트리니티였다.
<저건……?>
<기둥? 아니, 뭔가 다르다.>
두 군주가 당황했다.
용우가 조금 전까지 쓰던 칠흑의 양손 대검은, 대량의 마력석을 투입해서 만든 성좌의 무기 모조품이었다. 정보 세계에서 군주들은 물론이고 라지알까지 속여 넘겼던 퀄리티의 모조품을 또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미리 세팅해 둔 결계가 발동할 때까지 두 군주를 속여 넘기기 위해서였다.
‘별것 아닌 놈이다. 우리 둘이 연계하면 압살할 수 있다.’
‘놈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지구에 투입시킨 타락체들을 불러들이면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것은, 군주들이 언제든지 빙의를 풀고 달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용우가 강해졌어도 그들을 지휘관 개체처럼 쉽게 붙잡아놓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도망 못 친다.”
괌을 감싼 결계―영원의 장벽은 군주들의 정신체를 그 안에 붙잡아놓는 역할을 한다. 결계가 유지되는 한 군주들은 괌 밖으로 나갈 수도, 빙의를 해제하고 이탈할 수도 없다.
“이해할 수가 없겠지. 지금은 그럴 거야.”
이 시점에서 두 군주는 용우의 의도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곧 이해하게 될 거야. 너희들이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