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세계의 귀환자-150화 (150/225)

1

무덤 없이 죽은 사람이 있다.

그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장례식도 치러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아는 극소수만이 가슴에 그를 묻고 슬퍼할 뿐이다.

“후우.”

백발의 청년, 차준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폐허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한 손에는 독한 술이 들려 있고, 몸에서는 술 냄새가 난다. 하지만 걸음걸이는 흐트러지지 않았고 눈도 풀리지 않았다.

각성자가 된 후로 그의 몸은 술에 취하기도 힘들어졌다. 마력이 강해질수록 점점 더 그랬다. 그야말로 들이부어야 좀 취하는 느낌이라도 들까 말까였다.

끼익……. 끼이익…….

녹슨 철제 구조물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걷고 있는 폐허는 다소 독특한 곳이었다. 거대한 테마파크의 폐허였으니까.

용인.

한때 한국을 대표하는 테마파크였던 장소의 폐허를 걷고 있었다.

놀이 기구들은 무참하게 부서져 있고 과거에는 계절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던 화단과 정원은 황폐해져 있었다.

차준혁이 이런 곳을 걷고 있는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기분이 너무 울적해서 도심을 떠나서 마구잡이로 텔레포트해 돌아다니다 보니 도착했을 뿐이다.

주저앉아서 막힌 테마파크의 입구를 보는 순간, 차준혁은 어린 시절의 일을 떠올렸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 아주 어릴 적에 부모님의 손을 잡고 이곳에 놀러왔던 기억을.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은 추억이었다. 차준혁에게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그리 선명하게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리 통에 부모님을 떠올릴 사진 한 장조차 건지지 못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어린 시절의 추억은 희미해져만 갔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하자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왠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래……. 요즘 세상에 이런 곳은 사치지.”

차준혁은 레일째로 부서져서 무너져 내린 롤러코스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요즘 세상에도 테마파크는 있다. 하지만 그 테마파크들은 전부 도심에만 존재했다. 이곳처럼 교외에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던 테마파크는 하나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문득 예전에 봤던 기사가 떠올랐다.

테마파크가 폐허로 변하자 부속되어 있던 동물원에서 기르던 동물들이 야수화되었다는 기사가.

크르르르르…….

“이 동네에 먹을 게 많았나 보군.”

퍼스트 카타스트로피 이후 몇 년이 지날 때까지는 그랬다.

차준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야수가 아니었다.

1등급 몬스터, 주시견이었다.

털 대신 비늘이 달린, 개를 닮은 사족 보행 생명체가 흉측하게 커다란 외눈으로 차준혁을 노려본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다. 어느새 주변이 열 마리가 넘는 주시견 무리에 의해 포위당해 있었다.

게이트 재해가 인류를 위협하는 이 시대, 문명의 빛이 닿는 곳은 철저하게 제한되어 있다. 과거에는 사람이 살던 곳에도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재해 지역에서 빠져나온 몬스터들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런 곳에 자리 잡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마음 놓고 술도 못 처먹는 신세라니. 가뜩이나 취하지도 않는데…….”

차준혁이 술병을 탈탈 털어서 비우고는 병을 거꾸로 쥐었다.

카아아!

주시견 두 마리의 흉측한 눈이 빛났다. 표적의 움직임을 붙잡는 포박의 마안이 발동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가 일제히 차준혁에게 뛰어들었다.

파지지지직!

공간이 뒤흔들리며 격렬한 스파크가 터졌다.

차준혁의 허공장에 부딪친 주시견들이 튕겨 나간다.

투학!

그리고 차준혁이 술병을 휘둘러서 주시견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유리로 만들어진 술병도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기에 차준혁은 맨손이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콱!

발차기 한 방에 주시견이 두 동강 나서 죽었다.

콰콰콰콰콰쾅!

맨손으로 마격탄을 연사하는 것만으로도 주시견들이 박살 나서 흩어졌다.

차준혁의 마력은 페이즈16에 도달했다. 이미 5등급 몬스터 수준인 것이다. 주시견 무리쯤은 성좌의 무기가 없어도 상대가 안 된다.

-광휘의 검 소환!

그럼에도 차준혁은 빛 그 자체로 이루어진 검을 소환해서 손에 쥐었다.

“나와라.”

물론 주시견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누군가 모습을 감춘 채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

정적이 흘렀다.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누군가 있다는 존재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차준혁은 전투태세를 풀지 않았다.

“나오지 않겠다면…….”

차준혁의 마력이 서서히 커져가고 있었다. 광휘의 검을 소환해서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력은 인류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상태였다.

“후회하게 해주지.”

차준혁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광휘의 검을 휘둘렀다.

겉으로 보면 허공에다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 그러나 그 행동의 결과는 놀라웠다.

“음……!”

광휘의 검이 그려낸 궤적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한 거지? 몽환 영역에 있는 나를 치다니…….”

코트를 입고 후드를 쓴, 그 후드 아래로 새카만 어둠만이 존재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소년이 나타났다.

팔이 얕게 베여서 피 냄새를 풍기는 소년은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몽상가 루가루라는 놈인가?”

차준혁이 그에게로 다가가자 소년이 한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소년의 모습이 허공으로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퍼엉!

직후 폭음이 울려 퍼지며 그 은신 행위가 저지되었다. 충격에 튕겨 나간 소년, 루가루가 아슬아슬하게 미끄러지면서 땅에 넘어지는 것을 면했다.

“뭐, 뭐야?”

“넌 이미 우리 동료 앞에서 그 재주를 한번 보여줬지.”

일격으로 루가루의 도주를 저지한 차준혁이 싸늘하게 말했다.

블링크로 공간을 뛰어넘은 그가 광휘의 검을 루가루의 목에다 가져다대고 있었다.

“허튼수작을 봐주는 건 여기까지다. 다음번에는 죽인다.”

“하… 당신 진짜 지구인인가?”

루가루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차준혁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 알았어. 칼 좀 치워주지 않을래? 난 당신하고 싸우러 온 게 아니거든.”

“용건을 말해.”

“아, 이거 참.”

루가루가 쓴웃음을 지었다.

콰아앙!

직후 폭음이 울리며 차준혁과 그가 서로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허를 좀 찔러서 재미 좀 봤다고 너무 우쭐해하는데…….”

루가루가 몸을 일으키며 목을 뚜둑 소리가 나게 꺾었다.

스르릉… 철컥!

허공에서 흑색의 건틀릿이 나타나서 루가루의 오른손을 감쌌다. 동시에 루가루의 마력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짜증 나네. 그래도 내가 싸우러 온 게 아니라는 말은 사실이거든? 일단 이야기 좀 들어보지 않을래?”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차준혁이 신중하게 루가루를 관찰했다.

루가루의 흑색 건틀릿은 아티팩트급 장비였다. 지구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음이 분명한.

그리고 그 장비를 장착한 루가루의 마력은 지금의 차준혁을 능가하고 있었다.

물론 차준혁에게는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가루에게도 뭔가 비장의 패가 남아 있지 않을까?

“몽상가는 꿈의 세계를 돌아다니지. 그러다가 네 꿈을 봤어.”

“뭐라고?”

“다니엘 윤. 정말 살릴 수 없었을까?”

순간 차준혁이 전광석화처럼 루가루에게 뛰어들었다.

콰아아아앙!

폭음이 울리며 둘이 격돌했다.

광휘의 검을 흑색 건틀릿으로 막아낸 루가루의 모습이 흐릿해지며 사라진다.

투학!

직후 후두부를 노리고 날아드는 발차기를 차준혁이 몸을 돌리며 어깨로 받아냈다.

자세가 무너진 그에게 루가루가 에너지탄을 날리고, 회피하는 곳을 향해 뛰어들면서 공격을 날렸다. 완벽하게 적을 원하는 지점으로 몰아넣고 두들기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차준혁은 회피 단계부터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에너지탄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들이받으면서 돌파한 것이다.

콰하핫!

오히려 루가루의 사각으로 뛰어든 차준혁이 검격을 날렸다.

“크…….”

루가루가 신음했다.

옷이 찢어지고 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광휘의 검이 그의 허공장을 가르고 몸통에 상처를 남긴 것이다.

“확실히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군.”

루가루는 감탄했다.

차준혁의 전투 기술은 초일류였다. 몬스터를 상대할 때만이 아니라 대인전에서도.

우우우우우우!

그리고 그 앞에서 차준혁이 변신했다. 순백의 표면 위로 황금과 백은으로 복잡한 패턴의 무늬를 양각(陽刻)해 넣은 갑옷이 그를 감쌌다.

거대하다 못해 흉포한 마력이 끓어오른다. 루가루를 압도하는 마력이다. 그럼에도 루가루는 당황하지 않았다.

“확실히 강해. 1세대와 달리 기둥이라 불릴 만한 최저 조건은 만족시키는군.”

루가루의 목소리에 기묘한 울림이 섞였다.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울림이었다.

크르릉! 카릉!

늑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루가루의 옷이 찢겨 나갔다.

<늑대인간?>

덩치가 두 배 이상 부풀어 오르면서, 루가루가 백색 털의 늑대인간으로 변했다.

하지만 휴머노이드 몬스터인 늑대인간과는 다르다. 일단 털이 하얀 것부터가 그렇고, 눈동자가 푸르다는 점과 신체의 실루엣이 인간에 가까운 균형감을 갖고 있다는 점이 그랬다.

여전히 오른손에 흑색의 건틀릿을 끼고 있는 루가루가 말했다.

“계속할 거면… 나도 이제는 더 못 봐주겠는데?”

“…….”

루가루의 마력은 변신한 차준혁과 필적했다.

차준혁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루가루가 허세를 부리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차준혁은 검을 거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루가루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용우가 이비연을 되살렸을 때, 차준혁은 그런 의문을 떠올리고 말았다.

서용우는 정말로 다니엘 윤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일까?

답은 알고 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때의 서용우에게는 그럴 힘도, 수단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비연은 타락체 중에서도 인간일 때의 인격이 살아 있던 특이 사례이기에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을 뿐이다. 다른 타락체는 되돌릴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그 사실을 납득했다.

하지만 마음은 아니었다. 이비연을 볼 때마다 울컥하는 감정이 일어났다.

루가루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네 꿈을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지. 네 갈망은 이뤄질 수 있다. 다니엘 윤, 기둥의 제물이었던 그 남자를 되살릴 수 있어.”

“뭐?”

분노로 타오르던 차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들리겠지. 하지만 기둥의 제물은 특별하다. 다니엘 윤이 도달한 운명이자 네게 예비된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

“…….”

“이야기를 들어볼 마음이 들었나 보군.”

루가루는 늑대의 얼굴로 웃었다.

* * *

팀 섀도우리스의 일원들은 의아함을 느끼며 모였다.

차준혁이 팀원들을 소집하는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서용우, 리사, 유현애, 이미나, 브리짓, 휴고… 그리고 이비연까지 전원이 모이자 차준혁이 입을 열었다.

“몽상가 루가루가 접촉해 왔다.”

“호오.”

용우가 눈을 빛냈다.

“대처법은 쓸모가 있었나?”

“있더군. 확실했어.”

리사와 루가루가 만난 시점에서, 용우는 그가 ‘몽환 영역’이라 칭하는 정보 공간과 현실을 오가는 기술에 대한 대처법을 팀원들에게 훈련시켰다. 차준혁이 루가루의 은신을 눈치채고, 도주를 막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잡지는 못했다.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어.”

“그 정도였나?”

“그 농담이 진짜였다.”

“음?”

“전에 현애가 농담처럼 말했던 거.”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유현애에게 집중되었다.

유현애는 어리둥절해하더니 확신이 없는 투로 말했다.

“어, 혹시 자기를 루가루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혹시 늑대인간 아닌가 했던 거요?”

“그래. 늑대인간이더군.”

다들 황당해하며 차준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차준혁은 진지했다.

“휴머노이드 몬스터하고는 좀 달랐지만… 어쨌든 늑대인간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놈이었다. 그걸로 변신하니 마력이 변신한 나 이상으로 강해지더군.”

“늑대인간이라…….”

이비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유현애가 물었다.

“짚이는 데가 있어요?”

“늑대인간은 아니지만, 초월권족 출신의 타락체 중에 그런 하이브리드계 짐승 인간으로 변신하면 더 강해지는 놈들이 있어. 내가 본 건 곰 인간이나 용 인간 같은 괴물들이었는데 그런 계통일지도?”

“그렇다면 몽상가 타카야마 준이치의 몸을 차지한 초월권족 탈출자일지도 모르겠군.”

용우의 말에 이비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탈출자라. 그건 모르겠어.”

“왜?”

“군단에서는 탈출자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거든. 제1세계의 탈출자는 제2세계와의 전쟁에서 다 잡아 죽였고, 제2세계의 탈출자는 없었다고.”

“하지만 그놈들, 내가 탈출자일 거라고 의심하던데? 확신이 없는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이비연이 애매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우가 차준혁에게 물었다.

“접촉이라고 표현한 걸 보면, 놈이 그냥 간만 보고 물러난 건 아니었겠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겠다더군.”

“필요한 것?”

이어지는 차준혁의 대답은 모두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지구로 침입해 들어온 타락체를 탐지할 방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