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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한반도의 재해 지역을 늘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당연히 백두산 일대의 몬스터 학살 사건도 곧바로 파악했다.
“그거, 용우 씨가 한 거 맞죠?”
팀 크로노스의 CEO, 백원태가 용우를 찾아와서 물었다.
용우는 굳이 감추지 않았다.
“네.”
“그럴 것 같았습니다. 헌터 관리부는 난리가 났습니다.”
용우와 이비연은 정체를 감춘 채 백두산 일대의 몬스터들을 학살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둘 다 환영으로 관측기기에 촬영되는 용모를 바꿀 수 있고, 마력 패턴까지도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인류의 관측 수단으로는 두 사람의 정체를 특정할 수가 없다.
백원태가 물었다.
“왜 그런 겁니까?”
“기분 전환 삼아서요.”
“…….”
“진짜입니다. 비연이가 백두산에 가보고 싶어 했거든요.”
백원태는 멍청하니 용우를 바라보다가 박장대소했다.
박수까지 쳐가면서 한참을 웃은 그가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용우 씨가 말하니까 말이 되는군요.”
“그래도 나름 신경 쓴 겁니다. 백두산 일대야 몬스터를 학살하든 말든 별 영향이 없잖습니까?”
“그, 그렇긴 합니다만…….”
“앞으로 틈틈이 전 세계 재해 지역 좀 돌아다니면서 몬스터들 때려잡을 겁니다. 이번처럼 다 없애 버리진 않더라도.”
“음? 팀 섀도우리스 활동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말입니까?”
“네.”
“이유가 있는 겁니까?”
“마력석을 수급해야 되서 그럽니다.”
그 말에 백원태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벌어들인 걸로 모자라는 겁니까?”
“지난번에 전투 한 번 치르면서 10톤 정도 썼습니다.”
“…….”
백원태가 입을 쩍 벌렸다. 국제적 대기업인 크로노스 그룹을 부인과 나눠서 지배하는 그로서도 경악을 금치 못할 스케일이었다.
과거의 원자력 발전소 시대의 플루토늄보다도 비싼 거래가를 자랑하는 마력석은 그램 단위로만 투입해도 상온 핵융합을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의 에너지 자원이다. 그런데 그걸 전투 한번 치르면서 톤 단위로 써대다니…….
“마음 같아서는 인류의 마력석 총생산량을 저한테 몰아달라고 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백 사장님, 저한테 물건 좀 사시죠.”
“뭡니까?”
“고등급 몬스터 사체요. 8등급 가이아 드래곤 포함입니다.”
“대금 지불은 마력석으로 하고 말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크로노스 그룹의 마력석 재고를 탈탈 털어보죠.”
백원태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시원한 태도라 용우가 놀랐을 정도였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상식적으로는 안 됩니다만… 인류를 위해서 필요한 거잖습니까?”
용우가 적들을 막지 못하면 모든 게 끝이다. 용우가 등장한 후로 급물살을 타고 있는 사태는 이미 인류가 구축한 방위 시스템의 발전 속도를 훨씬 뛰어넘어 버렸다.
백원태는 그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용우 씨가 마음만 먹으면 지구상에서 재해 지역은 사라지겠군요.”
“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무의미하고.”
팀 섀도우리스의 전력이라면 시간만 주어지면 충분히 전 세계 모든 재해 지역을 청소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지금의 인류는 그렇게 청소한 지역을 지키지 못한다. 게이트 재해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백원태가 말했다.
“그 후의 일도 문제겠죠. 용우 씨는 모든 게 끝난 다음의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전쟁 가능성에 대해서 말입니까?”
“예.”
용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생각해 볼 여유가 없는 문제였다. 인류는 닥쳐오는 게이트 재해와 싸우는 것만으로도 필사적이었고, 이 모든 일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백원태는 그 이후의 일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용우가 패하면 지구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하지만 이긴다면 인류는 게이트 재해를 해결한 이후의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
“중국, 영국, 아프리카…….”
9등급 몬스터가 자리 잡은 재앙의 땅이 공백 지대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게이트 재해가 사라진 후라면, 그런 땅들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제가 어쩔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용우 씨라면 막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느 정도는. 그리고 그 어느 정도의 일은 할 겁니다. 제가 살고 있는 세상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죠.”
용우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인류의 신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
용우가 딱 잘라 말하자 백원태는 말문이 막혔다.
인류의 신.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위험성을 단번에 구체화시켜 주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운명이 한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승리함으로써 인류를 구할 수 있지만, 그렇게 구한 후에는…….
‘정말로 신이 될 수 있겠지.’
구세록의 계약자 1세대만 해도 암중에서 세계를 좌우하는 왕 같은 존재들이었다. 하물며 그들보다 훨씬 강대한 힘을 지닌 용우라면 정말로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게 제게도, 인류에게 있어서도 좋은 일일 겁니다.”
* * *
용우는 재해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몬스터를 잡기로 한 이유를 백원태에게 ‘전부’ 말해주지는 않았다.
마력석 수급이 중요한 이유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또 한 가지, 정말로 중요한 이유가 생겨 버렸다.
‘놈들이 머리를 낮추기 시작했어.’
용우가 너무 아프게 때려서 그런가, 종말의 군단은 신중한 우회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오만하게 대가리 쳐들고 있을 때야 쉬웠지만 이제부터는 진흙탕 싸움이 되겠지. 더 상황이 지저분해지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해.’
용우는 혀를 차며 하던 일에 집중했다.
지구로 귀환한 후로, 용우는 봉인을 여러 차례 썼지만 성공 사례는 별로 없었다. 성좌의 무기나 아티팩트를 봉인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적을 봉인하는 시도는 늘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비연을 되살렸던 지하의 비밀 공간에서 용우는 봉인으로 확보한 타락체와 지휘관 개체를 대상으로 은밀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문득 그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미술 학원은 어땠어?”
“재미있었어. 이런 걸 그렸다?”
오늘부터 미술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비연이 짠, 하고 스케치북을 펼쳐 보였다. 연필 스케치로 그린 사과와 바나나의 정물화였는데 오늘 처음 배우러 가서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그림이었다.
“오빠 말대로였어.”
일반인은 1밀리미터보다 좁은 폭을 인식해서 짚는 것을 묘기로 생각한다. 하지만 용우나 이비연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의 감각은 빠르고, 세밀하고, 광활했다. 또한 그들의 몸은 그 감각만큼이나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그렇기에 단순히 무언가를 보고 그리는 것에 있어서는 일반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인 테크닉만 익히고 나면 깜짝 놀랄 정도로 정밀한 초상화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비연이 물었다.
“실험은 어떻게 됐어?”
“반은 성공, 반은 실패.”
어깨를 으쓱하는 용우의 앞에는 3등급 몬스터인 오우거의 거체가 쓰러져 있었다. 용우는 그 심장에 꽂혀 있는 볼더의 창을 뽑아내며 말했다.
“역시 네가 특수한 경우였어. 타락체를 되돌릴 여지는 없다.”
용우는 사로잡은 타락체들을 봉인함으로써 두 가지를 실험했다.
첫 번째는 봉인이 성공하면 그들의 활동 한계를 무시하고 붙잡아둘 수 있는가?
그럴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볼더의 창에 타락체의 영혼을 담으면 이비연처럼 구하는 게 가능한가?
이건 애당초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 불가능했다.
“왜 너만 원래의 인격이 살아남았을까?”
용우가 아는 한 오로지 이비연만이 타락체가 되고 나서도 그 전의 인격이 남아 있었다.
이비연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도 오랫동안 생각한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표백에 얼마나 저항했느냐의 문제일걸.”
“오래 저항했기 때문이다?”
“오래 저항할수록 많은 것이 남을 거야. 보면 타락체가 되기 전의 습관 같은 게 남아 있는 놈들이 있었거든. 담배를 피운다거나, 의미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거나…….”
표백에 오래 저항할수록 표백 작업이 깔끔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비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네가 오래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력이 강하기 때문이겠지. 그때까지 나보다 마력 강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군단의 타락체 중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고.”
“그게 전제 조건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지 않나?”
“그리고 집념. 타락체가 되기 싫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소중하다, 그런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
“정신론인가. 여전히 부족해.”
“거기에 내 특성까지 더해본다면?”
“결계가 최후의 저지선으로 작용했다……. 그럴 수 있겠군.”
이비연은 ‘광휘의 세계수’ 같은, 종말급 스펠에 해당하는 결계를 펼칠 수 있는 존재다. 결계에 관해서는 어비스 최강이었고, 타락체 중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녀가 펼치는 결계는 다양하며, 그중에는 내면에 적용하는 것도 있다. 그런 결계가 표백으로부터 그녀의 자아를 지켜냈다면… 그럼 납득이 간다.
“이제부터 지구인이 타락체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어. 그게 군단이 전력을 보충하는 상투적인 수법이야.”
이비연이 말했다.
군단의 타락체 중 지구인의 수는 극히 적다. 이비연이 아는 한 스무 명이 안 될 정도다.
그에 비해 상아인 타락체나 암석인 타락체는 수가 상당히 많다.
그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구인 타락체는 전원 어비스 출신이지만, 상아인과 암석인은 군단이 제1세계, 제2세계와 전면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병력을 보충한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지구는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이 시점의 지구인들은 타락체로 만들기에는 너무 약하다. 그리고 아직까지 종말의 군단을 구속하는 행동 제약이 너무 강하다.
‘지구인들의 성장 속도를 기반으로 추측해 보면, 아마도 9세대나 10세대쯤에나 최저 조건을 만족시키겠지.’
어쨌거나 지구인 각성자들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각성자들의 마력 평균치, 최대치도 계속 상승세였고.
하지만 이제 군단은 그런 조건들을 무시할 것이다.
이비연이 말했다.
“무조건 타락체를 만들겠지.”
군단은 앞선 두 번의 전쟁에서 한 번도 겪지 못한 위기를 맞이했다. 군주를 둘이나 잃고, 열쇠마저 강탈당한 그들의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했을 것이다.
재해 지역을 이용, 타락체와 지구로 침투시키는 우회 전략을 이용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그들이 할 일은 뻔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정보가 필요할 테니까.”
지구의 정보를 수집하고자 할 것이다.
그들이 지구에 대해서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비연처럼 어비스 출신의 타락체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정보는 퍼스트 카타스트로피가 일어나기 전의 낡은 것들이다. 지구 문명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를 위한 참고 자료 이상이 될 수가 없다.
그들이 얻은 최신 자료는 지휘관 개체를 통해 인류와 교전하면서 얻은 자료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지구인 사이에 침투하거나 지구인을 타락체로 만들어서 정보를 얻을 거야. 그리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뭔가를 하겠지.”
“산업 시설을 파괴한다거나.”
“정부 인사를 죽인다거나.”
“헌터 기업을 테러한다거나…….”
당장 생각나는 것들만 해도 산더미 같았다.
용우가 물었다.
“놈들이 지구인을 타락체로 만든다면, 그놈들은 어떻게 되지?”
“똑같은 제약을 짊어지게 돼.”
“음?”
용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구에서 지구인이 타락체가 되어도, 지구에서의 활동에 제약이 발생한다고?”
“응. 군단의 일원이 되지.”
“…….”
그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구세록의 규칙은 생각보다 빡빡한 거였군…….”
“그리고 오빠도 알잖아? 타락체가 다른 누군가를 타락체로 만드는 건 상당히 까다로워. 안 그랬으면 어비스에서 최소한 천 단위의 타락체가 탄생했을걸.”
“취향의 문제 아니었나? 개개인의 취향이야 정말 필요하면 무시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 ‘취향’에는 자기가 타락체로 만들 수 있는 대상인가 아닌가라는 조건도 들어 있어.”
“마음에 드냐 아니냐의 문제만이 아니었던 건가?”
이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우가 말했다.
“그건 다행이지만… 어쨌든 골치 아픈 일이 늘어났군.”
“몽상가 문제도 대책이 안 나왔잖아?”
“그렇지.”
“어쩌려고?”
“어쩌긴.”
용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놈들이 때리면, 같이 때려줘야지. 놈들이 먼저 뒈질 때까지. 얼마 안 남았어.”
“…….”
즉, 아무 대책도 없다는 소리다. 이비연이 황당해하며 바라보자 용우가 피식 웃었다.
“물론 더 아프게 때려줄 방법은 찾았지.”
“뭔데?”
“타락체를 되돌리는 건 실패. 하지만 지휘관 개체를 이용한 실험은 성공했거든.”
용우가 지휘관 개체를 이용해서 실험한 것은 한 가지.
과연 빙의한 존재의 영혼을 빙의한 몸으로 끌고 올 수 있는가?
지금까지는 정신이 빙의한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뒀을 뿐이다. 하지만 영혼 그 자체를 본체에서 뽑아서 끌고 올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굳이 정보 세계로 가서 본체를 상대할 것도 없이 놈들을 죽일 수 있다.
“이제 놈들에게 떡밥을 던져줄 준비를 해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뜻밖의 일이 용우를 찾아왔다.
Chapter47 유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