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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변덕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그저 한 사람의 마음이 변할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큰일일 수 있지만 세상 전체로 보면 하찮은 사건으로 그쳐야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때로 한 사람의 변덕이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꾼다. 역사상 그런 일은 수도 없이 많이 있어왔다. 재력이나 권력 같은,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을 쥔 자들에 의해서.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일일 것이다.
개인의 폭력이 수천만 명의 운명을 뒤흔들었으니까.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폭력을 행사하는 자가 초인이기에 가능했다.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구축한 전쟁 기술을 초월하는 압도적인 폭력이 단 한 사람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굉음이 울려 퍼지며 한반도 최고봉, 백두산 정상이 뒤흔들렸다.
흙과 암석, 그리고 금속들이 모여서 형성되었던 거대한 용의 모습이 붕괴한다. 수십 미터의 거체를 이루고 있던 구성물들이 일제히 백두산 정상의 호수, 천지로 떨어지면서 물보라가 일었다.
전투는 짧았다.
8등급 몬스터, 가이아 드래곤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에너지 코어를 파괴당하고 백두산 천지 안으로 침몰했다.
“8등급쯤 되니까 좀 손맛이 있네.”
산산이 부서져서 침몰하는 가이아 드래곤을 보며 이비연이 중얼거렸다. 가슴을 채웠던 답답함이 날아가 버린 듯 후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분은 좀 풀렸어?”
용우는 가이아 드래곤과의 전투에 나서지도 않았다. 이비연 혼자서, 아무런 장비도 없이 압살해 버렸다.
이비연이 헝클어진 단발머리를 손으로 슥슥 쓸면서 말했다.
“조금은? 기왕 나온 김에 이대로 9등급이라도 잡으러 가볼까?”
“그랬다간 곧바로 국제 정세가 카오스 상태가 될 테니까 이걸로 참아.”
세계 곳곳에 수십 마리도 더 포진해 있는 8등급 몬스터와 달리 9등급 몬스터는 희귀하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서, 사라지는 순간 인류 사회에 거대한 충격파를 던져주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재해 지역에서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건 생각해 볼 만한 일이군.”
그린란드나 아프리카처럼 아예 인류의 손에서 벗어나 버린 지역들이 있다. 이런 지역의 몬스터들을 사냥한다 해도 당장의 국제 정세에는 큰 영향은 없을 것이다.
“마력석은 다다익선이니까.”
“확실히 오빠는 마력석 소모량이 어마어마하니 그런 식으로라도 수급해 둘 필요가 있겠네.”
“뭘 나만 그런 것처럼 말하고 있냐? 너도 곧 같은 신세가 될 텐데.”
“난 오빠처럼 형상복원이나 분신 제작에 능하지 않은걸. 그렇게 엄청난 양을 써댈 일은 없을걸.”
“결계 스펠도 만만치 않게 마력석을 먹어댈 텐데?”
“음…….”
이비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진짜 특기는 전투 결계 스펠이다. 타락체로서 용우와 싸울 때 펼쳤던 ‘광휘의 세계수’가 이에 속하는 것으로,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면 어마어마한 마력을 잡아먹었다.
이비연이 말했다.
“근데 지난번에는 깜짝 놀랐어. 그 분신은 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 마력석 많이 때려 박는다고 그런 분신이 나오는 게 말이 돼?”
“불리하니까 말 돌리는 거 보게.”
“쩨쩨하게 물고 늘어지지 말고. 진짜 놀랐는걸?”
용우가 군단으로부터 열쇠를 훔쳐올 때 투입했던 분신의 완성도에 이비연도 깜짝 놀랐다. 어비스에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네가 그렇게 되던 시점까지는 불가능했지. 그 후에 브랜든을 죽여서일 거야.”
“돌 마스터(Doll Master)?”
브랜든이라는 남자는 ‘돌 마스터’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남자였다. 마력을 이용해서 분신이나 자율형 전투 인형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왜 아마도야?”
“그때 브랜든만 죽인 게 아니었거든. 브랜든을 죽인 날 내가 죽인 것만 열아홉 명이었으니까.”
용우가 담담하게 말하자 이비연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다가 용우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한번 보고 싶네.”
“뭘?”
“마지막에 오빠가 어떤 존재가 되었던 건지.”
어비스 최후의 생존자는 과연 어떤 경지에 도달했던 것일까.
이비연은 아직 그 답을 모른다. 답을 아는 것은 군단의 정보 세계에서 용우에게 죽은 자들뿐.
“재촉할 필요 없어. 조만간 보게 될 테니까.”
“엄청 기대돼. 지금의 오빠를 봐서는 상상하기 힘드니까.”
용우의 마력은 현대 기술과 자본의 힘으로 꾸준히 회복되고 있었다.
현 시점의 마력은 페이즈25. 그것은 6등급 몬스터, 그중에서도 7등급 몬스터의 기준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못하는 수준이다.
누가 봐도 인류의 규격을 초월한 힘이었지만, 이비연이 보기에는 골골대는 병자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어비스에서의 용우가 어땠는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문득 이비연이 눈을 빛냈다.
“오빠, 혹시 눈치챘어?”
“네가 가이아 드래곤을 두들겨 패기 시작할 때부터.”
“역시.”
이비연이 날카롭게 웃었다.
꽈광!
직후 백두산 정상 한쪽이 터져 나갔다.
“큭……!”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흐릿한 실루엣이 꺼지듯이 사라진다.
“꿈이 너무 커.”
이비연이 차갑게 웃으며 스펠을 발했다.
-공허문지기!
텔레포트로 사라졌던 누군가가 텔레포트하기 전에 있었던 자리로 다시 끌려왔다.
퍼엉!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뛰어든 용우의 발차기가 그를 걷어찼다.
“이런.”
용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완벽한 기습으로 날린 발차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파지지지직!
허공장이 서로 충돌하면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 반동으로 용우가 튕겨 나갔다.
“꽤 터프한 놈이군.”
“파리보다 가벼운 공격이군.”
상대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언어는 지구상의 것이 아니다. 텔레파시가 아니었다면 알아들을 수 없는 이계의 언어였다.
검푸른 암석을 울퉁불퉁하게 깎아놓은 것 같은 피부를 지닌 존재, 암석인이었다.
타락체 특유의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암석인이 마력을 전개한다.
구구구구구!
8등급 몬스터를 능가하는 마력이 전개되면서 백두산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죽어라.”
암석인이 싸늘하게 쏘아붙이며 스펠을 발했다.
-염동빙결탄 동시다발!
극저온의 한기를 농축한 에너지탄 16발이 이비연을 향해 쏘아졌다.
퍼퍼퍼퍼펑!
한기가 연달아 폭발하면서 주변이 얼어붙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견제였다. 이비연의 움직임을 막으면서 동시에 용우를 끝장내기 위해서 뛰어들었다.
투아아아아앙!
충격이 폭발했다.
“크억……!”
그리고 암석인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빠, 망신살 뻗쳤잖아. 갚아줄 생각도 안 해?”
이비연이 암석인을 덮쳐서 찍어 눌렀다. 그녀의 손이 암석인의 등짝을 뚫고 그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암석인의 마력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승부가 났다. 정면 대결을 했다면 좀 더 버텼겠지만 잔재주를 부리다가 기습을 당하는 바람에 단번에 승패가 갈린 것이다.
용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잘 싸우는 너를 놔두고 내가 열심히 할 필요 없잖아?”
“말이나 못하면.”
이비연이 혀를 찼다.
콰광!
다음 순간, 암석인이 더욱 깊숙이 땅에 처박혔다.
심장을 움켜잡힌 채로도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비연에게 차단당한 것이다.
“너는… 대체 뭐냐? 정보에는 없었는데…….”
암석인이 헐떡이며 물었다.
이비연이 웃었다.
“그러게. 우리 정보에는 없었는데… 여기서 타락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용우와 그녀는 환영으로 얼굴을 바꾸고 있다. 마력 패턴도 바꾸고 있다.
백두산 일대, 재해 지역은 늘 모니터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위성이나 고고도 정찰기를 비롯한 관측 수단들을 신경 쓴 조치였는데, 쥐새끼처럼 지구에 침입해 온 타락체 상대로도 잘 먹히고 있었다.
‘이건 운이 좋았군.’
자칫하면 군단에 이비연의 생존 정보를 넘겨줄 뻔했다.
그렇게 생각한 용우가 이비연에게 말했다.
“그 녀석, 봉인해 둬.”
“죽이는 게 아니고?”
이비연이 의아해하자 용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쓸데가 있어. 어차피 타락체를 몇 놈쯤 사로잡고 싶었는데 잘됐군.”
“또 무슨 꿍꿍이속이람. 오빠, 너무 음흉한 거 아냐?”
“아직 전투 안 끝났잖아. 이따가 설명해 줄게.”
“그런데 오빠는 뭐 하려고?”
“쥐새끼가 또 있어.”
“음? 안 보이는데?”
이비연의 감각에는 걸리는 게 없었다.
“꽤 멀리 있어. 그리고 꽤나 철저하게 숨어 있군.”
용우는 관측자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이비연보다 감각이 날카로워서가 아니다. 관측자가 용우에게 악의를 갖고 있기에, 악의를 통찰하는 능력이 발동한 것이다.
“오빠 혼자서 괜찮겠어?”
“그런 걱정도 오랜만에 받아보는데?”
용우는 피식 웃고는 텔레포트했다.
그리고 목표 지점에 나타나자마자 아공간에서 대(對)몬스터 저격총, 제우스의 뇌격을 꺼내서 전방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염동뇌격탄(念動雷擊彈)!
극초음속으로 쏘아져 나간 에너지탄이 표적에 작렬했다.
“크악!”
허공장이 뚫린 적이 비명을 질렀다.
백발의 상아인 타락체였다.
“으으윽…….”
쓰러진 채로 용우를 바라보는 상아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마력은 용우보다 위였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기습이었다고는 하지만 정면에서 가한 일격에 허공장이 뚫려 버리다니?
물론 그것은 인류가 게이트 재해에 맞서기 위해 개발해 낸 무기, 증폭 탄두의 힘이다. 위력과 탄속이 몇 배로 증폭된 에너지탄은 마력 면에서 우위에 있는 적의 허공장을 멋지게 뚫어버렸다.
“숨어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군.”
그 앞으로 용우가 걸어왔다.
거대한 일루전 큐브가 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또한 일루전 큐브 안쪽의 마력을 감추는 결계가 펼쳐져 있어서 인류의 관측 수단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사각지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안의 풍경은 기괴했다.
대형 몬스터들의 시체들을 재료 삼아서 만든 건물들이 있었다. 실용적인 의미에서의 건축물이라기보다는 현대 미술의 산물이 아닐까 의심되는 모양새다.
‘뭐지, 이건?’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건축물들이었다. 뼈와 가죽을 얽어서 쌓아 올린 기울어진 탑들이 둥글게 배치되어 있고 그 안쪽 공간에는 일곱 개의 빛 덩어리가 떠 있었다.
‘마력석? 아니, 뭔가 좀 다른데…….’
용우가 그쪽으로 다가갈 때였다.
콰콰콰쾅!
사방에서 에너지탄이 날아들어서 그를 강타했다.
-리스토어 힐.
그사이 상아인은 치료 스펠로 스스로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괜찮은가?>
휴머노이드 몬스터, 오우거가 나타나서 물었다.
지휘관 개체였다. 지휘관 개체는 단 하나의 스펠만을 보유했고 그것은 텔레파시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계 안쪽에는 텔레파시 채널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상아인이 스스로에게 방어 스펠을 걸면서 말했다.
“내가 놈을 상대할 테니 그동안 코어를 파괴해라.”
<알겠다.>
지휘관 개체는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늑대 인간과 리자드맨, 트롤과 숲거인 등 휴머노이드 몬스터가 여럿 있었다.
“재미있는 집회로군.”
폭발 속에서 용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우우우우!
마력 파동이 활화산 같은 기세로 퍼져 나가면서 광풍이 휘몰아쳤다.
파악!
그리고 섬광이 상아인을 가르고 지나갔다.
“어……?”
상아인이 눈을 크게 떴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기습당한 것 때문에 허공장도 최대 출력으로 활성화시키고, 방어 스펠까지 겹겹이 걸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고 그의 몸통을 갈라 버리다니?
“네, 네놈은…….”
상아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곳에는 검은 바탕에 테두리와 칼날 부분은 LED와 비슷한 느낌의 청록색을 발하는 양손대검을 든 용우가 서 있었다.
성좌의 무기 세 개와 군주 코어 두 개를 하나로 융합시킨 궁극의 무기, 트리니티.
이 검을 쥠으로써 마력이 폭증한 용우가 일격에 상아인 타락체를 쓰러뜨린 것이다.
-봉인!
용우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상아인에게 봉인을 걸었다.
상아인은 자신을 감싸는 빛의 정체를 깨닫고 절규했지만 무의미했다. 트리니티를 쥔 용우의 힘은 그를 아득히 능가했고, 사경을 헤매는 그는 봉인에 저항할 수도 없었다.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걸. 이런 식으로 실험체를 다수 확보할 줄이야.”
용우는 트리니티를 땅에 꽂은 채로 휴머노이드 몬스터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죽어라!>
지휘관 개체들이 일제히 에너지탄을 쏟아내었다.
용우는 그 에너지탄이 자신을 겨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휘관 개체들은 이 결계의 중심에 있는 일곱 개의 빛 덩어리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었다.
퍼퍼퍼퍼펑!
초음속으로 발사된 에너지탄들이 폭발했다.
“될 것 같냐?”
흙먼지 속에서 용우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용우가 허공장을 확장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탄들은 표적에 흠집도 내지 못했다. 지휘관 개체의 마력은 4등급 몬스터 수준에 불과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군. 이탈한다.>
오우거에 빙의한 지휘관 개체가 말했다.
다른 지휘관 개체들은 즉시 그 말에 따라서 빙의를 풀고 이탈하려고 했다.
“진짜 될 줄 알았나 보구나, 너희들.”
다시금 용우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뭐, 뭐야?>
<빙의가 해제되지 않는다!>
지휘관 개체들이 당황했다.
후우우우!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흙먼지를 걷어냈다.
그리고 트리니티를 든 용우가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내가 분명 네놈들한테 게임 감각으로 노는 건 이제 끝이라고 말해줬을 텐데, 말귀를 못 알아들었나 보군. 정보 전달이 안 됐나?”
씩 웃는 용우를 보면서 지휘관 개체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상상도 못 한 공포가 그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