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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우의 분신은 자율성을 가진 존재였다.
또한 용우와 연결된 존재이기도 하다. 분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은 모두 본체에게 전달된다.
분신은 그 전제 조건을 이해한 채로 행동하고 있었다.
‘얼마든지 당해주지.’
비장의 패를 가진 것은 라지알만이 아니다. 용우 역시 라지알의 허를 찌를 기술을 몇 개나 가졌다.
그러나 분신은 굳이 그것을 쓰지 않았다. 그는 라지알에게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인류지. 그러는 너는 정체가 뭐지? 제1세계의 초월권족?”
“역시 대화는 어려운 거야.”
한숨을 쉰 라지알의 몸이 푸른 기운으로 뒤덮이면서 마력이 한 차원 더 격상했다.
그것을 본 용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아직도 여력을 남기고 있었군.’
아마 저것조차도 전력은 아닐 것이다.
투콱!
서로의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자세를 바꾼 라지알의 발차기가 용우의 몸통에 꽂혔다.
쾅!
하지만 그 순간 용우가 발한 스펠이 라지알을 강타한다.
휘청거리며 밀려나는 라지알에게 용우가 검격을 내려쳤다.
콰아아앙!
그러나 라지알은 자세가 무너진 채로도 그 공격을 받아내고 반격했다.
파파파파파파!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연타를 막고, 흘리고, 일부는 맞아주면서 용우에게 파고들었다.
꽈광!
대기가 폭발하면서 용우가 튕겨 나갔다.
“보기보다 무식한 놈이군.”
옷이 너덜너덜해진 용우가 짜증을 냈다.
라지알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야 할 이유가 뭐지?”
고도의 공방이었다. 막강한 마력을 지닌 둘이 텔레파시로 서로의 감각을 현혹하면서 시공간의 연속성을 초월한 현묘한 격투를 벌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라지알이 기교의 극한으로 치닫는 싸움의 흐름을 거부했다.
‘때릴 테면 때려봐라. 난 무시하고 쳐들어가서 너를 패주마.’
그런 마인드로 중전차처럼 파고들어서 용우의 현란한 기술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슬슬 한계겠지?”
라지알의 마력이 용우를 압도하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용우의 마력이 감소하고 있었다.
라지알이 보기에는 당연한 결과였다.
용우는 수천의 언데드들을 상대로 치고받았고, 그들의 지원을 받는 뇌전의 에우라스의 빙의체와 싸웠다. 그리고 그 직후에 쉴 틈도 없이 라지알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일대일로 싸우는 것 같아도 사실은 혼자서 수천을 감당해 내고 있는 상황이다. 언데드 병력의 견제 때문에 용우의 마력 소모량은 어마어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네가 겪게 될 일을 알려주마.”
라지알이 한 걸음 다가섰다.
“난 널 죽이지 않을 거야. 넌 숨이 붙은 채로 기둥을 보관하는 그릇이 되어줘야 하니까. 우리에게 더 이상 네가 필요하지 않게 될 때까지.”
“그래?”
용우가 히죽 웃었다.
“이거 어쩌지? 나는 이제 너희들이 필요 없는데?”
“뭐?”
라지알이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우우우우우우!
하늘이 진동했다.
“뭐야?”
라지알이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용우가 뛰어들었다.
콰아아아앙!
용우와 라지알의 검이 서로 부딪치면서 주변이 뒤흔들린다.
라지알이 다급해졌다.
“양동작전이었나?”
“양동작전이라…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군.”
주인 없는 왕궁, 그 바로 아래쪽에서 거대한 힘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라지알도 위기감을 느낄 정도의 힘이!
거대한 광륜이 퍼져 나갔다가 한 지점으로 급속도로 수축하면서…….
-유성의 화살!
빛의 탄환이 음속의 수십 배에 달하는 속도로 발사되었다.
‘피할 수 없다.’
라지알은 발사 직전에 직감했다. 피해 없이 넘길 수 있는 국면이 아니었다. 라지알은 있는 힘을 다해 용우를 튕겨내며 옆으로 뛰었다.
콰아아아앙!
일직선으로 내리꽂힌 섬광이 폭발했다.
“으윽……!”
아슬아슬하게 직격을 피한 라지알이 비틀거렸다.
그의 한쪽 팔이 반쯤 뜯겨 나가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놈들이!”
반쯤 노는 기분으로 싸우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라지알의 붉은 눈동자가 분노로 타오르며, 중상을 입은 팔이 시간을 되돌리듯 회복되어 갔다.
텅.
그런 그의 앞에서 얼음을 깎아 만든 것처럼 보이는 양손 대검이 땅에 떨어져서 튕긴다.
“뭐야?”
라지알의 눈이 크게 떠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것처럼.
“기둥을 버리고 빠져나갔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양손 대검, 성좌의 무기 빙설의 창을 쥐고 있던 용우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질세계에서 정보 세계로 진입해 온 자가 빠져나가는 것에는 나름의 과정이 필요하다. 한순간에 꺼지듯이 사라져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용우는 그렇게 사라졌다.
“설마…….”
라지알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용우가 내버리고 간 양손 대검을 잡았다.
파지지지직!
격렬한 반발력이 일어났다. 성좌의 무기다운 반응이다.
하지만 라지알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
반발력이 약했다. 어렵지 않게 억누를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 반발력을 버티지 못한 양손 대검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가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가짜…….”
뇌전의 에우라스도, 라지알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였다.
“저격자는 어떻게 되었지?”
라지알이 언데드 지휘관에게 물었다.
저격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고위 언데드들이 그를 붙잡기 위해 하늘로 올라갔던 것이다.
콰쾅!
마치 그 물음에 대답하듯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져서 건물에 충돌했다.
충격으로 산산조각 난 것은 새카맣게 타버린 해골 기사였다.
“…도망쳤군.”
라지알은 이를 갈며 주인 없는 왕궁으로 날아올랐다.
저격자는 이미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그곳에 남은 마력의 흔적은 라지알에게 뼈아픈 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모든 게 가짜였다.’
그와 싸운 서용우는 분신이었다. 그렇기에 본체가 분신을 해제하는 것만으로 꺼지듯이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토록 정교하고 강력한 분신을 만들 수 있는지는 모른다. 라지알조차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분신 만들기에 특화된 능력? 아니면 우리가 아는 분신 스펠이 아닌 다른 기술이 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라지알은 지금 그런 수수께끼에 골몰할 때가 아님을 떠올렸다.
그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주인 없는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군.”
그 최하층에 보관되어 있던 것들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모두 잘 들어.”
라지알은 군주 전원에게 말했다.
“놈이 열쇠를 훔쳐갔다, 일곱 개 모두.”
군단이 엄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보물, 구세록의 계약자들이 그 힘을 그들의 정보세계에서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일곱 개의 열쇠를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 * *
필리핀의 45미터급 게이트 제압 작전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팀 섀도우리스는 휴식을 갖는 대신 곧바로 전략 미팅을 가졌다.
“이걸로 놈들이 지휘관 개체 투입을 망설이게 될까?”
“단기적으로는 그럴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아니겠지요.”
브리짓이 의견을 냈다. 모두의 시선이 향하자 그녀가 설명했다.
“군주와 달리 지휘관 개체는 함정을 위한 버림패로 쓰지 않겠어요?”
종말의 군단에 있어서 군주가 당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타격이다. 인간이 왕정 사회를 이루고 있던 때의 군주와 달리, 그들의 군주는 다른 누군가로 대체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건 좀 의외였지.’
용우는 당연히 군단이 군주 개체를 계속 투입해서 함정을 팔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군단은 그러는 대신 몸을 사리는 쪽을 택했다.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이해한 것은 이비연에게 정보를 들은 후였다.
종말의 군단은 죽은 자들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처럼 성장하지도, 노화하지도, 그리고 새로 태어나지도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언젠가의 존재들이 전쟁 속에서 죽어갈 뿐이다.
의외로 군단은 새로운 언데드를 늘릴 수가 없었다. 죽은 자를 전장에서 쓸 도구로 일으켜 세울 수는 있지만 자신들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타락체가 탄생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군단의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하긴, 지휘관 개체를 통해서 특정한 장소로 끌어내는 거야 충분히 할 만하겠지.”
“그럼 이번 작전도 단기적인 효과 이상은 무리라는 거군요.”
“그건 아니야.”
브리짓의 말에 용우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놈들은 또 방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이번 작전은 더 큰 한 방을 위한 포석에 불과했다. 용우의 머릿속에는 이미 군단을 엿 먹일 계획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전원이 놈들의 본거지에서 난동을 부릴 수 있지.”
용우가 아공간에서 이번 작전의 전리품을 꺼내 놓았다.
“아티팩트…….”
리사가 중얼거렸다.
용우가 꺼낸 일곱 개의 전리품은 그들이 가진 아티팩트와 흡사한 느낌을 주었다. 각기 다른 색도, 질감도 아티팩트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형태는 아티팩트와 달랐다. 일곱 개 모두 똑같은 장검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형상변화로 똑같이 통일시킨 건 아닌 것 같고… 놈들이 성좌의 힘을 쓰지 않기 때문인 것 같군.”
아티팩트는 그 근본이 되는 성좌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종말의 군단이 보관하고 있던 ‘열쇠’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브리짓이 물었다.
“이게 있으면 우리도 놈들의 본거지에서 날뛸 수 있는 건가요?”
“그럴 거야. 다만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빙설의 하스라가 아티팩트 빙설의 창을 열쇠로 삼아서 강림했을 때, 그는 분명 강했지만 본신에 비하면 힘과 권능 모두 현격히 열화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쳐들어갈 때도 똑같은 제약을 받지 않겠는가?
브리짓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별로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어느 정도로 약화될지는 모르겠지만, 제로 당신과 연결된 세 사람보다 못할 것 같은데…….”
아티팩트 보유자인 리사, 유현애, 이미나는 마력만으로는 1세대 구세록의 계약자들과 대등한 수준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군단의 정보 세계로 가도 지구에서와 똑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
2세대 구세록의 계약자인 브리짓과 차준혁은 마력 면에서 그녀들보다 우위였다. 그러나 마력이 제한된다면 오히려 그녀들보다 못하게 될 것이다.
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이걸 보고 있자니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어.”
“재미있는 생각?”
“그걸 말하기 전에 설명해야 할 게 있는데, 성좌의 무기는 종말의 군주 그 자체와 대응하는 게 아니야.”
“음? 그건 무슨 뜻입니까?”
브리짓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종말의 군주와 대응하는 것은 성좌의 무기를 지닌 존재, 즉 구세록의 계약자다.”
따라서 성좌의 무기와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군주라는 존재가 아닌, 그들의 근원이 되는 코어지.”
군주의 코어를 파괴하면 군주의 자아도 파괴된다. 그것은 군주라 불리던 존재의 죽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군주의 코어는 사라지지 않았지.”
군주의 코어가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다.
몬스터도, 언데드도 죽으면 코어를 남긴다. 하지만 파괴된 코어는 마력석으로 변해 버린다.
하지만 군주의 코어만은 그렇지 않았다. 깨진 파편일지언정 온전한 코어일 때와 동일한 성질을 유지하고 있었다.
“복원할 수 있었고, 복원한 후에는 단순한 도구로 전락했어.”
용우가 복원한 하스라 코어와 볼더 코어는 부서지기 전과 비교하면 약화되었다. 부서졌다 복원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손실이 발생한 것이리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복원이 가능했다는 것, 그리고 복원한 후에는 의지가 거세된 단순한 도구로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코어들은 성좌의 무기들과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고 융합하는 것까지도 가능했지.”
그 결과 용우는 성좌의 무기 세 개를 하나로 합친 공전절후(空前絕後)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제 내가 무슨 이야길 하고 싶은지 알겠지?”
“이 열쇠들과 아티팩트들 역시 그렇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군요.”
브리짓이 미소 지었다. 그녀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Chapter46 사소하지만 거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