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구구구……!
하늘이 진동한다.
꽈르릉! 꽈광!
뇌전이 하늘을 찢어발기며 지상으로 내리꽂힌다.
그리고 그 뇌전에 맞은 해골 병사 하나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온몸이 뇌전 그 자체로 이루어진 모습으로.
‘빙의는 세계를 뛰어넘을 때만 쓰는 게 아니었군.’
용우는 흥미로 눈을 빛냈다.
불꽃의 볼더와 싸웠을 때, 광휘의 데바나가 그 세계에 자신을 투영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때와의 차이점이라면 투영된 군주를 담을 그릇이 존재한다는 것뿐.
그리고 그 한 가지가 결과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뇌전의 에우라스.’
지구에서 군주 개체로 만나본 적이 있는 놈이었다. 물론 지금의 그와는 완전히 별격의 존재겠지만.
‘온 것은 한 놈. 하지만 전원이 보고 있다.’
용우는 하늘에 드리워진 군주들의 존재감을 느꼈다.
나선 것은 에우라스 하나. 하지만 군주 전원이 스스로를 투영해서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경계하고 있는 건가?’
섣불리 나섰다가 전혀 상상치 못한 방법으로 허를 찔리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이미 하스라와 볼더가 그렇게 당했으니까.
‘내게는 좋은 일이지. 어쨌든 서둘러야겠군.’
용우는 상황을 관찰하면서도 멈춰서 있지 않았다.
아무도 없이 텅 빈, 그럼에도 수백 명의 전문가가 관리하는 것처럼 화려하고 깔끔한 궁전 안을 고속으로 탐색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쓸데없이 복잡해.’
용우는 짜증을 냈다. 주인 없는 왕궁은 넓고, 복잡해서 길을 찾기 쉽지 않았다.
성질 같아서는 그냥 다 때려 부수면서 목적지까지 일직선으로 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일일이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거드름 피우기를 좋아하는 놈들은 좋아.’
지상의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수하의 몸으로 강림한 에우라스가 용우의 분신을 상대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고 있기 때문이었다. 용우 입장에서는 시간을 끌어주니 고마울 따름인지라 적당한 말로 상대해 주고 있었다.
‘아, 성질 급한 놈이군. 조금만 더 나불거려 줄 것이지.’
용우가 혀를 찼다.
뇌전의 에우라스는 그리 참을성이 깊은 성품이 아니었다. 게이트 안에서 봤을 때처럼 폭급해서 신경을 좀 긁으니 곧바로 폭발했다.
‘내 분신 대 군주의 빙의체라… 어떻게 될까?’
결과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용우는 싸움이 끝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인 없는 왕궁의 최하층에.
‘정말로 있었군.’
그곳에 들어선 용우는 찾던 것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 * *
뇌전의 에우라스는 강대한 권능의 소유자였다.
꽈르릉! 꽈과과과과광!
뇌전이 폭풍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모든 것이 빛에 휘감겨서 울부짖고 있었다.
파악!
그러나 어느 순간, 뇌전의 격류가 거짓말처럼 끊어진다.
그리고 초고밀도의 에너지 칼날이 수십 미터나 뻗어나가면서 에우라스의 몸을 베고 지나갔다.
<버러지가 감히!>
에우라스가 노성을 질렀다.
용우가 웃었다.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나를 웃기려고 준비한 건 아니겠지? 너희들은 뭐든지 쌍방에 적용시켜야 직성이 풀리나?”
<이노오오오오옴!>
언데드 군단이 지속적으로 안티 텔레포트 필드를 펼치고 있었다. 그 결과 용우와 에우라스 둘 모두 공간 간섭계 스펠을 봉쇄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까지는 좋다. 언데드 군단은 동시에 에우라스에게 온갖 지원을 하고 있었으니까.
갖가지 방어 스펠, 강화 스펠, 가속 스펠을 걸어주고 그가 이용하기 좋도록 지속적으로 뇌격계 스펠을 터뜨려 주고 있었다.
또한 용우가 스펠을 쓸 때마다 그에 대응하는 스펠을 걸어서 용우의 전투 능력을 둔화시키고 있었다.
더없이 에우라스에게 유리한 판을 깔아준 것이다. 그런데도…….
쿠과광!
에우라스의 뇌전을 비껴내며 파고든 용우의 발차기가 그가 디디고 있던 지면을 뒤집었다.
쾅!
그리고 양손 대검에서 뻗어나간 에너지 칼날이 그를 쳐서 날려 버렸다.
<크아아아아아!>
에우라스가 격노했다.
문제는 바로 이 장소에 있었다.
왕의 섬을 보호하는 힘은 일정 규모 이상의 파괴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군단의 적인 용우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군단에게도, 심지어 군주인 에우라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었다.
용우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의 섬, 주인 없는 왕궁, 비어 있는 옥좌.’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곳은 왕의 영지다.
그리고 군단에는 왕이 없다.
-염마용참격(炎摩龍斬擊)!
섬전처럼 휘둘러진 양손 대검이 에우라스를 가르고 지나갔다.
<카, 아악……!>
분신체와 빙의체의 싸움은 분신체의 승리로 끝났다.
해골 병사에게 빙의한 에우라스는 강했다. 게이트 안에 강림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러나 하스라나 볼더의 본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약했다.
“시끄럽게 짖어대지 마라, 겁쟁이 주제에.”
용우는 경멸을 담아 쏘아붙였다.
호기롭게 나선 것 같았지만 에우라스도 사태를 지켜보기만 하는 다른 군주들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본신으로 나섰다가 무슨 일을 당할까 두려워서 빙의라는 소극적인 수단을 쓴 것이다.
수천의 병력을 등에 업었으니 승산이 있다고 보았을 터. 하지만 그 판단은 틀렸다.
“다음 도전자 없나?”
용우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군주들을 도발했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군주들은 더욱 경계심을 높이고 있었다.
에우라스가 패한 것은 몸을 사리며 빙의체로 싸웠기 때문이다. 본신으로 싸우면 군주 중 누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함정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군주들을 자기 앞으로 끌어내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가?
“군주라는 것들은 겁쟁이들뿐이군.”
용우가 더욱 노골적으로 도발할 때였다.
투학!
측면에서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그를 기습했다.
용우가 예상했다는 듯 방어하자 그 앞에 기습자가 섰다.
“제법이야, 군주 살해자.”
그렇게 말한 것은 챙 넓은 검은 모자를 쓴 상아인 청년이었다.
온통 언데드들만 가득한 이곳에서는 용우만큼이나 이질적으로 보이는 존재다. 용우는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라지알.’
타락체들의 정점에 서서 ‘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자.
제1세계의 초월권족 출신 타락체 라지알이었다.
* * *
누가 봐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적의 병력에 포위당한 상황에서 군주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가 나타나는 것.
그럼에도 용우는 여유 만만 했다.
“라지알.”
“나를 알고 있나?”
“글쎄.”
용우가 놀리듯이 대꾸하자 라지알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 가지만 묻지.”
“뭘?”
“네가 이비연을… 너희 세계의 옷을 입은 타락체 여자애를 죽였나?”
“글쎄.”
용우는 여전히 놀리듯이 대꾸했다.
이비연은 말했다.
‘라지알, 그 작자는 나를 소중한 수집품처럼 생각하고 있어.’
소모품으로 쓰려고 죽을 자리로 보내놓고, 살아 돌아오니 그때부터 애지중지하기 시작했다. 벙어리 공주라 불리며 대화가 불가능한 그녀를 앞에 두고 혼자 떠들어대는 것이 취미였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뒤틀린 소유욕을 엿볼 수 있었다.
“하긴, 원래 대화란 쉬운 일이 아니지.”
라지알이 피식 웃었다.
쾅!
둘이 서로 교차하면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서로 등진 채로 멈춰선 둘이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툭.
용우의 가면이 깨끗하게 쪼개져서 떨어졌다.
투둑…….
동시에 라지알의 모자가 찢겨서 떨어지면서 눈부신 금발이 흘러내렸다.
“아끼는 모자였는데.”
“그거 잘됐군.”
눈살을 찌푸리는 라지알에게 용우가 이죽거렸다.
라지알이 한숨을 쉬더니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온 거지?”
“설마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질문한 거냐?”
“당연히 예의상 물어본 거지.”
“머리가 나쁘군. 난 대답해 줄 건데.”
“…….”
라지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용우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너희들은 군주 개체만 문이 되는 줄 알고 있더라?”
그 말에 라지알은 곧바로 답을 깨달았다.
“…제3세계를 상대로는 일방통행은 없다, 그런 뜻이군.”
“대답이 되었지?”
용우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순순히 올바른 정보를 주었다. 애당초 이번 작전의 목적 중 하나는 군단이 지휘관 개체를 다루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럼 잠깐 타락체들의 두목 실력을 좀 봐줄까?”
“여유 부린 걸 후회하게 될 거다.”
“모자 망가져서 화났냐, 구세기 패셔니스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저열한 모욕이겠지. 그 입을 다물게 해주마, 버러지.”
다음 순간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꽈광!
그리고 폭음이 울려 퍼진다.
용우가 주춤하며 밀려났다. 그 앞에선 라지알의 모습이 변해 있었다.
왼팔에는 백은의 건틀릿이, 오른팔에는 황금의 건틀릿이 씌워져 있었다.
그리고 둘을 섞어놓은 것 같은 백금의 광채를 발하는 양손 대검이 나타났다.
‘세 개 모두 아티팩트급. 게다가 상승효과를 내고 있다.’
라지알이 장착한 장비에는 용우도 놀랐다. 저 셋은 마력 증폭이라는 기본 효과를 공유하며, 각기 다른 기능이 잠재된 아티팩트급 장비들이었다.
스스스스…….
라지알이 기묘한 움직임으로 대지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아지랑이 너머의 풍경처럼 흔들리면서 미세한 잔영을 남기는 움직임이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도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느슨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의 신형이 폭발적인 속도로 뛰어 들어온다.
용우는 즉시 요격했다.
후우우웅!
그리고 자신의 공격이 허공을 쳤다는 사실에 놀랐다.
꽝!
충격이 용우를 관통했다.
“큭……!”
용우가 신음했다. 왕의 섬에서 전투를 시작한 이래로 처음으로 나온 신음이었다.
그 앞에 선 라지알이 놀랐다.
‘이걸 막아?’
실전에서 비장의 수단이란 가장 처음 선보일 때 최고의 위력을 발휘한다.
그 대부분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한발 물러나서 그 실체를 파악하면 별것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존재를 모르고 있는 적에게는 필살의 위력을 발휘한다.
방금 전 라지알의 일격이 그랬다. 치명타를 먹일 생각으로 꺼내 든 비장의 패였던 것이다.
그런데 용우는 막아냈다.
‘얻어 걸린 건가? 운이 좋은 놈이군.’
라지알이 짜증을 냈다. 용우가 자신의 공격을 간파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 증거로 방어는 했으되 충격이 그를 관통했으니까.
‘설령 네놈이 하스라와 볼더를 정면 승부로 쓰러뜨렸다 해도, 결국은 내 손에 죽는다.’
어차피 전장 자체가 라지알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일대일 대결이었으되, 사실은 일대다의 대결이었으니까.
언데드 병력은 에우라스가 용우와 싸울 때와 같은 전법을 취하고 있다. 라지알에게 쉬지 않고 스펠을 보조하는 동시에 용우의 스펠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둘의 전투 능력에 크나큰 격차가 발생하고 만다.
꽈과과과과……!
폭음이 울려 퍼져 누군가의 귀에 닿기도 전에 연속적으로 충격이 폭발하면서 주변을 뒤집어놓는다.
허공장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공간이 뒤흔들리며 발생한 스파크가 반경 수백 미터를 흔들었다. 서로를 노리는 공격이 극초음속으로 쏘아져 나가서 충돌할 때마다 대지가 뒤집어지고 공간이 깨져 나간다.
-구전광(球電光)!
뇌전의 구체가 수십 발이나 연달아 폭발하면서 용우를 두들겨 댔다.
용우가 방어 스펠을 펼치자 뇌전이 그 표면을 미끄러져 간다. 그러나 그 순간 라지알이 기다렸다는 듯 스펠을 발동했다.
-에너지 컨버전!
주변을 가득 채운 뇌전이 순식간에 불꽃으로 변한다.
한순간에 몸을 감싼 방어 스펠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런데도 용우는 웃었다.
-화염포식자!
용우 역시 라지알의 수를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공에 나타난 광점들이 불꽃을 빨아들여 소멸시켰다.
사라지는 불꽃을 뚫고 용우와 라지알이 서로에게 뛰어들었다.
“확실히…….”
눈이 멀어버릴 듯한 섬광이 미쳐 날뛰고 폭음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진다.
그 한복판에서 용우와 라지알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놈보다는 잘하는군.”
용우는 볼을 스친 상처가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말했다.
“허세만은 제법이구나.”
라지알이 용우를 비웃었다.
시종일관 라지알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용우는 방어에 급급하다가 간간이 반격을 가하는 게 고작이었다.
숨을 고르는 용우에게 라지알이 뛰어들었다.
투쾅!
“크헉…….”
또다시 용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또 막았어?’
라지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까 전과는 또 다른 비장의 수법을 펼쳤다. 그런데 또 용우가 어설프게나마 막아낸 게 아닌가?
‘단순히 운인가? 아니면 뭔가가 더 있나?’
라지알은 용우의 능력을 의심했다.
예지능력자일 리는 없다. 수천에 달하는 언데드들이 모여서 예지능력을 봉쇄하는 텔레파시 공세를 날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예지능력자가 아니고서는 용우의 방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지알이 용우가 지닌 악의를 통찰하는 능력을 몰랐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능력은 어비스에서도 지극히 희귀한 능력이었고, 심지어 타락체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