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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군단의 본거지에는 ‘공장’이라 불리는 장소가 있었다.
그들이 지배하는 정보 세계의 끝, 명확히 정체가 규정된 정보가 모인 영역과 그 너머의 혼돈 사이의 경계.
그 혼돈은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이 그들의 영역으로 밀려와서 세계를 침식하고 있었다.
풀, 꽃, 나무, 들판…….
그렇게 명확한 이미지로 인식되는 세계의 구성물들이 혼돈에 침식되면 마치 기괴한 악몽처럼 변질되어 버린다.
정보 세계의 주민인 종말의 군단의 일원들은 물질세계의 주민들과 달리 존재가 시간에 풍화되어 노쇠할 일이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의 세계는 수명이 유한했고 그 원인 중 하나는 혼돈의 침식이었다.
타락체들의 우두머리, 라지알은 그 경계에 와 있었다.
“오늘은 생산성이 별로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라지알의 주변에는 무수한 괴물의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혼돈은 세계를 침식하여 괴물을 잉태한다.
당연히 종말의 군단은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이 괴물들을 격파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부산물이 탄생했다.
혼돈의 괴물들의 시체를 재료로 써서 침략용 생체 병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게이트라는 현상에 던져 넣기만 하면 아무런 제약 없이 물질세계로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존재.
지구에서는 그 존재들을 가리켜 ‘몬스터’라 부른다.
쿠구구구구…….
라지알이 이끄는 타락체 부대가 무수한 혼돈의 괴물을 쓰러뜨리다 보니 정보 세계를 침식하던 혼돈의 물결이 물러간다.
오늘의 전투, 혹은 몬스터 생산을 끝낸 라지알이 중얼거렸다.
“비연이는 지구로 나갔을까?”
이비연은 타락체 중에서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막강한 전투 능력의 소유자다. 전투 능력만으로 보면 군단이 투입할 수 있는 에이스 카드인 것이다.
그녀가 있는 게이트가 게이트 브레이크되어서 지구에 도달하기만 하면 작전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라지알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서용우와 이비연이 싸우는 것은 타이베이 게이트 브레이크 이후 3개월 만이었다.
그렇기에 이비연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특수한 규칙이 지배하는 어비스라면 모를까, 지구에서의 3개월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니까.
지난번에 숨기고 있던 비장의 패들을 모두 꺼낸다면 죽지 않고 버텨서 살아남아 줄 것이다.
‘그러면 또 다음 기회로 이어갈 수 있어. 오빠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만 하면, 언젠가 나를 죽여줄 수 있을 거야.’
그녀의 기대는 그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파악!
허공에 거대한 붉은 선이 그어졌다.
쿠과과광!
그 선이 선샤인 사카에 빌딩 맞은편에 있는 고층 빌딩을 가르고 지나갔다. 커다란 빌딩이 비스듬히 잘라져서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
이비연은 경악으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 붉은 선이 그녀의 몸통을 베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비연아.”
용우는 지난번과 달리 헬멧의 바이저를 열지 않았다.
하지만 이비연은 그가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도 그 눈동자는 그녀가 기억하는 대로 더없이 단호할 것이다.
“우리에게 3개월은 사람 하나를 죽일 준비를 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지.”
특히 상대의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어떻게 약점을 찌를까 고민하고 준비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 그랬었지.’
이비연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13년 전 그날, 타락체가 되면서 단절된 기억이다. 그날로 그녀는 어비스에서 벗어나 군단의 일원이 되었고, 인간 이비연의 인격은 현실을 외면하고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비연은 자신이 용우를 얕봤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우우!
그녀의 눈앞에서 용우의 마력이 계속해서 상승한다.
하스라 코어만을 가졌을 때, 용우는 총 세 개의 성좌의 무기를 쓸 수 있었다. 빙설의 창과 대지의 로드는 하나로 합쳐서 쓰고, 불꽃의 활은 반발력을 억제하면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볼더 코어를 손에 넣자 보다 자유롭고 강력한 활용이 가능해졌다.
푸른 하스라 코어와 붉은 볼더 코어가 맥동한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뿜어져 나와서 용우에게 녹아들어 가는 가운데…….
쾅!
그것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듯 공격해 들어간 이비연이 튕겨 나갔다.
“기둥이 세 개나?”
눈앞의 광경에 이비연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빙설의 창
대지의 로드
불꽃의 활
이계의 성좌의 힘이 깃든 무기 셋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 * *
한 사람이 성좌의 무기 셋을 가진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비연이 알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의 규칙대로라면 그랬다.
“광휘의 데바나 때문에 하스라와 볼더를 죽인 게 오빠라는 사실은 알았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보 세계라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비연이 기억하는 시점까지의 서용우라면, 군주의 본체를 어찌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 후에 어비스 최후의 생존자가 되면서 더 큰 힘을 손에 넣었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빠가 이레귤러라서 그럴 수 있었던 거구나.”
이비연이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이비연의 인격이 느끼는 감정이다.
타락체 이비연의 육체는 전력으로 눈앞에 나타난 위협을 타파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찰나의 문!
이비연의 의식이 초가속 상태에 들어간다.
그 효과가 정신에 한정되며, 스펠의 유지 시간은 1초에 불과한 스펠. 하지만 사용자의 정신이 체감하는 시간은 그 180배인 3분에 달한다.
파직!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이비연의 마력 컨트롤에 노이즈가 발생하면서 찰나의 문에 의한 가속 상태가 깨졌다.
“어?”
이 상황에는 인간 이비연의 인격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찰나의 문이 이런 식으로 깨질 수 있는 스펠이었단 말인가?
-공허의 감옥!
저주의 힘이 이비연을 사로잡고 있었다.
전투 중에 즉시성으로 거는 저주는 어지간해서는 이비연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그녀는 저주에 저항하는 수많은 특성을 가졌고, 저주에 대응하는 기술도 탁월했으니까.
하지만 이 저주는 다르다. 저항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완벽하게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거였구나.”
어떻게 된 건지 알아차린 이비연이 웃었다.
용우의 옆에 커다란 호박석 같은 무언가가 떠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속에 있는 것은 사람의 손이다. 가녀린 소녀의 손이 잘린 채로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타이베이에서 잘린 이비연의 손이었다.
저주를 걸 때 표적의 신체 일부를 촉매로 쓰는 것은 더없이 효과적이다. 머리카락이나 손톱 일부, 약간의 피만 확보해도 즉시성 저주보다 훨씬 강력한 저주를 걸 수 있다.
그런데 손 하나를 확보해서 3개월 동안이나 저주를 준비했으니 얼마나 강력한 저주가 걸리겠는가?
‘게다가 조건이 명확하게 한정된 저주야. 역시 오빠답게 과욕으로 기회를 망치지 않는 완벽한 선택이야.’
용우가 건 저주의 효과는 명쾌했다.
이 저주에 걸려 있는 동안, 이비연은 시공간에 간섭하는 스펠을 전혀 쓸 수 없다.
그 결과 가속계 스펠 중 상당수, 그리고 텔레포트를 비롯한 공간 간섭계 스펠이 모조리 봉쇄당했다.
용우는 그 모든 것을 자유롭게 쓸 수 있음을 고려하면 이 순간 이비연의 전투 능력은 절반 미만으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아하하하.”
이비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지금의 그녀에게는 더없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타락체 이비연은 그렇지 않다. 밀려오는 절망을 타파하기 위해 전력을 끌어내고 있었다.
콰과과과과광……!
고도의 스펠이 무수히 교차하면서 주변이 초토화된다.
“음……!”
용우가 헬멧 속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가 건 저주는 이비연의 전투 능력을 크게 저하시켰다. 그럼에도 지금 이비연의 공격은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역시 만만치 않군.’
성좌의 무기 여럿과 군주들의 코어 둘을 손에 넣은 지금도 용우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그 힘을 다루는 본신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지구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이미 규격 외의 초인이지만, 그럼에도 어비스 때에 한참 못 미친다.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성좌의 힘 자체를 받아들여서 변신하기에 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구세록의 구속을 거부한 용우에게 있어서 성좌의 힘은 결국 본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활용하는 증폭기라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결국은 내가 이긴다.’
공간 간섭계 스펠을 쓰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차는 명확했다.
어느 순간, 이비연의 공격이 기세를 잃으면서 균형이 뒤집어졌다.
쾅!
폭음이 울리며 이비연이 쏘아진 포탄 같은 기세로 뒤로 날아갔다.
콰쾅! 콰과과과광!
그녀가 빌딩 모서리에 튕겨서 다른 빌딩을 뚫고 그다음에 위치한 폐빌딩의 철골에 처박혔다.
쿠구구구궁……!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폐빌딩이 무너져 내린다.
우우우우우!
용우는 추가타를 날리는 대신 이비연의 맹공을 막느라 지연된 작업을 진행했다.
이계의 성좌의 힘이 깃든 무기 세 개가 하나로 융합되고 있었다.
‘확실해.’
용우는 하스라 코어와 볼더 코어가 아무런 반발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의지가 거세된 코어는 서로 반발하지 않는다.’
빙설의 군주와 불꽃의 군주, 척 봐도 상극의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한번 깨져 나가면서 그들의 영혼, 혹은 의지라고 할 것이 사라져 버린 코어들은 아무런 반발도 일으키지 않았다. 오로지 주인인 용우의 의지에 복종할 뿐!
그리고 그 사실은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해 준다.
‘성좌의 무기에는 뚜렷한 의지가 있다.’
용우는 그 의지가 자아내는 반발력을 힘으로 억누르면서 하나로 융합시켰다.
쿠구구구구……!
반경 5킬로미터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렸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용우가 한 자루의 양손 대검을 들어 올렸다.
하스라 코어와 볼더 코어를 손에 넣자 성좌의 무기 네 개 모두를 소유해서 쓸 수 있었고, 그중 셋을 이렇게 하나로 융합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융합된 양손 대검은 손잡이와 중앙부는 암석인지 아니면 금속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검은색을 띠고 있었고, 테두리와 칼날 부분은 LED와 비슷한 느낌의 청록색을 발하고 있었다.
쿠과아앙!
무너진 빌딩이 폭발하면서 흙투성이가 된 이비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결정타를 가하려고 욕심을 부리지 않은 건 잘했어. 역시 오빠는 여전히 재수 없을 정도로 신중하네.”
용우가 성좌의 무기를 융합시키느라 소모한 시간 동안 이비연도 태세를 재정비했다.
저주를 풀 수는 없었지만, 잘려 나간 팔을 재생하고 허리에 차고 있던 서양식 장검을 빼 들었다. 붉은빛으로 이계의 문자가 새겨진 그 장검은 이비연의 마력을 크게 증폭시켜 주고 있었다.
“재수 없다는 말은 빼자. 네가 너무 저돌적이었던 것뿐이야.”
용우가 그녀 앞에 내려서며 말했다.
비록 저주에 걸리긴 했지만 이비연은 여전히 막강한 전투 능력의 소유자다. 마력 제한이 풀린 그녀의 마력은 9등급 몬스터 수준이었다. 거기에 군단이 그녀에게 쥐어준 마검이 더해지면 인류가 상정한 규격을 초월한 힘이 나온다.
그런 이비연이 모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재앙이다.
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용우가 준비한 올가미에 걸렸다.
용우가 물었다.
“게이트는 타락체를 이 세계에 보내기 위한 통로 같은 거겠지. 혹시 게이트로 진입하면 곧바로 본거지로 귀환할 수 있나?”
“아니, 그런 건 불가능해. 게이트는 그냥 다리 같은 거야. 다리 너머로 가기 위해서는 결국 ‘다리를 건넌다’는 행위가 필요하잖아?”
“그럼 괜찮겠군.”
그리고 용우가 이비연에게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