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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우는 팀원들을 해산시키고 나서 곧바로 한 사람을 만났다.
“탈출자라…….”
용우가 볼더를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알게 된 정보를 들은 애비게일 카르타가 생각에 잠겼다.
“혹시 짚이는 인물은 없나?”
종말의 군단에게 멸망당한 두 세계에서 넘어온 존재, 탈출자.
전 세계를 망라하는 정보망을 가진 미국, 그리고 미국을 좌우하는 흑막인 애비게일 카르타라는 짚이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데이터베이스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물이 있다면 일찌감치 우리와 접촉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긴 하겠지.”
탈출자는 종말의 군단에 적대하는 자.
그렇다면 구세록의 계약자들과 접촉해서 정보를 알려주는 쪽이 정상일 것이다. 용우가 등장하기 전까지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인류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입장이지. 이미 두 번이나 이런 일을 겪고, 세계의 멸망을 지켜본 자라면 관점이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규칙을 모두 알고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겠군요. 흠…….”
애비게일 카르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일단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럼 이제 다음은 나고야 수복전입니까?”
“갑자기 이번 같은 일이 터지지 않는다면 말이지.”
팀 섀도우리스 입장에서는 재해 지역을 수복하는 것보다는 종말의 군단의 침략을 막는 데 전념할 수밖에 없다.
“다음에 군주 개체가 나타나면 어쩔 생각입니까? 이번처럼 처리할 겁니까?”
“아니. 일단은 그냥 격파해서 돌려보낸다.”
“어째서입니까?”
애비게일 카르타가 의아해했다.
용우의 힘은 폭발적으로 강해지고 있다. 특히 종말의 군단의 본거지인 정보 세계에서는 군주는 물론이고 그 최정예 병력까지도 같이 격파할 정도가 아닌가?
이제 볼더 코어가 더해졌으니 더욱더 강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공세를 접는단 말인가?
“이제 놈들이 대책을 세울 테니까. 똑같은 수법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커. 이쪽에서 방법을 준비하고 놈들을 끌어들일 거다.”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나 보군요.”
“있지. 그리고 이번 일로 확신했다. 히든 페이지는 있을 거야.”
“역시 허우룽카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는 겁니까?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아니마의 존재가 설명되지 않지만…….”
용우는 첫 번째, 두 번째로 죽인 구세록의 계약자 미켈레와 엔조 모로의 구세록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정보를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애비게일 카르타의 구세록을 보았고, 또 차준혁의 구세록도 보았다.
애비게일 카르타가 말한 대로 두 구세록의 내용은 동일했다. 접촉해 봤자 예언서다운 문장 말고는 다른 내용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용우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구세록이 단순한 예언의 기록일 리가 없다. 성좌의 무기의 보관함이었고, 계약자들에게 특수한 능력을 부여하는 근원이기도 하지 않은가?
분명 열람할 수 있는 기록 이상의 비밀이 감춰져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용우는 허우룽카이를 죽일 때와 프리앙카에게서 불꽃의 활을 넘겨받을 때는 그들의 구세록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 구세록에 대해서 뭔가 파악한 것이 없는지에 대해서도…….
그 결과 허우룽카이에게서 의미심장한 정보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구세록에는 히든 페이지가 있다.’
팬텀의 데이터에 연구 과정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은 A타입 아니마의 제조법은 구세록의 히든 페이지에서 온 것이다.
죽음의 유사 체험으로 광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구세록의 의지가 신성한 계시를 내려주었다. 허우룽카이는 그렇게 증언했다.
“놈들을 제약하는 규칙은 구세록의 계약자에게도 적용되고 있었어.”
용우는 볼더와의 싸움에서 알아낸 정보의 단편들을 말해주었다.
애비게일 카르타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게 우리가 내용도 모르고 맺은 ‘계약’의 내용이었던 겁니까?”
“아마도. 그리고 그것만은 아닐 거야.”
“기둥의 제물…….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비밀이 숨겨져 있겠지요.”
기둥이 무슨 뜻인지는 대충 이해가 간다. 종말의 군단에게 침략당하는 세계를 지키는 기둥이란 은유일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제물’인가?
“이 거대한 세계를 고작 일곱 명이서 지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런 의미에서는 ‘제물’이라고 은유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놈들이 말하는 뉘앙스는 아무리 봐도 그게 아니야.”
“뭔가 더 위험한 뜻이 있을 것 같습니다. 빙의에 대한 것도 그렇고…….”
“히든 페이지에 답이 있었으면 좋겠군. 지금은 너무 정보 불균형이 심해.”
그리고 그 불균형이 침략자의 입장을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만들고 있다. 용우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비게일 카르타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들은 말대로라면, 놈들의 세계에도 아티팩트 같은 ‘열쇠’가 존재한다는 거지요? 우리가 그쪽 세계에 온전한 힘을 갖고 진입할 수 있게 해주는?”
“그렇지. 그걸 손에 넣어봤자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게 문제지만.”
“슬프게도 그렇군요.”
애비게일 카르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현 시점에서 지구 최강의 전력은 팀 섀도우리스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용우를 제외하면 종말의 군단의 본거지에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가 팀원들에게 바랄 수 있는 건 내가 정보 세계에 진입해 있는 동안 이쪽의 육체를 방어해 주는 것 정도지. 사실 그것만 해줘도 내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아.”
더없이 오만한 말이다. 하지만 객관적인 분석이기도 했다.
애비게일 카르타가 말했다.
“그럼 이제 두 가지 의문이 남는군요.”
“뭐지?”
“과연 우리 쪽에서도 그들의 세계에 ‘게이트’를 열 수 있는가?”
“…….”
용우가 한 방 먹은 표정을 지었다. 전혀 생각 못 한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군. 저쪽에서 열 수 있다면 이쪽에서 열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의미가 있을까? 어쨌거나 쳐들어오는 쪽이 활동 한계를 짊어지고 들어오는데?”
“몬스터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음?”
용우가 의아해하자 애비게일 카르타가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제로, 당신은 두 번이나 그들의 세계에 다녀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마도 그들 조직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을 군주라는 자들을 둘이나 멸했고, 이번에는 군단의 최정예병으로 보이는 자들과 일반 병력에 해당할 존재들을 섬멸했지요.”
“그랬지.”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몬스터를 목격한 적이 있습니까?”
“흠…….”
용우는 비로소 애비게일 카르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확실히 하스라의 영지에도, 볼더의 영지에도 몬스터는 하나도 없었지. 당신은 몬스터가 게이트 안에서만 발생하는 존재라고 추측하는 건가?”
“예. 그리고 만약 이쪽에서 저쪽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발생시킬 경우…….”
“그 게이트 안의 몬스터들은 놈들을 적대할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
용우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건 그로서는 절대 못 떠올릴 발상이 아닌가?
“어처구니없지만… 그럴싸하게 들리는군. 몬스터의 존재가 어디에 속하는가를 알아낼 수 있다면… 그리고 혹시라도 애비게일 당신의 추측이 맞다면……!”
“그럼 이 전쟁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겠지요.”
애비게일 카르타가 온화하게 웃었다.
* * *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마력학의 권위자, 권희수 박사의 삶은 방구석 폐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게이트 재해 연구소에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고, 휴일에도 개인 연구실에 처박혀 있었다. 연구소 내에 그녀를 위한 쾌적한 거처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거기에 가는 일도 드물었다.
그녀가 연구실에 처박혀서 하는 일이라고는 자거나, 연구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거나 뿐이었다. 취미는커녕 소소한 오락거리에조차 관심을 두지 않는 황폐한 삶이었다.
[박사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음?”
소파에 늘어져서 잠들었던 권희수 박사는 인공지능 비서 민수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손님? 찾아올 사람이 있었나?”
[예정은 없었습니다.]
“그럼 나 없다고 해…….”
[제로입니다.]
“응?”
순간 권희수의 눈이 반짝 떠졌다.
“이 사람은 또 웬일이래…….”
권희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인공지능이 조종하는 로봇이 다가와서 그녀의 얼굴을 씻겨주고, 양치질을 해주고, 머리를 풀어서 슥슥 빗질한 후에 다시 묶어주고, 안경을 씌워주었다.
“그러고 보니 민수.”
권희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인공지능 비서를 불렀다.
[네, 박사님.]
“내가 그거 수록 끝냈던가? 나랑 민수랑 엄마 이야기.”
[다섯 번째 버전을 수록하셨습니다만, 새로 수록할까 고민하셨습니다.]
“아, 그랬지. 음……. 그럼 혹시 물어보면 나중으로 미루자고 해야겠네.”
권희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용우가 기다리고 있는 세미나실로 향했다.
“웬일로 갑자기 찾아왔어요?”
용우는 평소에는 그녀가 부르지 않으면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런데 불쑥 찾아온 것이 의외였다.
용우가 물었다.
“지난번에 부탁한 건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아직 2주밖에 안 지났다는 건 기억하고 묻는 거죠?”
“물론입니다.”
“다행이네요.”
연구를 부탁한 지 2주밖에 안 지났는데 뭔가 제대로 진행 상황이 나왔기를 바란다면 말도 안 되는 도둑놈 심보다.
“이제 막 팀을 꾸려서 초안을 잡아보고 있는 단계예요. 최대한 서둘러 보기는 하겠지만 워낙 뜬구름 잡는 연구라서 언제쯤 될 거라고는…….”
“잘됐군요.”
용우가 말을 자르자 권희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용우는 그런 그녀 앞에 투명한 소재의 창 한 자루를 내려놓았다.
“이건 뭔가요?”
권희수가 눈을 빛냈다.
그녀는 마력의 구조를 미세 영역까지 보고 컨트롤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의 소유자다. 그렇기에 투명한 창을 보는 순간, 그것이 범상치 않은 마력의 산물임을 알 수 있었다.
“영혼을 담는 창입니다.”
“네?”
“영혼을 담아서, 특정한 키워드를 이용해 그 영혼들의 의지를 하나로 통일시키면 그게 곧 마력이 되는 창입니다.”
“…….”
담담한 용우의 설명에 권희수가 눈을 껌뻑거렸다.
용우가 말을 이었다.
“만 단위의 영혼이 들어가더군요. 제가 요구한 연구용으로는 완벽한 샘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어,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죠?”
“농담하는 걸로 보입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요. 그보다 영혼이라는 게 실제로 있어요?”
“있습니다. 그게 정말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과 동일한 것인지, 사후 세계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살아가면서 축적한 기억과 의념이 일종의 정신체를 구성한다. 그것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남아서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비스에서는 그 정신체를 가리켜 영혼이라고 불렀다.
“언데드는 몬스터처럼 에너지 코어를 형성하고, 영혼으로 그것을 컨트롤하는 존재입니다.”
“언데드라… 한번쯤 연구해 보고 싶군요.”
그렇게 중얼거린 권희수가 물었다.
“그런데 이건 대체 어디서 손에 넣으신 건데요?”
“군주에게서입니다.”
“음? 군주 개체요?”
“네. 정확히는 군주 개체가 아니라 그 본체에게서지만.”
용우는 이 창을 손에 넣은 과정, 정보 세계로 가서 볼더를 쓰러뜨린 과정을 간추려서 권희수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권희수는 말문이 막혀서 눈을 껌뻑거렸다.
“당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종종 이렇게 점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권희수가 손으로 개구리가 점프하는 것 같은 곡선을 허공에다 그리며 말했다.
“점프?”
“갑자기 시대를 휙 건너뛰는 것 같다는 거죠.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완만하게 상승 곡선이었는데, 당신이 나타나자마자 갑자기 이렇게 휙- 휙- 위로 건너 뛰어버리는 느낌. 한 20년쯤 후에나 맞닥뜨렸을 걸 지금 맞닥뜨리는 기분인데요.”
“그럴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 전에 멸망했을 테니까.”
“하긴 그렇네요. 이런 게 뒤에 도사리고 있었다면, 우리가 사태를 파악하고 대응책을 만들기도 전에 모든 게 끝났겠죠.”
어깨를 으쓱한 권희수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흥미롭네요. 황당한 연구를 부탁하더니 갑자기 이런 걸 가져오다니…….”
권희수는 투명한 창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말했다.
“그런데 저한테 만들어달라고 할 필요 없이 그냥 이걸 쓰면 되지 않아요?”
“며칠 동안 분석해 봤습니다만 제가 원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완벽하게 제가 원하는 용도로 만들어주면 좋겠군요.”
“하지만 시간이 그렇게 여유로운 건 아니잖아요? 이거라도 쓰는 게 낫지 않아요?”
“그건 이미 구조를 파악했으니까 마력석만 좀 투자하면 모조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필요할 때는 그걸 쓰면 됩니다.”
“하긴 당신은 성좌의 무기 모조품도 만들 수 있었죠. 어쨌든 알겠어요. 이렇게 완벽한 샘플이 있다면 못 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네요.”
“부탁합니다.”
“기왕 온 김에 테스트나 좀 도와주고 가죠? 우리 연구원들이랑 같이 논의하면서 당신이 바라는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전달해 주고. 그러면 진행이 빠를 것 같은데요.”
“그러죠.”
용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권희수에게 부탁한 연구는 대단히 중요했다. 인류에게가 아니라 용우 개인에게 중요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히든카드가 될 거야.’
용우는 그 사실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