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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군단이라 불리는 자들의 근거지인 정보 세계.
그들의 왕국은 다국가 연합처럼 여러 정보 세계의 집합체였다.
군단을 지배하는 일곱 군주들의 영지는 물론이고 군단에 소속된 여러 군소 세력들 역시 자신들의 영역을 각각의 세계로 독립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세계에 연결되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군주들이 모이는 공간이 있다.
주인 없는 왕궁.
아직 존재하지 않는 왕을 위한 궁전, 비어 있는 옥좌 앞에 군단의 지배 계급들이 모였다.
<어처구니없는 일이군.>
그러나 군단을 지배하는 군주들을 위한 일곱 자리 중 두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완전한 패배를 겪기 전까지 우리의 본질은 불멸한 것이 아니었나?>
종말의 군주들은 전율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첫 번째, 두 번째 세계의 인류와 싸워 그들을 멸하고 세 번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동안 그들이 아는 규칙이 흔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3세계와의 전쟁이 시작될 때만 해도 그랬다. 이전보다 훨씬 출발이 좋았기에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비원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낙관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놈은… 우리가 생각한 암살자가 아니다.>
광휘의 데바나가 피로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네 명의 군주들이 직접 온 데 비해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모습만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부상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지, 데바나?>
굉음의 소우바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언데드들의 정점에 선 종말의 군주가 부상으로 인해 휴식을 취한다는 것부터가 난센스다. 하지만 광휘의 데바나는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저주에 걸렸다……. 회복에는 좀 시간이 걸릴 것 같군.>
<그 정도의 저주라고? 대체 무슨 저주이기에?>
종말의 군주들은 한 명 한 명이 자연재해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진 자들이다.
대부분의 저주는 아예 그들에게 효과가 없다. 그리고 규모가 큰 의식을 통해 자아낸 진정으로 강력한 저주라 할지라도 그들을 오래 속박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바였다.
<하나가 아니다. 아직 다 파악되지도 않았고. 너희들도 조심하는 게 좋다. 하스라는 그렇다 치고 정예병들을 호위로 배치시켰던 볼더까지 당했으니까.>
<…….>
그 사실은 군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적은 볼더만이 아니라 볼더가 거느린 군단원들까지도 모조리 없애 버렸다. 볼더의 영지에 남은 것은 불타는 폐허뿐, 그곳에 존재했던 모든 자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아, 내가 좀 늦었군.”
그때 그들 사이로 이질적인 존재가 끼어들었다.
군주들과 달리 육성으로 말하는 존재, 상아빛 피부를 가진 타락체 라지알이었다.
챙 넓은 검은 모자를 쓴 그가 자신의 자리에 앉자 대지의 트라크가 말했다.
<이 자리의 안건에 대해서는 들었겠지, 장군.>
라지알은 군단의 타락체 중에서 유일하게 군주들과 대등한 직위를 가진 자였다.
“그래. 하스라에 이어서 볼더가 당했다니… 믿을 수가 없군. 농담이길 바랐는데.”
하스라 때도 놀랐지만 이번에도 놀랐다.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3세계의 인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만. 역시 탈출자가 아닐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라지알 장군?>
“설령 탈출자가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놈들 중에 이쪽으로 잠입해서 볼더를 쓰러뜨릴 정도로 강력한 놈은 없을 거라고 봐.”
<하긴 그렇지. 탈출자가 우리와 필적하려면 기둥의 제물이 되기를 자처해야 하는데, 그러면 이 세계에 진입했을 때는 그 힘을 쓸 수 없으니까.>
<그럼 역시 제3세계의 인류 중에 말도 안 되는 이레귤러가 있는 건가?>
<확실히 경계해야 할 일들이 늘고 있다. 데바나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놈들은 열쇠를 활용하기 시작했지.>
데바나가 귀환하면서 팀 섀도우리스에 대한 정보가 군단에 넘어왔다.
“그냥 놔두기는 좀 그렇군. 하지만 지금은 내가 나서기는 어렵고…….”
<군주의 자리 둘이 빈 상황이다. 너도 당분간은 ‘공장’을 지켜줘야 해.>
“지루한 일이지만 필요하다는 건 인정해.”
라지알이 어깨를 으쓱했다.
군단이 직면한 문제는 제3세계의 인류만이 아니었다.
전면전의 대상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전력을 투입해야만 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본래는 각 군단이 돌아가면서 담당했던 문제인데 군주 둘이 소멸해 버린 지금은 각각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체제가 정비된 후에 움직일 수밖에 없겠군.>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닌가? 차라리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가하는 건 어떨까?>
<불가능하다. 다소 제약이 느슨해져 있긴 하지만, 아직 일곱 번째 문이 열렸을 뿐이라는 걸 잊지 마라. 어쩔 수 없는 문제야.>
<짜증 나는군…….>
당장에라도 군단의 전력을 투입해서 끝장을 보고 싶다.
하지만 규칙에 갇혀 있는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보기만 할 수도 없지.>
그들은 새로운 전략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 * *
용우의 의식이 정신세계에서 돌아오는 순간, 눈앞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볼더가 빙의했던 5등급 몬스터 암석거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흠.”
용우가 주변을 둘러보자 팀 섀도우리스 전원이 변신을 풀고 모여 있었다.
“어떻게 됐지?”
“놈들은 전부 처리했습니다.”
용우가 볼더를 제압하고, 정신세계로 향하는 순간부터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볼더를 상대하던 세 사람 중에서 리사만 남고 휴고와 브리짓은 다른 이들과 합류했다.
브리짓이 차준혁과 합류, 원래부터 우세였던 싸움을 빠르게 끝내 버렸다.
그리고 휴고가 이미나와 유현애 쪽에 합류해서 타락체를 끝장냈다.
용우가 물었다.
“타락체는?”
“아, 꽤 애먹었어요.”
유현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너스레를 떨자 이미나와 휴고가 불편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자존심 상한 건 알겠는데, 상황은 정확히 보고해야 되잖아요.”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이미나가 투덜거리며 시선을 피하자 유현애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객관적인 전력만 놓고 보면 아군이 타락체를 압도한 상황이었다. 마력으로 타락체를 능가하는, 거기에 아티팩트라는 초절한 성능의 무기까지 갖춘 세 명이 모인 것이다.
이미나와 유현애 둘이서도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기에 휴고가 합류한 시점에서 금방 승부가 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타락체의 저력이 발휘되었다.
“다 잡았다고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미나 언니는 겨우 즉사를 피했고, 휴고는 팔이 잘렸어요. 그리고…….”
결국 셋이서는 끝장을 내지 못해서, 한발 먼저 광휘의 데바나를 처리한 차준혁과 브리짓까지 가세하고 나서야 승리할 수 있었다.
유현애가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자 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꽤 실력이 있는 놈이었군.”
용우의 추측대로라면 타락체는 각각의 세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놈들일 것이다. 아무리 약한 놈도 어비스의 후반기 생존자들 수준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팀원들이 상대하기 버거워도 이상하지 않았다. 휴고나 유현애가 천재라고는 하지만 기술과 경험의 차이가 너무 크다.
“너무 풀 죽지 마. 오늘은 시운전 같은 거였으니까.”
“젠장, 시운전이고 뭐고 죽으면 끝이잖아.”
휴고가 투덜거렸다.
지금까지 힘의 부족하다고 생각했지 전사로서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한심한 꼴을 보인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
용우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할 타이밍 같은데,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아니, 이거 위로를 해줘야 할 문제이긴 한가?’
용우는 휴고의 투덜거림을 들으면서 연민은커녕 짜증만 치밀었다.
결국 용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위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 일단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시지.”
“큭…….”
“분하면 다음번에 잘해. 어쨌거나 난 너를 놈들하고 승부를 해볼 만한 카드라고 생각해서 골랐으니까 기대에 부응해 주지 못하면 곤란해.”
“…….”
그 말에 휴고가 용우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새삼 느끼는 건데…….”
유현애가 기가 막혀하며 끼어들었다.
“아저씨는 참, 사람 열 받게 만드는 말은 잘하는데 위로하거나 칭찬하거나… 뭐, 그런 좋은 말은 진짜 못 하네요.”
“…….”
말문이 막힌 용우가 째려보자 유현애가 슬그머니 이미나 뒤에 숨었다.
용우가 혀를 차고는 브리짓에게 물었다.
“현재 게이트 내부의 상황은?”
“팀 크로노스가 전투를 수행 중입니다. 딱히 도와줄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요. 그들의 전력이라면 7등급 몬스터는 무난하게 사냥할 수 있을 겁니다.”
브리짓이 담담하게 보고하고는 물었다.
“이걸로 우리가 ‘고스트’들과 동일한 인물들이라고 알려지겠군요.”
“그거야 처음부터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 매번 힘을 제약하고 싸울 수도 없고, 차준혁은 이미 지난번에 노출되기까지 했으니까.”
일단 ‘고스트’들과 팀 섀도우리스의 일원들은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자신들은 그들과 같은 힘을 얻었을 뿐이라고.
상대방이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 어차피 고스트가 퍼스트 카타스트로피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활동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설득력 없는 주장도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각국 정부는 팀 섀도우리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는 팀 섀도우리스만이 다가올 재앙을 막을 유일한 전력이니까.
“그 부분은 브리짓, 당신과 김은혜의 수완에 기대하지.”
“새삼스럽지만 정식 팀원도 아닌 저를 너무 막 부려먹는 것 아닌가요?”
“당신이 원한다면 정식 팀원해도 돼.”
“…그렇게 쉽게 되는 문제였습니까?”
브리짓이 약간 어이없어하며 묻자 용우가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는 미국 정부의 비밀 요원쯤 되는 당신의 입장을 고려한 것뿐이야. 매번 같이 싸우기까지 하고 있는데 팀원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
“그렇군요. 그럼 팀원도 아닌데 부려 먹히는 건 이제 끝난 걸로 하지요.”
브리짓은 농담을 하면서 웃는 스스로에게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휴고 말고는 친한 사람도 없고, 딱히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이들과 함께 싸우면서, 이들과 같은 울타리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이 섭섭했던 것일까?
‘이상한 기분이군.’
생각해 보면 성장 환경이 특수한 브리짓에게는 대등한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브리짓이 미국 정부 소속으로 일해오는 동안 모두가 그녀를 특별 취급 했다. 애비게일 카르타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직위를 초월한 특별한 요원으로 여겨졌지 함께 일하는 동료로 인식된 적은 없었던 것이다.
브리짓과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은 존경하는 양어머니인 애비게일 카르타와 그녀가 선택해서 영재교육을 시킨 휴고 스미스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서 휴고는 골치 아픈 동생 같은 존재였지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는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용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팀원으로 받아들여 준 것이 기뻤다.
차준혁이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지?”
“볼더는 처치했다.”
용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자 다들 숨을 삼켰다.
처음부터 그걸 목표하고 덫을 놓긴 했지만 정말로 해냈다는 말을 들으니 역시 충격적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군주는 다섯인가?”
“그래. 하지만 남은 놈들은 어려울 거야. 이번처럼 일이 수월하게 풀리진 않겠지.”
이번만 해도 하스라를 잡을 때보다는 훨씬 상황이 까다로웠다.
다음번에는 놈들이 철저하게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거나, 진입하자마자 여럿이 연계하는 상황을 염두에 둬야 했다.
“그리고 이번 일로 큰 문제를 하나 깨달았어.”
“무슨 문제?”
“무슨 일이 있어도 놈들하고 지구에서 싸워서는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지?”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용우를 바라보았다. 용우는 진지하게 설명했다.
“놈들이 본체를 고스란히 지구에 구현하는 데 성공한다면, 한 놈만 와도 답이 없어.”
“9등급 몬스터보다도 훨씬 강하다고 하니 힘들긴 하겠지만… 그 정도인가?”
차준혁이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지금의 팀 섀도우리스는 9등급 몬스터라고 해도 사냥할 자신이 있었다. 아티팩트로 인해서 전원이 구세록의 계약자급, 그것도 2세대급의 힘을 갖게 되었고 용우라는 규격 외의 존재가 있는 것이다.
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그럼?”
“싸우면 지구가 멸망한다. 그러니까 핵전쟁 시나리오 같은 거라고.”
“…….”
그제야 다들 용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브리짓이 심각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9등급 몬스터보다 강대한 마력을 지닌 존재가, 마력 컨트롤이나 스펠로 몬스터보다 더욱 고효율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들과 싸우는 것 자체가 인류 문명을 파멸시킬 수 있다는 뜻이군요.”
“그래.”
정보 세계에서 용우와 볼더의 전투가 자아낸 파괴는 그 정도로 전율스러웠다.
일격 일격이 수십 킬로미터를 초토화시키고, 한 지역을 초 단위로 극한과 극열의 환경으로 반전시킨 것이다.
지구에서 그 정도 힘으로 싸운다면 아마 전장은 지구 전역으로 확장될 것이고, 전투 여파로 대기권이 불타고 지각변동과 폭풍우가 전 세계를 강타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는데, 이번에 놈의 본거지에서 싸우니까 그 여파가 눈에 들어오더군.”
어비스에서는 그런 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어디를 얼마나 파괴해도 삶이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지구에서는 그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놈들의 세계에서, 아니면 게이트 안에서 끝장을 봐야 해. 놈들의 제약이 풀린 상태에서 지구로 전장이 확산되면… 이겨도 미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