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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비스에서 만난 타락체나 고위 언데드들은 전투 중에 다양한 추측을 낳을 만한 정보를 흘려대고는 했다. 하지만 용우의 기억 속에는 탈출자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1세계와 2세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겠다. 분명 이놈들이 지금까지 침략해서 멸망한 세계일 것이다.
‘지구는 3번째라는 뜻.’
3세계라는 명칭은 참으로 알기 쉽지 않은가?
‘말하는 뉘앙스를 보니 1세계와 2세계는 멸망했지만 각각의 세계의 인류가 멸살당한 건 아니라는 것 같은데…….’
아마도 살아남아서 다른 세계, 이들의 다음 침략 대상이 되는 세계로 탈출한 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1세계에서 2세계로 탈출한 자들이 있었고, 이놈들은 2세계를 멸망시킬 때는 더 이상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봉쇄했다고 믿고 있었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많은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상아인과 암석인이 1, 2세계의 주민이었겠지. 각각의 어비스에서 타락체가 된 건지 아니면 다른 루트를 거쳤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확신하고 있던 바였다.
‘재미있군. 그럼 지금 지구에는 이 모든 일들을 한 번 이상 겪어보았고, 그러면서도 이놈들의 편은 아닌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물론 어디까지나 희박한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용우는 한 번쯤 찾아볼 만한 가능성이라고 여겼다.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
용우가 중얼거렸다.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한 것은 해골 기사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텔레파시를 전투에 이용하는 놈들을 상대로는 정신파로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기 어렵다. 하지만 말을 던졌을 때의 순간적인 반응을 취합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윤곽을 잡을 수 있다.
<한번 허를 찔렀다고 해서 모든 게 네놈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네놈은 여기서 끝이다!>
의지를 불사르는 해골 기사의 주변에 해골 기사들이 속속 집결하고 있었다.
“아, 대화는 이제 끝인가?”
그리고 용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공허 가르기!
용우가 손날에서 에너지 칼날을 뿜어내면서 허공에다 대고 휘둘렀다.
그러나 에너지 칼날만이 공간을 뛰어 넘어서 해골 기사 하나를 갈라 버렸다.
파지지지직!
하지만 해골 기사 역시 격투전에 능한 고위 언데드였다. 놀랍게도 허공장을 강화하고, 추가적으로 방어막 스펠을 구사하면서 그 공격을 받아냈다.
그리고 동료 해골 기사가 용우를 향해 스펠을 퍼붓는데…….
쾅!
잘 버티는 것 같았던 해골 기사가 산산조각으로 터져 나가고, 그를 관통하면서 전달된 충격이 동료 해골 기사를 덮쳤다.
잔인하게 상대방을 농락하는 기술이었다. 첫 번째 공격을 상대가 온 힘을 다해서 막아내는 순간, 동일한 타점에서 동일한 파괴력을 중첩시키는 것으로 방어를 깨버리도록 미리 세팅을 해둔 것이다.
<이런 교활한… 크아아악!>
막 스펠을 퍼부으려던 해골 기사가 그 충격파에 몸이 터져 나가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앞에 용우가 나타났다.
-에너지 드레인!
몸통이 박살 난 해골 기사의 목뼈를 붙잡고 마력을 갈취한다.
그것을 본 해골 기사들이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그렇게 하게 놔둘 것 같으냐!>
하지만 그들이 일제 공격을 가하는 순간, 용우가 싸늘하게 웃는다.
대장 해골 기사는 한 박자 늦게 그 의미를 간파했다.
<멈춰! 가짜다!>
그는 공격 중지를 지시했지만 이미 늦었다.
용우가 만들어낸 분신은 파괴당하기 전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해골 기사들이 퍼부은 공격만이 그 지점에서 요란하게 폭발했다.
콰과과과광……!
용우는 조금 떨어진 지점에서 새로운 스펠을 발하고 있었다.
-찰나의 문!
동시에 용우의 의식이 초가속 상태에 들어갔다.
이미 용우는 가속 스펠들로 정신과 육체, 양쪽의 움직임을 극한까지 가속해 둔 상태다. 하지만 지금 발한 스펠의 효과는 그것을 한참 뛰어넘었다.
그 효과는 정신에 한정되며, 스펠의 유지 시간은 불과 1초.
하지만 사용자의 정신이 체감하는 시간은 그 180배인 3분에 달한다.
-아스트랄 바디!
그 상태에서 용우는 정신체를 육체와 분리하는 스펠을 사용했다.
그로써 마력의 흐름이 육체의 속박을 초월한다. 그러나 마력의 통제권을 가속된 정신이 얻는다 해도, 그 힘이 현실에 적용하는 시간까지 그만큼 빨라지지는 않았다.
-보이드 스택!
용우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하나의 스펠을 더했다.
자신이 존재하는 정보 세계의 시공간을, 시간의 흐름도 공간적 제약도 초월한 공허의 영역과 연결한다.
그리고 용우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스펠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스펠을 쓰면 마력 소모가 엄청나다. 마력 소모에 있어서는 비효율의 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전투에 있어서 효율성이란 에너지를 얼마나 아끼냐가 아니라, 투자한 전투 자원으로 얼마나 큰 전술적 이익을 노릴 수 있느냐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용우는 이 정도 마력 소모로는 별로 부담도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찰나의 문의 효과가 유지되는 180초 동안 무시무시한 수의 스펠이 공허의 영역에 구현할 수 있었다.
“슬슬 잠자는 군주님이 깨어나시는군.”
찰나의 문의 효과가 끝나자 용우가 얼음산으로 변해 버린 볼더의 궁전을 보며 중얼거렸다.
쿠구구구구……!
궁전을 집어삼킨 얼음이 격하게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 안쪽에 있는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다.
아득히 먼 어딘가로 날려 보내졌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마력이 해일 같은 기세로 주변을 휩쓸었다.
지구에서 걸린 속박을 풀어낸 볼더의 의식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예상대로다. 지금의 내가 잡아둘 수 있는 건 5분이 한계라고 봐야겠어. 문제는 다음에는 어느 정도가 될지 감이 안 잡힌다는 건데…….’
부하들도 다 처치하지 못한 상황에서 볼더가 돌아오는데도 용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하스라 때처럼 거저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용우는 자신을 노려보는 해골 기사들 앞에서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콰아아아아아아!
그러자 얼어붙은 궁전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뭣……?>
해골 기사들이 경악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었다. 얼어붙은 궁전, 정확히는 궁전을 얼린 얼음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나가면서 터져 나온 한기 파동이 눈사태처럼 그들을 집어삼켰다.
그 파괴력은 종말급 스펠인 눈보라의 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눈보라의 용과 달리 완전히 허를 찔렀다는 문제가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새하얀 한기가 폭발하는 기세 그대로 휘몰아치는 폭풍이 된다.
<건방진 놈! 감히! 감히이이이이이!>
그 속에서 격노한 볼더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아!
그리고 휘몰아치는 한기 폭풍을 뚫고 섬광이 치솟았다.
초고열의 섬광이 마치 칼날로 케이크를 가르는 것처럼 한기 폭풍을 갈라 버린다. 그러자 얼어붙던 수분이 일순간에 증발하면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수증기 폭발을 일으켰다.
수증기 폭발의 규모는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고도 남았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비하면 파괴력이 떨어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따지는 게 무의미한 일이다. 이미 용우에 의해 얼어붙었던 도시가 수증기 폭발에 휘말려서 초토화되고 있었다.
<감히 나를 농락하다니!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영원히 불타게 만들어주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볼더가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었다.
거세게 팽창하는 거대한 수증기의 군집 안쪽에서 초고열이 타오른다. 초고열의 섬광이 칼처럼 수증기를 가르는 것을 보며 용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생각보다…….’
볼더의 마력이 용우가 짐작한 것보다 더 강했다.
하스라의 경우는 진정한 힘을 보지 못하고 끝내 버렸다. 허를 찔려서 코어만 남은 상태로 만든 데다가, 제대로 전투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코어를 부숴 버렸으니까.
‘예상이 빗나갔군. 이놈, 나보다 마력이 위잖아?’
용우는 그 사실이 어이가 없어서 실소했다.
지금의 용우는 스스로가 기억하는 한 가장 강했던 순간을 재현하고 있다.
어비스에서 최후의 한 명이 되었던 그 순간, 종반까지 살아남았던 자들을 죽이고 그 힘을 흡수했을 때.
용우가 최후의 전투에서 이길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적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단일 개체로 용우의 상대가 되는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볼더의 마력은 용우를 능가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저게 최대치도 아니지.’
하스라 때와 달리 용우는 볼더가 돌아오기 전까지 부하들하고만 싸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볼더에게 아예 타격을 주지 못한 것은 아니다. 종말급 스펠 눈보라의 용이 작렬했을 때도 그렇고, 얼어붙은 궁전을 폭발시켰을 때도 볼더는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 부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상당량의 마력을 소모했을 텐데도 마력이 지금의 용우를 능가한다.
‘확실히 이놈들이 온전한 상태로 지구에 온다면 대책이 없다.’
7군주… 아니, 현재 살아남은 6군주 전원이 강림할 것까지도 없다.
하나만 강림해도 지구 인류는 끝장이다.
쿠구구구구구!
그리고 수증기가 갈라지면서 그 속에서 전신에 불길을 휘감은 해골의 군주, 볼더가 걸어 나왔다.
<정체가 뭔지는 묻지 않으마. 어차피 1세계나 2세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떨거지일 테니! 영겁의 불 속에서 자신의 과오를 후회해라!>
콰과과과광!
볼더가 노성을 지르자 무차별 폭격이 시작되었다.
사방팔방에서 불꽃이 춤추고, 고열의 에너지탄들이 초당 수십 발이나 떨어져서 폭발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발생한 열과 불꽃이 볼더에 의해서 통제되면서 주변의 기온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초열결계(焦熱結界)!
화염이 소용돌이치며 주변을 포위하는 장막이 된다.
그리고 그 안은 숨 쉬는 순간 몸 내부부터 불타 죽어버릴 만큼 고열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화했다.
<자…….>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장을 구축한 볼더가 의기양양해하는 순간이었다.
쩌적……!
그의 바로 앞 공간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유리가 깨져 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보이드 바운드! 에너지 컨버전!
그리고 균열로부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본래는 초고열의 에너지 격류가 쏟아져 나오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깨진 공간 너머에서 쏟아지는 것은 한없이 절대영도에 가까운 한기의 격류였다.
콰아아아아아아!
한기가 노도와 같은 기세로 폭발한다.
그것은 마치 세계를 덧칠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통 불타오르던 세계가 한순간에 식어가면서 그 모습을 바꿔간다.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영역이 휙휙 모습을 바꾸는 것은 초현실적인 공포였다.
그리고 그 격류 속을 유유히 걸어가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공허 문지기!
용우가 공간 간섭계 스펠에 대한 카운터를 발하자 텔레포트로 진입해 들어오려던 볼더의 부하들이 죄다 나가떨어졌다.
-공허 가르기!
그리고 용우가 발한 에너지 칼날이 공간을 넘어 볼더의 팔을 가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허공장이 워낙 견고해서 용우의 일격으로도 스파크가 튀겼을 뿐, 뚫리지는 않았다.
<음……!>
볼더가 신음했다.
그는 완벽하게 잡았다고 생각한 우위가 깨졌는데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까지 스스로를 지배하던 분노를 가라앉히고 차가운 눈으로 용우를 관찰하고 있었다.
쾅!
용우가 공간을 뛰어넘어서 볼더를 덮쳤다.
폭음이 일면서 용우의 팔꿈치가 볼더의 머리 위를 찍는다.
볼더는 반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용우의 공격도 그에게 닿지 못했다.
파지지지직!
볼더의 주변에는 불길에 휘감긴 돌 조각들이 떠다니고 있었는데, 이것이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면서 용우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심지어 하나가 막아내는 동안 다른 것들이 용우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투학!
용우는 아슬아슬하게 그것들을 쳐내면서 물러났다.
화아아아아악!
그리고 물러나는 용우에게 볼더가 한 지점으로 집중시킨 초고열의 광선을 쏘아내었다.
용우는 몸을 날려서 피했지만, 볼더는 그것을 마치 무한히 늘어나는 검처럼 휘둘러서 용우를 때렸다.
-오버 커넥트!
용우는 워프 게이트를 열어서 그것을 피하면서 동시에 반격했다.
-빙결폭(氷結爆)!
극저온의 냉기를 발하는 광선이 사방에서 볼더를 덮친다.
하지만 볼더는 그것을 쉽게 막아낸다. 공간왜곡장을 펼쳐서 냉기 파동이 비껴가게 만들고 무수한 불꽃의 구체를 띄워서 충돌시킨다. 그러자 다시금 초고열의 파동이 사방을 강타하면서 초열결계가 회복되었다.
그리고 다시금 용우와 볼더가 대치했다.
쿠과과과광……!
그 주변이 폭발로 물들었다.
뇌격과 폭염이 부딪치고, 대지가 일어나 불꽃을 집어삼키고, 극저온의 한기가 입을 벌린 괴물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하얗게 덧칠해 간다.
‘무턱대고 힘만 휘두르는 바보가 아니다.’
용우와 볼더의 전투는 그저 막대한 힘의 충돌이 아니었다. 그것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들끼리의 기술전이기도 했다.
용우는 자신이 볼더를 얕봤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에서 각인된 이미지 때문에 힘만 믿는 바보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은 그릇의 성능에 따라 권능이 제약되기 때문이었고, 본신으로 싸우면 막대한 힘을 효율적으로 쓸 줄 아는 존재였던 것이다.
볼더가 허공으로 떠올라서 용우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놀랍군. 신성한 돌은 이렇게 스펠을 능수능란하게 다루지 못하지. 역시 초월권족인가?>
“정체는 묻지 않는다더니?”
<생각이 바뀌었다. 제안을 하지.>
볼더의 눈, 해골의 눈구멍 안쪽에서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나의 신하가 되어라. 그러면 지금까지의 죄는 불문에 붙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