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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서포터 하나가 놀라서 중얼거릴 때였다.
[한 명이 아니야.]
다른 서포터가 숨을 삼켰다.
불길과 폭연이 치솟고 있는, 볼더가 있는 지점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곳을 걷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순백의 표면 위로 황금과 백은으로 복잡한 패턴의 무늬를 양각(陽刻)한 갑옷을 입은 존재였다. 헬멧에는 날개 모양의 섬세한 장식이 조각되어 있었고, 오른손에는 눈부신 빛 그 자체로 이루어진 검이 들려 있었다.
성좌의 무기 광휘의 검을 든 자, 차준혁이었다.
후우우우우!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불길과 연기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 너머에서 키가 10미터에 달하는 불의 거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왔구나.>
볼더가 차준혁을 보며 기뻐했다.
<기둥의 제물. 크하하하하! 드디어 만나는군!>
<암석거인과의 조합이 꽤 어울리는군.>
차준혁이 느긋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확실히 그랬다.
암석거인은 표면이 새카만 암석 조각들로 뒤덮인 거인이다.
키가 10미터에 달하는 이 괴물은 직접 보면 전혀 생명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검은 돌 사이사이로 열기를 발하는 붉은빛이 흘러나오고 있어서 더더욱.
그런데 그 표면을 불꽃이 휘감고 있으니 아주 잘 어울린다. 원래부터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았다.
<5등급 몬스터에 빙의하니 제법 힘이 넘치는 모양인데… 그 정도로 나한테 자신만만해도 될까?>
차준혁의 도발에 볼더가 반응했다.
-폭염질주!
콰하하하하하!
볼더가 달리기 시작하자 그 궤적을 따라서 폭염의 벽이 일어났다.
무인 병기의 공격으로 인한 산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불길이 숲을 태우면서 확산되어 간다.
<나는 불꽃의 군주.>
볼더가 사방으로 불을 확산시키며 말했다.
<불이 가득한 곳에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물론이지.>
우쭐거리는 볼더 앞에 차준혁이 홀연히 나타났다.
쾅!
폭음이 울리며 볼더와 차준혁이 서로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폭염구(暴炎球)!
볼더가 불꽃의 구체를 연달아 쏘아대기 시작했다.
10미터의 거체에서, 직경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불꽃의 구체가 연달아 쏘아져서 주변을 때려대었다.
콰과과과과광!
폭발력으로만 따지면 미사일에 버금가는 파괴력이었다.
게다가 고열의 불꽃이 확산되면서 볼더의 기세를 높여준다는 점에서 악질적이다.
-피지컬 부스트!
볼더가 가속 스펠까지 걸고 뛰어들었다. 10미터의 거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블링크!
게다가 공간 간섭계 스펠까지 쓴다. 달려들던 볼더의 거체가 사라지더니 차준혁의 뒤에서 나타나 손을 뻗어왔다.
<확실히…….>
차준혁이 놀랐다는 듯 말했다.
파악!
그리고 섬광이 공간을 가르고 지나갔다.
<크윽!>
볼더가 신음했다.
쿠구구궁……!
일격에 잘려 나간 그의 팔이 땅에 떨어지면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3등급에 빙의했을 때하고는 차원이 다르군.>
예전에 유현애가 팀 반도호랑이에 있을 때 마주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했다.
마력도 그렇지만 구사하는 스펠도, 육체의 강력함과 움직임의 신속함도 딴판이었다. 7등급 몬스터를 수월하게 사냥할 수 있는 헌터 팀이라도 지금의 볼더와 싸운다면 몰살당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차준혁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한다.
쾅!
차준혁의 공격이 볼더를 강타했다.
<이놈……!>
분노한 볼더가 반격을 가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수십 발의 폭염탄으로 광범위한 화망을 구성하고 몰아치는데도 차준혁은 모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맞기는커녕 스치지도 않는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놈한테 죽었겠군.’
차준혁은 예지능력으로 볼더의 모든 공격을 사전에 간파하고 피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볼더도 무작정 화력을 퍼부어대기만 하는 게 아니다. 3등급 몬스터에 빙의했을 때와 달리 텔레파시 공격으로 차준혁의 예지에 혼선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즉, 볼더는 차준혁이 예지능력자임을 간파하고, 그 대응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차준혁이 서용우에게 어비스의 노하우를 전수받지 못했다면 당해 버렸으리라.
-용참격!
광휘의 검이 한순간에 죽 늘어나면서 볼더의 몸을 강타했다.
파지지지직!
하지만 그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갑자기 볼더의 허공장이 강화되면서 차준혁의 공격을 붙잡았던 것이다.
<광휘의 검은 광휘의 군주가 상대해야 어울리겠지.>
볼더가 웃었다.
오오오오오오!
동시에 불타는 숲 저편에서 빛이 솟구치면서 공기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야?]
[마력 반응이 급상승 중!]
[말도 안 돼! 이건…….]
서포터들이 경악했다.
[8등급이다!]
그곳에서 빛의 거인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 *
50미터급 게이트 내부에 패닉이 퍼져 나갔다.
[7등급이 셋인데 8등급까지 나오다니…….]
[끄, 끝장인가?]
원래 게이트의 코어 몬스터인 7등급.
7등급 몬스터와 동급의 마력을 가진 상아인 타락체.
5등급 암석거인에게 빙의해서 7등급의 마력을 발휘하는 군주 개체 볼더.
거기에 이번에는 8등급 몬스터 수준의 마력을 자랑하는 빛의 거인이 나타난 것이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빛의 거인이 우아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광휘의 군주, 데바나.>
종말의 7군주의 일좌를 차지한 자, 광휘의 군주 데바나가 처음으로 인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키클롭스인가.>
차준혁이 중얼거렸다.
데바나는 5등급 휴머노이드 몬스터, 키클롭스에게 빙의해서 나타났다. 그래서 암석거인에 빙의한 볼더와 거의 비슷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볼더가 웃었다.
<어떠냐?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해봤느냐?>
<아니, 확실히… 예상 밖이군.>
차준혁은 순순히 인정했다.
팀 섀도우리스가 상정한 것은 타락체 두셋과 군주 개체가 같이 나타나는 것까지였다. 설마 군주 개체를 상대하는 구세록의 계약자가 누구냐를 보고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군주 개체가 강림할 줄은 예상 못 했다.
‘이놈들도 머리를 안 쓰는 건 아니다, 이거지.’
종말의 7군주 중 하나인 하스라가 당해서일까?
이런 식으로 함정을 계획한 것은 정말 놀라웠다.
<왜 같은 5등급에 빙의했는데 마력이 이렇게나 차이 나지?>
차준혁이 자신을 양쪽으로 포위한 볼더와 데바나를 보며 물었다.
2미터도 안 되는 그를 10미터에 달하는 불의 거인과 빛의 거인이 포위한 채로 압박하는 것은 꽤나 기괴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데바나는 그 질문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기둥의 제물, 네가 있기 때문에 짐의 애장품들을 내놓았느니라.>
<추가적으로 자원을 소모하면 더 본체에 가까운 힘을 갖고 올 수 있나 보군.>
차준혁은 대번에 그 말의 의미를 짚어내었다.
군단이 보유한 전투 자원, 아마도 영혼을 소모하면 군주 개체가 보다 강력한 모습으로 강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티팩트를 매개체로 삼았을 때만큼은 안 돼.’
지금의 데바나는 확실히 볼더보다는 훨씬 강하다. 하지만 70미터급 게이트에 강림했던 하스라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그리고 이놈들의 본체는 그것보다도 훨씬 강하다…….’
용우는 정보 세계에서 하스라를 죽일 때 알아낸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티팩트를 매개체로 강림했던 하스라조차도 정보 세계의 본체에 비하면 너무나 약화된 모습이었다. 그들의 본체는 종말의 군주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힘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용우가 하스라를 쉽게 잡았던 것도 그가 방심한 틈에 육체를 부수고 코어를 제압한 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서로 만전의 상태였다면 그리 쉽지 않은 싸움이었으리라.
‘역시 성좌의 무기는 절대로 이놈들한테 빼앗기면 안 된다.’
차준혁은 새삼 그 사실을 실감했다.
<이제는 이곳의 인류도 우리에 대해서 좀 알게 되었나 보구나.>
데바나가 웃으며 한 걸음 내디뎠다.
동시에 공명이 일어났다.
우우우우우우!
광휘의 검과 데바나가 공명하면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크윽……!>
예지로 알아차려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차준혁이 신음했다.
날뛰는 야생마에 올라탄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치는 마력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선다운 버스트!
차준혁은 그 마력을 애써 통제하려고 하는 대신, 용우가 알려준 해결법을 사용했다.
단번에 대량의 마력을 써버리는 방법이었다.
하늘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빛줄기가 볼더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아!
대형 항공 폭탄의 위력을 훨씬 능가하는 대폭발이 그 자리를 집어삼켰다.
그 여파로 일시적으로 전술 네트워크가 마비되었다.
<가련하군.>
솟구치는 폭연 속에서 데바나의 정신파가 울려 퍼졌다.
<무의미한 짓을 하는구나.>
데바나는 광휘의 검과 대응하는 존재다. 그에게 광휘의 검이 자랑하는 빛의 힘은 제대로 통용되지 않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에, 그들은 서로를 해하기 위해 특기 분야가 아닌 힘을 써야만 한다.
데바나가 블링크로 공간을 넘어서 차준혁 앞에 나타났다.
파지지지직!
둘의 허공장이 부딪치면서 격렬한 스파크가 수십 미터나 뻗어나갔다.
<하하하! 제법 훌륭한 재주다!>
데바나가 호탕하게 웃었다.
서로의 허공장이 부딪치는 순간, 차준혁이 곧바로 허공장 잠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바나는 지성이 없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의 그는 저등급 몬스터에게 빙의한 상태도 아니라서 힘과 권능이 상당 수준까지 개방되어 있었다.
<음……!>
차준혁이 신음했다.
데바나가 능숙한 기술로 허공장 잠식에 대항했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차준혁은 허공장 잠식을 포기하고 데바나를 떨쳐내었다.
광휘의 검이 길게 뻗어나가면서 눈부신 빛이 주변을 휘감았다.
<생각해 보니까, 그냥 힘으로 해도 되는 일이었어.>
지금의 차준혁은 데바나보다 마력이 위였다. 본신 마력만으로 따지면 데바나가 앞서지만, 광휘의 검으로 증폭된 최대 출력은 9등급 몬스터 수준에 달하니까.
<후후, 확실히 힘이 좋구나. 하지만 잊고 있는 게 있지 않나?>
<뭘 말이지?>
데바나의 물음에 차준혁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
그리고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를 기다리던 데바나가 당황해서 말했다.
<볼더? 뭘 하고 있나?>
군주 개체 둘이서 차준혁을 상대하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볼더가 차준혁과 데바나의 전투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제법 머리를 굴려서 덫을 준비한 모양인데…….>
차준혁이 싸늘하게 웃었다.
<입장을 착각하지 마라. 사냥꾼은 우리다.>
팀 섀도우리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상아인 타락체는 당황했다.
“이건 설마… 공간 분할 필드? 고작 일곱 번째 문이 열린 인류 중에 이런 스펠을 쓸 수 있는 자가 있다고?”
눈앞의 적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게이트 내부 필드에 광범위한 변화가 일어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아인 타락체는 더 이상 불꽃의 볼더와 광휘의 데바나의 마력을 감지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펼친 대규모 스펠이 공간을 왜곡시켰다. 상아인 타락체와 불꽃의 볼더, 광휘의 데바나가 있는 공간은 더 이상 연속성을 갖지 못했다.
<이제야 됐나.>
이미나가 한숨을 쉬었다.
동시에 그녀의 아공간에서 갑옷 위로 오른 주먹부터 팔꿈치까지를 감싸는 장갑형 추가 파츠가 튀어나왔다.
철컥!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추가 파츠가 그녀의 갑옷에 결합되었다.
“설마… 열쇠?”
상아인 타락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릴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그녀 주변의 대지가 진동하며 지면이 터져 나갔다.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셀레스티얼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6등급 몬스터 수준이었던 마력이 급상승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놈만이 아니야. 두 놈 모두다!’
상아인 타락체가 경악했다.
모습을 감춘 채 저격으로 이미나를 지원하던 누군가, 유현애의 마력도 비슷한 수준으로 급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나의 마력도, 유현애의 마력도 상아인 타락체의 그것을 능가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상아인 타락체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표정이 아주 볼 만하군.>
이미나가 장착한 추가 파츠는 서용우가 그녀에게 넘겨준 아티팩트 대지의 로드였다. 서용우가 그녀의 요구 사항을 듣고 형상변화 스펠로 형태를 바꿔준 것이다.
<언니는 꼭 주먹으로 치고받아야겠어요?>
모습을 감춘 유현애가 투덜거렸다.
셀레스티얼의 모습으로 대(對) 몬스터 저격총, 제우스의 뇌격을 겨누고 있는 그녀의 어깨에는 새빨간 추가 파츠가 붙어 있었다. 역시 서용우가 형상변화 스펠로 형태를 바꾼 뒤 넘겨준, 아니, 정확히는 돌려준 아티팩트 불꽃의 활이었다.
<이게 제일 편해. 이 갑옷도 좀 더 슬림해졌으면 좋겠는데.>
씩 웃은 이미나가 상아인 타락체에게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