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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타이베이 한복판에서 터진 게이트 브레이크는 전 세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대만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방위 체제를 전면적으로 점검하기 시작했고, 다른 나라들 역시 위기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시기에, 일본에서 일이 터졌다.
* * *
구구구구구…….
광활한 사막 한복판에서 검은 폭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본 교토 외곽에 발생한 45미터급 게이트 내부였다.
현재 일본의 수도, 오사카를 포함한 간사이 지방에서 발생한 게이트이니만큼 일본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이 투입되었다.
심지어 그것으로 방심하지 않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동급의 다른 팀을 지원조로 준비하기까지 했다.
얼마 전 터진 대만의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 때문에 일본 정부도 경계심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방위 시스템을 책임지는 자들이 최선을 다한 그 조치는, 그들이 상정한 것 이상의 재앙 앞에서는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기둥의 제물이 맞나?”
사막 한복판에서 실소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금발에 마치 상아 같은 색과 질감을 띤 피부, 그리고 뾰족한 귀와 붉은 눈동자. 판타지 영화에 출연하기 위한 정교한 특수 분장이라도 한 것 같은 이질적인 외모를 가진 상아인 타락체였다.
“이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거지? 군주들의 대적자가 이렇게 약해 빠졌다니.”
자루도, 날도 모두 백색을 띤 창을 든 상아인은 폭연 속을 유유히 걸었다.
그 앞에는 영롱한 빛을 발하는 해머를 든 자가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백은과 황금의 갑옷을 입은 자, 구세록의 계약자 사다모토 아키라였다.
“약한 주제에 정말 끈질기군. 짜증이 나.”
상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사다모토 아키라의 실력 차는 압도적이다. 거의 무술의 단위 보유자와 초심자 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도 사다모토 아키라를 좀처럼 끝장낼 수가 없었다.
활동시간이 한정된 그로서는 빨리 끝장을 내고 싶은데, 사다모토 아키라는 기이할 정도로 잘 버티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실시간으로 조언이라도 해주고 있는 것 같다.’
상아인은 그런 사다모토 아키라를 보며 이질감을 느꼈다.
마치 결정적인 순간에 누군가 최적의 답을 조언해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드는 국면이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놈이 있으면 진즉 나왔어야지. 혹시 그런 계통의 특수능력을 가진 건가?’
둘이 폭연 속에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헌터들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거야? 보고해! 뭐라도 좋으니까 보고하라고!]
[알파 분대는 완전히 연락 두절입니다.]
[폭심지는 관측 불가능. 부근의 드론은 전기 격추당했습니다. 새로운 드론을…….]
[고스트는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당한 건가?]
[젠장, 고스트마저 당해 버리면 우리는…….]
물론 사다모토 아키라도, 상아인도 전파를 수신하는 능력이 없었기에 그들의 심정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럴 줄 알았으면 군주 강림을 준비해 두는 건데… 아깝군.”
상아인이 혀를 찼다.
타락체가 강림해서 날뛰기 시작하자, 사다모토 아키라가 전사자의 시신에 빙의해서 나타났다.
대만 타이베이의 게이트 브레이크 때문에 사다모토 아키라도 경계심을 끌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혼자였고, 상아인 타락체는 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처음에만 대등하게 맞섰을 뿐, 시간이 갈수록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이젠 좀 무리해서라도 끝내주지. 시간이 없거든.”
자세를 잡으며 말하던 상아인은 갑자기 흠칫해서 고개를 들었다.
콰아아앙!
그리고 먼 곳에서 날아든 한 줄기 섬광이 그 자리를 강타했다.
“이건 또 뭐야?”
상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앞에는 최정예 헌터들에게 지급되는 M슈트를 입고, 얼굴이 보이지 않는 헬멧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서용우였다.
“상아인 타입인가.”
용우가 중얼거리고는 사다모토 아키라를 흘끔 바라보았다.
사다모토 아키라는 만신창이였다. 의식을 잃지 않고 버티는 게 한계인 것 같았다.
‘마력은 별로 안 큰 놈인데.’
상아인의 마력은 6등급 몬스터 수준. 사다모토 아키라보다도 아래였고, 지금의 용우와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었다. 타락체 중에서는 그리 강한 놈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사다모토 아키라가 일방적으로 당한 이유는 하나였다.
‘마인드 리딩이 장기인 놈이군.’
고도로 단련된 텔레파시를 이용, 상대방의 행동 의지를 읽어내어 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타입.
텔레파시 공방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1세대 구세록의 계약자들에게는 최악의 난적이다.
“대만에서 재미를 보더니 아주 맛이 들린 모양인데…….”
사다모토 아키라가 상아인과 전투를 벌인 지 10분.
그동안 그가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던 이유는, 타락체가 나타난 곳이 이곳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미국 워싱턴에 열린 게이트에서 한발 빠르게 타락체들이 출현했던 것이다.
용우는 브리짓과 휴고에게 그쪽을 맡기고 만약을 대비해서 차준혁을 대기 상태로 두었다. 그리고 차준혁이 열어준 워프 게이트를 타고 일본으로 온 것이다.
“이제부터는 지구로 오는 족족 죽여주지.”
미국 워싱턴과 일본 교토에서 열린 게이트에 타락체가 출현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타락체들은 대만 타이베이에서 그랬듯 두 지역에 있는 아티팩트 보유자들을 노리고 있었다.
‘아티팩트 회수를 서둘러야겠군.’
용우는 대만 타이베이 게이트 브레이크 직후부터 진행하고 있는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타락체와 마주했다.
“흐음.”
타락체가 용우를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직 일곱 번째 문밖에 안 열린 걸로 아는데… 이만한 인간이 있다니 놀라운걸.”
군단은 이미 지구 인류의 전투 능력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었다. 서용우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인류의 한계치를 한참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넌 타락체 중에서는 별 볼 일 없는 놈 같은데, 신경 써서 죽이는 것도 귀찮으니까 그냥 자살하면 안 되겠냐?”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구나.”
용우의 심드렁한 도발에 상아인이 발끈했다.
하지만 용우는 그를 무시하고 사다모토 아키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모트…….
원격 치료 스펠을 발하는 순간, 타락체가 블링크로 공간을 뛰어넘어서 용우를 공격했다.
쾅!
그리고 창을 찌르는 기세 그대로 튕겨 나가서 사막에 처박혔다.
“커헉……?”
그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워했다.
‘분명히 진심이었는데?’
용우가 파악한 대로 상아인은 마인드 리딩이 장기였다.
상대방의 행동 의지를 읽어 들인다는 것은 일대일 대결에서는 예지나 다름없는 효과를 발휘한다. 방금 전에 용우는 진심으로 사다모토 아키라를 치료하려고 했고, 스펠을 발동 직전까지 끌어 올린 상태라면 상아인의 기습에 대응하기는 어려웠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기습을 가하는 순간, 용우는 완벽하게 준비된 카운터로 그를 날려 버린 것이다.
투학!
몸을 튕겨서 일어나는 그를 추격해 온 용우가 발차기를 날렸다.
팔을 교차해서 그것을 막아낸 상아인은 곧바로 다음에 이어질 용우의 행동 의지를 읽었다.
‘다음 공격과 그다음 공격까지 피하면서 태세를 바로잡고 반격을…….’
상아인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파악!
용우의 검이 그의 왼쪽 다리를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크아악!”
상아인이 비명을 질렀다.
“너, 너……!”
왼쪽 다리를 잃고 주저앉은 상아인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용우를 바라보았다.
용우가 헬멧 속에서 웃었다.
“기둥의 제물조차도 저 모양인데, 어떻게 이런…….”
상아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용우의 양손 대검에서 뿜어져 나온 에너지 칼날이 그의 머리통을 통째로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얼간이들만 있으면 참 좋겠는데.”
마인드 리딩은 용우에게는 예지능력 이상으로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행동 의지를 읽어내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것도 쉬웠고, 더 나아가서 정보를 조작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마력이 비등한 상황에서 허를 찔려서 크게 한 방 맞은 시점에서 승패의 저울은 기울어졌다.
그런데도 마인드 리딩에 대한 의존을 버리지 못한 것이 상아인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당한 이유였다.
후우우우우!
용우는 머리 잃은 상아인의 시체를 붙잡고 에너지 드레인을 발동했다.
상아인의 마력이 빨려 들어오면서, 그 몸이 미라처럼 바짝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음?”
문득 용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다모토 아키라가 있던 그곳에는 한 구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사다모토 아키라가 빙의를 풀고 물러난 것이다.
“…감이 좋은 건가?”
용우는 이 기회에 사다모토 아키라의 본체가 있는 곳을 알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사다모토 아키라는 마치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혀를 찬 용우는 상아인의 시신을 완벽하게 처리한 뒤 텔레포트로 그곳을 떠났다.
* * *
서용우에게 구세록의 계약자들의 가장 뛰어난 능력을 하나만 고르라면, 그는 주저 없이 게이트 감시 능력을 고를 것이다.
구세록의 계약자가 아닌 용우는 게이트 내부를 들여다보는 능력이 없다.
용우는 구세록과의 계약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적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그들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군주 개체나 타락체가 나타났을 때 그 움직임을 빠르게 파악하고, 공간 좌표를 확보하려면 차준혁이나 브리짓이 지닌 구세록의 계약자로서의 능력이 필수였으니까.
“이번 타락체는 그렇게 큰 위협은 아니었습니다.”
브리짓과 휴고는 미국에 나타난 타락체를 별로 어렵지 않게 쓰러뜨렸다.
그 말에 용우가 빈정거렸다.
“나한테 노하우를 전수받기 전이었어도 그랬을까?”
“…아니었겠죠.”
브리짓이 순순히 인정했다.
팀 섀도우리스의 훈련에 참가하지 못했다면, 그녀 역시 사다모토 아키라 같은 꼴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걸로 한 가지는 분명해졌군.”
용우는 이번 사태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놈들은 정보 공유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
적들이 대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정보를 공유하고 분석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상아인은 용우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고, 지구인이 마인드 리딩에 대항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브리짓이 말했다.
“일단 놈들은 게이트 내부를 실시간으로 관측하는 게 아니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겠군요.”
“나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아마 게이트에 투입되었던 놈들이 다시 돌아가서 보고하는 과정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러면 이비연이라는 타락체가 걸립니다만.”
“그렇지…….”
이비연이 살아서 돌아갔는데도 적들은 용우에 대해서 모르고 있지 않았는가?
‘비연이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감췄을까?’
이비연이 대단히 특이한 타락체이긴 하지만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이것은 용우가 타락체 이비연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겪는 혼란이기도 했다.
용우는 자신과 마주했을 때 의지와 육체가 어긋나는 이비연의 모습을 봤을 뿐이다. 자신과 만나지 않은 평소의 타락체 이비연이 어떤지를 알지 못했다.
“일단 이비연을 예외로 두고, 그 가설이 옳다고 치면… 타락체의 경우는 지구에 나타났을 때 죽이기만 하면 놈들에게 정보가 전달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하지만 지휘관 개체나 군주 개체는 빙의형이니 그렇게 안 되겠죠.”
그들이 빙의한 몬스터를 처치한다 해도 의식이 본진으로 돌아갈 뿐이니까 말이다.
“결국 늦든 빠르든 우리 정보가 넘어가는 건 정해진 사실이라고 봐야겠지. 그때가 되면 타락체들 상대하기도 더 까다로워질 거야.”
“그리고 놈들이 아티팩트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건 확정적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브리짓이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대만 타이베이.
일본 교토.
미국 워싱턴.
타락체가 등장한 이 세 곳의 게이트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아티팩트 보유자들이 살고 있는 도시라는 것.
“게이트를 어디에다 열지도 컨트롤할 수 있는 것 같고요.”
“그거야 별로 놀랍지도 않지.”
“이제 와서 갑자기 타락체라는 강력한 전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는데, 놈들의 목적은 아티팩트뿐일까요?”
“글쎄…….”
브리짓이 제기한 의문에 용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몇 가지 짚이는 구석은 있었다.
‘놈들이 타락체를 내보낼 수 있게 된 건 내가 구세록의 계약자들을 처치한 것과 관련이 있겠지.’
7번째 각성자 튜토리얼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아티팩트가 인류의 손에 쥐어졌고, 지휘관 개체와 군주 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타락체가 모습을 드러낸 타이밍은 역시 애매했다.
용우는 그들이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이 자신이 구세록의 계약자들을 처치하고, 성좌의 무기를 차지한 영향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올 게 좀 더 빨리 온 거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누구도 이 게임의 규칙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이 정보 우위를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계속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올해 8세대 각성자들이 나타나면 그때는 분명 몽상가나 왕래자도 나타나겠지.’
구세록에 기록된 몽상가와 왕래자의 존재 역시 마음에 걸린다. 지혜의 빛이 그랬듯 저 둘도 적들에게 유리한 요소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