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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우는 꿈을 싫어한다.
어비스에서도 그랬고, 지구로 돌아온 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꿈은 언제나 악몽이었고, 깨어났을 때도 잊히지 않고 선명한 기억으로 그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또 이 꿈인가.’
때때로 그는 자각몽을 꾼다.
다시는 되새기기 싫은 기억을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것이 꿈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피할 수 없는 그런 지옥 같은 꿈을.
용우는 붉은 하늘 아래서 부러진 검을 들고 있었다.
“용우야, 있잖아.”
그 앞에서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용우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였다. 주저앉은 채 흐느끼고 있는 그 여자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쓰러져서 혼절한 소녀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 전신의 혈관이 검붉은 빛을 발하며 흉측하게 맥동하고 있었고, 눈은 새빨갛게 물들어서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비연이를 부탁해.”
“…….”
용우는 침묵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든 말든 상관없이 말했다.
“비연이가 나 없이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
“…괜찮을 거야. 누나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애니까.”
용우는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는 것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그녀도 똑같이 놀라며 용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홍옥처럼 붉어진 눈으로 용우를 바라보며 웃었다.
“너도 울 줄 아는구나.”
“…….”
용우는 자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비스에서 끝없이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동안 그는 메말라갔다. 웃는 일도 드물었고, 눈물은 언제 말라 버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눈물이라니…….
“만약 비연이가 나처럼 되면…….”
그녀는 자신의 기억이 서서히 표백되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소중한 기억들도, 버리고 싶은 기억들도 모두 중요한 것이 빠져나갔다.
분명 기억은 그 자리에 고스란히 존재하는데, 그 기억에 묻어 있는 감정들만이 증발해 버린다. 행복했던 기억들을 되새겨도 따뜻하지 않았고, 아팠던 기억들을 되새겨도 아프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그녀가 살아오면서 쌓은 모든 기억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때는 네 손으로 보내줘.”
“…….”
그 말을 듣는 순간, 용우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약속해 줄래?”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부탁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비연은 너무나도 소중한 동생이었다. 필요하다면 목숨도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던… 그리고 결국 그 말을 증명하고야 만 관계.
그럼에도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어떻게든 될 거라는 희망에 기대하지 않고 당연히 찾아올 절망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용우야, 더 이상은 못 버틸 것 같아. 제발…….”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기괴하게 들렸다. 뒤로 갈수록 서서히 감정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락체가 되어가는 과정, 표백이 끝나간다는 증거였다.
“약속할게.”
용우는 그녀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미안해.”
용우는 뭐가 미안하냐고 묻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부러진 검을 휘둘러서 그녀의 목을 베었을 뿐이었다.
* * *
“…….”
눈을 떴을 때는 어두운 거실의 소파에 누운 채였다.
2015년의 예능 방송을 보다가 깜빡 잠들었던 용우는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
용우는 손바닥으로 눈을 덮은 채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어비스, 그 지옥 같은 세계에서도 즐거웠던 기억은 있었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사람들 속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은 서로 보듬어줄 존재를 필요로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용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관계를 갈구하는 사람들은 세계를 지배하는 악의의 장벽을 넘어 한곳에 모였다.
백일몽처럼 짧고 덧없는 꿈이었다.
선의를 갈망하는 마음은 운명의 철퇴 앞에 무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용우는 그 시간을 잊지 못한다. 누군가를 믿고, 그들과 웃고 떠들었던 그 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 약속… 영영 지키지 못하게 되었어도 좋을 텐데.”
용우는 예전에 지키지 못한 약속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 * *
세계는 혼란스러웠다.
7월부터 12월 현재까지, 5개월간 세계 각국의 정치가들과 자본가들이 꾸준히 살해당하거나 실종되고 있었다.
이 사건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파악되지 않은 상태다. 한 지역도, 심지어 한 나라도 아니고 세계 각지에서 중구난방으로 일어나고 있는 데다 누가 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허우룽카이는 이 모든 일의 진상을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돼.’
허우룽카이는 퀭한 눈으로 자신의 팔뚝을 보며 생각했다.
그의 정신은 한계에 몰려 있었다.
매일 자다가 악몽을 꾸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고, 깨어 있을 때도 느닷없는 불안 증세에 시달리거나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었다.
70미터급 게이트에서 빙설의 군주 하스라에게 패해 죽음을 유사 체험 했기 때문이다.
빙의한 채로 죽음을 겪을 때마다 정신이 유리 조각처럼 깨져 나가는 것을 느낀다.
한 번의 경험이 더해질 때마다 그의 정신은 돌이킬 수 없는 낭떠러지를 향해 떠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이제 정말 더 버티기 어려운 상황까지 와버린 것 같았다.
지난달에 스웨덴에서 55미터급 게이트가 열리고 8등급 몬스터가 등장하는 사태가 있었다.
이 전투에 브리짓 카르타와 프리앙카가 나서서 사태를 해결했지만, 허우룽카이는 나서지 못했다. 8등급 몬스터는 딱히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존재가 아닌데도 그는 도저히 빙의하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더 물러날 곳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팬텀이 차근차근 궤멸해 가는 상황이 닥쳐오자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리고 말았다.
리사에게 한번 패배한 후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경험이 고통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팔라딘과 셀레스티얼을 만든 이유는 빙의의 리스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고통에 대한 부담과 공포 없이 그 힘을 휘두르기 위해서 무수한 인간을 희생시킨 것이다.
그런데 리사는 셀레스티얼을 원격 조종 하는 허우룽카이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워서, 허우룽카이는 조직이 궤멸되어 가는데도 필요한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하하…….”
허우룽카이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죽음을 유사 체험 하고도 그는 싸울 용기를 내어 다시금 전장에 나섰다. 분명 그랬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의 기대보다 훨씬 나약했다.
고통과 공포는 그의 영혼을 차근차근 갉아먹어서,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웅크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낭떠러지로 밀려 떨어질 뿐.”
허우룽카이는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중얼거렸다.
이제는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더 이상 공격을 방치하면 팬텀을 재건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결판을 내주지.”
허우룽카이는 다음 습격 때 자신이 가진 모든 전력을 쏟아붓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습격자를 없앨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막아내고 나면… 그다음에는?’
애비게일 카르타가 일찌감치 브리짓에게 전투 역할을 양보하고, 다니엘 윤이 후계자를 골랐음을 밝혔을 때부터 허우룽카이도 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왔다.
하지만 그는 결국 후계자를 만들지 못한 채로 지금에 이르렀다.
대만이라는 나라를 건국 이후 최고 성세를 구가하도록 키우고, 그 이면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그는 지독한 인간 불신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간을 위해 싸웠고, 고국이 성세를 구가하는 것을 보며 흐뭇해했지만…….
더 이상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을 사랑할 수 없었다.
분명 예전에는 인간을 사랑했던 때가 있을 것이다.
소중한 사람도 있었고, 생면부지의 타인이더라도 대만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빠르게 마모되어서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대만을 지키는 것은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플레이해 온 온라인 게임을 하듯이, 지금까지 쌓아둔 것이 아까워서 관성적으로 그 일을 할 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인간에 대한 희망이나 사랑을 느끼게 할 만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대만 사회의 이면에서 절대 권력을 쥔 그는 마지막으로 타인과 마음을 열고 대화해 본 게 언제 적 일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나마 구세록의 계약자들만이, 친애의 감정은 조금도 없이 날을 세워가면서도 대등하게 대하는 존재들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도, 믿음도 없기에 그는 팬텀이라는 조직을 운영할 수 있었다.
악랄한 실험을 통해서 마음을 파괴당한 존재들이 아니면 누구에게 이 힘을 내주고 사명을 맡겨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할 일을 하루하루 미루며 살아온 허우룽카이는, 곧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왔음을 알게 되었다.
* * *
‘뭐지?’
허우룽카이는 TV로 뉴스를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12월 중순, 타이베이에 45미터급 게이트가 출현했다.
위험을 최대치로 잡아도 6등급 몬스터 2마리가 출현하는 정도라 대만의 헌터 전력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게이트였다.
하지만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게이트 공략을 맡은 팀이 잇달아 사상자를 내고 도움을 호소한 것이다.
이에 허우룽카이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팬텀을 통해 육성한 실험체 일곱 명을 팔라딘과 셀레스티얼로 변신시켜서 투입한 것이다.
45미터급 게이트에 투입하기에는 과할 정도로 강력한 전력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허우룽카이와 그들의 연결이 끊겼다.
구세록의 계약자인 허우룽카이는 게이트 안의 상황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무언가가 팔라딘과 셀레스티얼을 공격해서 죽여 버렸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전투 과정이 어땠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모자이크 처리된 동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당황한 그는 정보공간에서 구세록의 계약자들을 불러 모으려고 했다.
<뭐야, 이 쓰레기는? 잔재주를 부리려면 좀 더 잘해볼 것이지.>
그런데 그때 그의 뇌리에 텔레파시가 들려왔다.
‘뭐?’
허우룽카이가 경악할 때였다.
뇌를 칼로 찌르는 듯한 격통이 덮쳐 왔다.
“……!”
너무 아파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 이건…….’
허우룽카이는 이 고통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그 답을 깨달았다.
리사가 그에게 줬던 고통과 같은 종류였다. 육체에 직접 느껴지는 게 아니라 정신을 직접 공격받아서 육체에 재생되는 아픔.
‘아아아아아악……!’
거듭 덮쳐 오는 고통에 허우룽카이가 몸을 부들부들 떨 때였다.
그의 앞에 검은 구멍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오버 커넥트?’
허우룽카이는 그 현상의 정체를 파악하고 공포를 느꼈다.
그는 곧바로 성좌의 힘으로 변신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거나 먹어라!>
허우룽카이는 변신을 완료하는 것과 동시에 에너지탄을 워프 게이트를 향해 쏘아냈다.
꽈과과과광!
에너지탄이 워프 게이트 너머로 날아가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마력의 해일이 허우룽카이의 감각을 엄습했다.
‘못 이긴다.’
허우룽카이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괴물이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워프 게이트를 통해서 적이 넘어오면 어쩔 방법이 없다. 본체로 싸우다가 잡혀서 죽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허우룽카이는 주체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그는 주저 없이 텔레포트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자신이 아는 가장 멀고 안전한 곳으로.
그리고 그가 도망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만의 심장부, 타이베이 시내 한복판에서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났다.
* * *
브리짓이 휴대폰으로 전송해 준 동영상을 TV를 통해서 재생하는 용우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대만에서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났다.
그것도 대만의 수도인 타이베이 한복판에서.
강력한 헌터 전력을 가진 선진국 중에 하나, 대만에서 45미터급 게이트를 막지 못해서 최악의 사태가 터진 것이다.
[허우룽카이와는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휴대폰을 통해 브리짓 카르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우가 물었다.
“정확한 사태는 너희들도 파악 못 한 건가?”
[예. 45미터급이었으니까요.]
구세록의 계약자들이 게이트 안의 상황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지만, 그건 그들이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대만의 45미터급은 대만인인 허우룽카이라면 모를까, 다른 구세록의 계약자들에게는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나설 필요가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대만의 최정예 헌터 부대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났다.
그리고 허우룽카이는 정보 공간을 통한 연락은 물론이고 현실의 핫라인으로도 연락이 안 되는 상태였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용우는 브리짓과 통화를 하면서도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날뛰는 몬스터들에 의해 파괴되는 타이페이 한복판, 그곳에 이질적인 존재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촬영하는 드론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타락체가 원인이라는 것만은.]
검은 단발머리의 동양인 소녀였다.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것처럼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무표정했다. 눈동자는 마치 홍옥처럼 붉었고, 교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서양식 장검을 차고 있었다.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지지지지직……!
영상은 짧았다. 잠시 드론을 바라보던 그녀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순간, 드론이 박살 나버렸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런 식으로 약속을 지키게 되겠군.”
브리짓과 통화를 마친 용우는 몇 번이고 반복 재생 되는 그 영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