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구가 속한 우주가 아닌 다른 어딘가.
모든 것이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그 세계 속에서 상아빛 피부의 청년이 걷고 있었다.
“뭐야, 이거?”
복도를 걷고 있던 청년, 라지알은 갑자기 경악하면서 먼 곳을 돌아보았다.
“설마 죽은 거야?”
라지알이 타락체로 만들려고 했던 다니엘 윤의 반응이 사라졌다.
“아니, 그놈이라면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마지막에 라지알을 막아선 존재, 서용우라면 다니엘 윤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표백이 안 끝났었다고?’
타락체가 되는 과정의 1단계인 표백이 끝나고 나면 2단계인 각인은 순식간이다.
다니엘 윤이 타락체가 되었다면 그렇게 쉽게 당했을 리가 없다.
적이 강하다면 우직하게 싸우기보다는 빙의한 몸을 버리고 이탈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이 추격해 오기 전에 본체도 이 정보 세계로 도망치는 쪽을 택했을 터.
“제기랄. 너무 일을 허술하게 처리했군.”
라지알은 자신의 태도가 너무 안이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이 따분한 세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일까.
마침내 전면으로 나설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서 일을 망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한숨을 쉰 라지알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종말의 7군주 중 하나, 하스라가 이 세계에 침입한 정체불명의 적에 의해 소멸했다는 소식이었다.
* * *
8등급 몬스터가 죽었다.
군주 개체도 죽었다.
그리고 다니엘 윤마저도 죽었다.
그럼에도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이 녀석, 괜찮을까?>
휴고가 물었다.
차준혁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의 충격으로 혼절해 버렸다.
다니엘 윤이 죽자 차준혁에게 공급되던 성좌의 힘이 끊기면서 변신이 풀렸다. 하지만 차준혁의 부상은 빠르게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광휘의 검이 그에게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괜찮지 않으면… 거기까지겠지.”
용우가 냉정하게 말할 때였다.
치지지직…….
미세한 노이즈가 울리면서, 용우의 손에 들려 있던 양손 대검이 변형하기 시작했다.
<뭐야?>
휴고가 깜짝 놀랐다.
양손 대검이 대지의 로드로 변했기 때문이다.
브리짓이 눈을 빛냈다.
‘역시 그랬어. 하지만 저런 일이 가능한 거였나?’
성좌의 무기를 다른 형태로 변형시킨다.
구세록의 계약자 중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무기에 자신을 맞춰가면서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용우는 또다시 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상식을 깨부쉈다.
‘지치는군.’
용우는 스스로의 컨디션을 체크했다.
연이어서 강적들과 격전을 치르다 보니 피로가 피크에 달하고 있었다. 마력은 회복할 수 있겠지만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직은 쉴 타이밍이 아니지.’
또 무슨 변수가 나타날지 모른다. 끝날 때까지는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용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 포션을 꺼내서 주사했다.
-활력의 숨결!
그리고 치유계 스펠로 정신에 억지로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전투 의지를 불살랐다.
“그 녀석 좀 돌봐줘. 너도 슬슬 한계인 것 같은데 데리고 빠지든가.”
<알아서 할 거다.>
휴고가 삐딱하게 대꾸했다. 소심한 반항이었다.
용우는 더 뭐라고 하지 않고 블링크로 그 자리를 떠났다.
<브리짓, 슬슬 물러나도 되지 않을까?>
<아니, 끝까지 보고 싶어.>
브리짓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맛보는 처참한 전투였다.
9등급 몬스터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애비게일 카르타에게 몇 번이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에 준하는 적들과 직접 싸워보니 뼈저린 무력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대로는 안 돼.’
솔직히 브리짓은 지금까지 자만하고 있었다.
자신은 다른 구세록의 계약자보다 강하다.
다른 이들이 어쩔 수 없는 적이라도, 자신이라면 막아낼 수 있다.
‘오만했어.’
그 사실을 깨닫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난 이제 한계야. 먼저 빠지도록 하지.>
<프리앙카.>
브리짓이 빙의를 해제하려는 프리앙카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앞으로 괜찮을까?>
<…….>
프리앙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결국 아무런 대답 없이 빙의를 해제하고 사라졌다.
* * *
다행히 더 이상의 변수는 없었다.
아직 남아 있던 7등급의 코어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70미터급 게이트 제압 작전은 성공리에 끝났다.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한국은 자국의 헌터들이 해낸 위업, 공식적으로는 유럽에 이어 전 세계 두 번째로 8등급 몬스터를 잡은 것에 환호했다.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세계 각국 역시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전투에 투입되었던 자들은 순수하게 대중의 찬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두가 진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인류는 8등급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는지도 모른다.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지는 고스트, 그리고 규격 외의 초인 제로는 없었더라도 70미터급 게이트 제압은 어떻게든 가능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너머에는 8등급 몬스터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 * *
“정부 측에서 보통 시끄러운 게 아닙니다.”
한숨을 쉬며 말한 것은 백원태였다.
그 맞은편에 앉은 오성준이 말했다.
“높은 놈들 중에 자네를 구속해서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고, 정부를 위해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몇 있더군.”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는 놈들이 있다니 신기하군요. 명단 좀 주시겠습니까?”
“명단은 왜?”
“얼마나 멍청한 놈들인지 얼굴 좀 보려고요.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는 역겨운 놈들한테, 그 멍청함의 대가가 뭔지 가르쳐 주는 것도 재밌겠군요.”
“…….”
오성준이 움찔하더니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이미 처리해 뒀으니까.”
“처리했다고요?”
“이 나라 정치계에 뒤가 구리지 않은 놈은 별로 없거든. 한 놈은 옷을 벗게 만들었고, 나머지는 입을 닥치게 만들어놨으니 자네가 신경 쓸 일은 없어.”
백원태와 오성준의 영향력은 보통이 아니다. 정부 고관들은 물론이고 대통령조차 둘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국민적인 영웅이어서,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헌터 기업의 수장이어서만은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8등급 몬스터와 군주 개체의 시체를 가져간 것에 대해서는 말이 많긴 많은 상황이다.”
오성준의 말에 용우가 삐딱하게 웃었다.
“고스트가 가져갔을 때는 아무런 말도 못 했으면서?”
“고스트는 정체 모를 존재였으니까 그들에게 입장을 표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하지만 자네는 일단 이 나라 국민이니까.”
“하지만 다들 멍청이는 아니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냥 그들 입장에서는 그런 소리를 용우 씨한테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백원태가 쓴웃음을 지었다.
용우가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해해 주기 싫습니다. 계속 그런 잡음이 들려와서 짜증 나면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전해주세요.”
“진담은… 아니죠?”
백원태가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용우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 나라가 처음에 저한테 하려고 했던 짓을 생각하면 언제 그런 마음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죠.”
지금은 용우 입장에서 이 나라가 살기 좋으니까 그런 생각을 안 할 뿐이다. 살기 짜증 나는 곳이 되면 미련없이 떠날 수 있었다.
“하여튼 이번 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보를 공유할 겁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대비는 필요하니까요.”
물론 알려주는 정보는 제한적일 것이다.
용우가 이번에 알아낸 것들을 다 알려줬다가는 패닉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알아봤자 의미가 없지.’
현재 인류의 수준으로는 알아봤자 대책이 없으니까.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그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면 족하다.
“가장 급한 건 텔레파시 연구입니다. 적들의 정체가 언데드라는 게 밝혀진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이번에 용우가 알아낸 정보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적들의 정체는 어비스에서도 난적이었던 언데드들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그들이 보였던 모습이 전부 납득이 갔다. 몬스터에게 빙의해서 나타나는 것도, 죽은 시체에도 빙의해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정말로 네크로맨시의 산물답지 않은가?
‘그리고 그 점은 구세록의 계약자들도 마찬가지지.’
용우가 성좌의 힘으로 변신하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자신들이 쓰는 힘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
구세록에 기록된 정보는 용우가 보기에는 읽는 사람을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쓰레기였다.
하지만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그 쓰레기 같은 정보에 매달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리라.
“타락체가 게이트에 출현한 이상, 언데드가 언제 출현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겁니다.”
타락체의 출현은 용우에게도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라지알이라는 타락체는 어비스의 기준으로 판단해도 상당히 위험한 축에 속했다.
‘나 말고는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 말은 라지알이 나타날 때마다 강력한 헌터들이 타락체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동료를 늘리는 데 열을 올리는 타입이라면 말이지.’
언데드들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에 집착한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을 죽여서 언데드로 만드는 것은 ‘동료를 늘린다’는 개념이 아니라 ‘소모품으로 쓸 부하를 늘린다’는 개념이다.
그에 비해 타락체들은 개체수를 늘리는 데 소극적이다.
그들이 인간을 타락체로 만드는 데 이런저런 제약이 따라붙어서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동료를 고르는 취향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타락체가 되기 전의 인간성을 파괴당한 그들은, 반대로 동료가 될 자를 고를 때 인간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다니엘 윤이 라지알을 공격할 때 나타났었던, 역시 타락체로 추정되는 존재.
교복을 입은 동양인 소녀.
전술 시스템에 기록된 영상은 화질이 별로 좋지 않았다.
구세록의 계약자들과 하스라의 싸움이 일으킨 여파가 워낙 강맹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기록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인간.’
라지알과 달리 소녀는 지구 인류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소녀의 교복은 용우의 기억 속에 있는 것과 똑같았다.
‘어쩌면… 사라졌다는 죽었다의 동의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용우는 타락체 소녀의 정체가 자신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백원태가 물었다.
“텔레파시를 차단하는 방법이 개발된다면 그들에게 맞설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력화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이상 욕심을 부릴 수는 없는 문제고요.”
“하긴 그렇군요.”
“참고로 하스라는 그 힘을 제대로 쓰지도 않았습니다. 아티팩트를 손에 넣어도, 놈들이 온전한 힘을 갖고 출현할 수는 없다는 거겠죠.”
게이트에 강림한 하스라는 분명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9등급 몬스터와 동급의 마력을 지녔다는 것, 거기에 스펠까지 쓴다는 것만으로도 인류에게는 절망 그 자체나 다름없다.
하지만 용우가 정보 세계에서 만난 하스라의 본체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놈들이 본체 그대로 나타날 수 있다면… 그러면 그냥 끝입니다.”
거창한 기술도 필요 없다. 하스라가 정신세계에서 용우에게 했던 것처럼 무식하게 정신파의 위력으로 찍어 누르기만 해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인류는 무력화되고 말 것이다.
“산 넘어 산이군.”
오성준이 탄식했다.
용우에게 스펠 스톤을 공급받으면서, 그리고 권희수 박사가 M슈트와 윙 슈트를 개발하면서 오성준은 희망을 보고 있었다.
팀 블레이드 1부대 정도의 최정예에게 그 힘들이 주어진다면, 분명 지금까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8등급 몬스터를 처리하고 재해 지역을 수복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그건 분명 현실성 있는 목표였다. 용우가 스펠 스톤을 제공해 주면서, 팀 블레이드 1부대의 전투 능력은 급상승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오성준은 그 사실을 전혀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 목표를 이뤄봤자 더 큰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용우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백원태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차준혁은 어떻게 됐습니까?”
“헌터 관리부에서 구금하고 있습니다.”
차준혁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셀레스티얼로 변신했다.
전술 시스템에 생생하게 기록되었기에 파문이 컸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스트들의 정체와 관계가 있음이 분명했으니까.
용우가 말했다.
“풀어줄 수 있습니까?”
“그건… 쉽지 않습니다.”
백원태가 난색을 표했다.
권력을 행사해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다.
헌터 관리부 입장에서는 도저히 차준혁을 그냥 풀어줄 수가 없는 상황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차준혁에 대한 것을 알아버렸다.
70미터급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절망이었고, 차준혁은 그 절망을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실마리로 보이니 도저히 놔줄 수가 없다.
“정부와 거래하죠. 차준혁을 풀어주고 향후 이 문제로 괴롭히지 않는 게 조건입니다.”
“음? 용우 씨는 뭘 제시하려는 겁니까?”
“재해 지역 공략에 참가하겠습니다.”
“정말인가?”
그 말에 오성준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그가 품고 있는 숙원이었다.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반도의 재해 지역을 하나 줄여 드리죠. 정부가 원하는 곳으로. 서포트는 팀 크로노스와 팀 블레이드에게 부탁하겠습니다.”
“음? 전투 요원은?”
“필요 없습니다. 팀을 꾸릴 겁니다.”
“팀이라니?”
의아해하는 오성준에게 용우가 말했다.
“저를 중심으로 하는 팀입니다. 후보에 올려둔 인물들과 협상이 끝나는 대로 팀을 결성할 겁니다. 재해 지역 공략에 대해서는 협의해야 할 일들이 많겠지만… 일단 차준혁 건을 처리해 주는 게 최우선 조건입니다.”
용우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 * *
그날 밤, 우희와 리사가 잠든 시간에 노트북으로 2014년에 인기 있었던 TV 프로를 보고 있던 용우는 휴대폰에서 e메일 도착 알림을 보고는 의아함을 느꼈다.
‘누구지?’
굳이 e메일을 보내올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
메일 앱을 확인해 본 용우는 잠시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굳어 있었다.
발신자는 바로…….
‘다니엘 윤’.
그렇게 써 있었기 때문이다.
용우가 메일을 열어보자 그 안에는 어딘가의 주소가 첨부되어 있었고, 메일을 읽은 뒤에는 삭제해 달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군.’
용우는 의아해하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바로 텔레포트로 목적지로 향했다.
중심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허름한 빌라였다.
용우가 빌라 입구에 서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니 기다렸다는 듯 록이 풀리는 소리가 울린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순간 용우는 움찔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들린 목소리는, 그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정말 감쪽같군.”
다니엘 윤, 아니, 그의 모습을 한 다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