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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흐르는 물과 같은 존재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관계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한다.
때로는 어제까지 없던 열정이 갑자기 솟아나 질주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제까지 넘쳤던 열정이 한순간에 식어버려서 주저앉아 버리기도 한다.
전자는 멋진 경험이다. 무료했던 삶이 활력 넘치는 시간으로 바뀐다.
그러나 후자는 끔찍한 경험이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것들이, 그토록 아름답다고 여겼던 것들이 무가치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다니엘 윤은 그 공포를 실감하고 있었다.
‘어머니.’
그의 인생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감정은 복잡했다.
사랑했고, 미워했고, 원망했고, 그리워했고, 안타까웠고, 동정했고…….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고 그 모든 감정들 하나하나가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
하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어머니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녀가 자신을 안아주던 때의 감촉까지 기억한다.
그런데도 아무런 감흥도 없다.
‘아버지, 형.’
어머니 다음으로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증오했다.
그들이 대실종에 휘말려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는데도, 필시 고통스럽게 죽어갔을 텐데도 증오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들에 대해서 떠올릴 때면 자신이 당한 수많은 학대의 기억이 재생되면서 마음이 새카만 어둠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없다.
그들의 얼굴도, 그들을 증오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들에게 당한 일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르는데도…….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
‘나는…….’
다니엘 윤은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가는 수많은 기억들을 보았다.
슬프고 아픈 기억들이 있었다.
고통스럽고 두려운 기억들도 있었다.
즐겁고 행복한 기억들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기억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과거의 기록에 불과했다. 다니엘 윤은 자신의 인생을 채운 경험들에서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그럼에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는 불씨가 살아 있다.
‘이렇게 사라질 수는… 없어.’
산더미처럼 많은 목숨을 죽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죽였다.
자신이 위험해질 수 있기에 죽였다.
모두 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죽도록 방치했다.
‘돌아서서는 안 돼.’
그런 자신은 적어도 앞을 향한 채로 죽어야 한다.
돌아서서 온 길을 향해 칼을 겨누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
<나를…….>
다니엘 윤은 광휘의 검을 든 손을 붙잡으며 외쳤다.
<죽여! 누구든지, 나를……!>
그러나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다.
다니엘 윤에게는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무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지면이 엉망진창으로 뒤집어지고 불길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다니엘 윤이 한 짓이다.
<선생님……!>
그 앞에는 만신창이가 된 차준혁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다니엘 윤을 공격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이 지났고, 어느 순간 다니엘 윤이 흉흉한 기세로 폭주해서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젠장, 죽여 달라더니 죽일 생각만 가득하잖아.>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투덜거린 것은 휴고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달려온 그는 차준혁과 달리 다니엘 윤을 공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문제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다니엘 윤이 폭주하기 시작하자 휴고는 공격은커녕 일격에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퇴로까지 차단당했고.’
다니엘 윤은 안티 텔레포트 필드를 전개해서 둘의 도주를 막았다.
이성을 잃고 폭주한다고 보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철저했다.
‘정말 폭주하고 있긴 한 건가? 다 속임수 아냐?’
휴고가 그런 의심을 품을 때였다.
“이미 늦어버렸군.”
열기가 끓어오르는 대지를 밟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제로!>
칠흑의 양손 대검을 든 용우였다.
용우가 말했다.
“저 녀석 데리고 빠져 있어.”
<너도 지친 거 같은데 괜찮겠어?>
“혹시 나 걱정해 주는 거냐?”
용우가 피식 웃으며 묻자 휴고가 움찔했다.
휴고는 용우가 싫었다. 브리짓 앞에서 그에게 망신살 뻗치게 두들겨 맞기도 했고, 그 경험으로 인해 전혀 바닥을 알 수 없는 용우의 힘이 두려워졌다.
그러나…….
<젠장. 그래, 걱정했다. 그럼 안 되냐?>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어쨌든 너희들까지 신경 써줄 여유가 없으니까 알아서 잘 피해.”
용우는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앞으로 걸어간다.
순간 다니엘 윤이 움직였다.
파지지지직!
광휘의 검과 칠흑의 양손 대검이 충돌한다.
다니엘 윤의 광휘의 검은 성좌의 무기 중에서도 근접전에 있어서는 최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다. 아무리 현대 기술로 제작된 무기들의 퀄리티가 뛰어나다지만 광휘의 검과 부딪치면 그 순간 부서질 뿐이다.
그러나 용우의 양손 대검은 아무런 스펠도 걸리지 않았음에도 광휘의 검과 대등하게 맞서고 있었다.
격렬한 스파크가 튀면서 대지가 끓어오른다.
“다니엘 윤.”
힘과 힘이 충돌하는 가운데, 용우가 다니엘 윤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이미 틀렸다.”
용우는 지구 인류 중 유일하게 타락체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어비스의 각성자들이 타락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수십 번도 더 보아왔다.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다니엘 윤은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무슨 수를 써도 되돌릴 수 없다.
“이제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겠지.”
자신을 죽여 달라던 다니엘 윤의 절규는 이미 멎었다.
“너와는 한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용우는 아직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는, 다니엘 윤의 마음 한 조각이 외치는 소리를.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밖에 없군. 그러니까 말해두겠어. 내가 없는 동안 이 나라를 지켜준 것에는 감사하고 있다. 네가 아니었다면 우희도 살아남지 못했겠지.”
용우의 눈이 푸른빛을 발했다.
“그 보답으로, 내가 널 죽여주마.”
다니엘 윤의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가 스스로가 지켜왔던 것을 전력으로 파괴하는 존재가 되기 전에 죽인다.
그것이 용우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퍼엉!
순간 용우의 마력이 폭증하면서 다니엘 윤을 튕겨냈다.
<뭐, 뭐야?>
경악한 것은 휴고가 아니었다.
용우의 뒤를 따라온 구세록의 계약자들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용우가 보여준 마력 한계는 뚜렷했다.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하스라조차 쓰러뜨리는 일격을 발했지만, 본인의 마력만을 따지면 셀레스티얼로 변신한 휴고보다 아래였다. 게다가 변신을 하지 않아서인지 구세록의 계약자들에 비해서 성좌의 무기를 통한 마력 증폭률도 현저히 낮았다.
즉, 순수하게 마력으로 힘겨루기를 하면 용우는 절대로 다니엘 윤을 이길 수 없어야 했다.
그런데 일렁이는 푸른 기운으로 전신을 감싼 용우는 힘겨루기에서 다니엘 윤을 찍어 눌렀다.
‘잠깐.’
놀라던 브리짓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저 검에서 대지의 로드하고 같은 느낌이 나지?’
용우는 대지의 로드를 들고 있지 않았다. 빙설의 창을 쓸 때처럼 몸 어딘가에 붙여두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신 용우가 들고 있는 양손 대검에서 대지의 로드하고 똑같은 느낌이 풍기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우!
용우의 마력이 계속해서 상승한다.
M슈트의 M-링크 시스템이 발동하면서 마력이 한계치 이상까지 부풀어 올랐다.
‘남은 시간은… 47초.’
용우는 헬멧의 바이저에 표시된 M-링크 시스템의 카운트다운을 보고 있었다.
하스라와 싸울 때 많이 써버려서 M-링크 시스템의 유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정도면 승패를 결정짓고도 남으니까.
“끼어들지 마.”
용우는 브리짓과 프리앙카에게 말하고는 다니엘 윤에게 다가갔다.
“네가 말했었지. 인류에 필요한 존재로 남아달라고.”
거리가 줄어들자 다니엘 윤이 움직였다. 광휘의 검이 몇 배로 늘어나면서 용우를 후려친다.
콰과과과과과……!
거대한 빛의 칼날이 지면을 쓸어버린다.
그러나 용우는 그 자리에 없다.
안티 텔레포트 필드가 펼쳐져 있는데도, 마치 공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다니엘 윤의 뒤에 서 있었다.
“똑똑히 보여주마. 끝날 때까지는 버텨라.”
콰콰콰콰콰!
한 박자 늦게 충격파가 터졌다.
음속을 초월한 움직임이 다니엘 윤을 베고 지나갔다.
몸통을 깊숙이 베인 다니엘 윤이 충격파에 휩쓸려 나가떨어진다.
<……!>
다니엘 윤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른다.
그러나 그 비명에는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없다.
당했다는 사실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비명을 지를 뿐, 당혹감이나 공포 같은 당연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표백이 끝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타락체가 되는 과정은 크게 2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표백.
표백은 인간이 살아오면서 쌓은 모든 감정을 지워 버리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거친 인간은 그의 정체성을 이루던 가치관이나 인간성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만다.
기억은 남아 있지만, 그뿐이다.
그들은 더 이상 기억 속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서도 과거에 대한 감정을 품고 있는 자들이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감정들에 비하면 먼지처럼 작은 부분일 뿐이었다.
2단계는 각인.
그렇게 자아를 살해당한 존재는 새로운 존재 의미를 각인당하게 된다.
타락체로서의 자아를 구성하는 근본, 바로 과거의 자신이 속해 있던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적의였다.
‘뭐가 너를 그렇게까지 버티게 하는 거지?’
용우는 다니엘 윤에게 경이를 느꼈다.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다니엘 윤만큼 오랫동안 표백에 저항하지 못했다.
‘아니, 딱 한 명…….’
용우가 죽이지 못한 딱 한 사람만이 이토록 끈질기게 저항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제 없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 사실은 용우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음을 의미한다.
콰직!
용우가 나이프를 다니엘 윤의 몸통에 꽂아 넣었다.
일방적인 전투였다. 다니엘 윤은 용우의 스피드를 따라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용우와 다니엘 윤의 실력 차가 그만큼 압도적이어서는 아니다.
“끝내자.”
다니엘 윤이 아직도 표백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는… 절대로…….>
용우는 그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을수록 그리운 기분이 든다.
용우의 마음속에는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켜켜이 쌓인 분노와 증오가 있다.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울분과 절망이 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용우는 가장 선명한 감정들 너머에서 다니엘 윤을 지금까지 버티게 한 감정과 놀랍도록 유사한 감정을 발견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너를 만났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용우는 쓰게 웃으며 그 뒷말을 삼켰다.
마법의 시간이 끝나간다.
다니엘 윤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리고 자신이 그를 압도할 수 있는 동안에 끝을 내야 한다.
<기다려!>
용우가 다니엘 윤을 붙잡고 그의 본체가 있는 곳을 추적할 때였다.
셀레스티얼의 모습을 한 차준혁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러지 마.>
“…….”
<제발… 선생님을 살려줘.>
차준혁이 무릎 꿇고 애원했다.
하지만 용우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시커먼 구멍이 뚫렸다.
오버 커넥트로 연 워프 게이트다.
<하지 마…….>
그걸 본 차준혁이 허우적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만신창이다. 휴고가 그를 데리고 물러난 후로 용우와 다니엘 윤의 싸움에만 집중해서 몸을 치료하는 것조차 잊었다.
<하지 마!>
차준혁은 그랬던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절규하며 달려가는 그의 눈앞에서, 다니엘 윤의 본체가 끌려 나온다.
다니엘 윤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
전신의 혈관이 검붉은 빛을 발하며 흉측하게 맥동하고 있었고, 눈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
차준혁은 손을 뻗으며 뭔가를 외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그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았다.
콰직!
섬뜩한 소리가 울리며, 용우의 양손 대검이 다니엘 윤의 몸통을 꿰뚫었다.
<아, 아아…….>
차준혁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용우는 다니엘 윤의 몸통을 찌른 자세 그대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니엘 윤과 그의 시선이 마주한다. 다니엘 윤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뭔가를 말했다.
그러나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차준혁의 눈앞에서 다니엘 윤의 몸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
용우는 다니엘 윤이 폭사한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 그가 용우에게 남긴 말은 간단했다.
‘뒷일을 부탁한다.’
그렇게 말하는 다니엘 윤은 마치 이제야 해방되었다는 듯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용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쉬어라.”
Chapter31 유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