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곳은 색이 없는 세계였다.
마치 현실을 멋대로 왜곡해서 연필로 스케치해 놓은 것 같다.
그런데도 눈길이 가는 곳의 디테일은 정밀하고 입체성이 살아 있다는 점이 기괴하다.
온통 더 옅은 회색과 더 짙은 회색으로만 이루어진, 그리고 노이즈로 가득 찬 세계.
용우는 그곳을 걸었다.
아니, 걷는다는 표현이 올바를까?
그곳에 용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꿈속의 한 장면인 것처럼 의식만이 그곳을 배회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벅.
용우는 단단한 바닥 위를 걷는 자신의 발소리를 들었다.
동시에 세계가 변화한다.
‘정보 세계로군.’
용우는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가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정보만이 존재하는 세계임을 알아차렸다.
이미 어비스에서 여러 차례 유사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통찰이었다.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체험이 아니라 완전히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라.’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대부분 지극히 제한적인 공간이다.
예를 들어 타인의 정신에 침투하거나, 꿈을 현실로 확장해서 타인을 끌어들이거나, 혹은 마력을 이용해서 자신이 법칙을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정보 공간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작고 볼품없는 모형 정원이 아니다.
용우는 그 사실이 경이로웠다.
또한 기꺼웠다.
‘이러면 일이 쉬워지지.’
용우는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있는 존재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는 짓이 너무 비슷해서 혹시나 했는데…….”
그곳은 돔 형태로 만들어진 거대한 의전용 홀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무대처럼 주변보다 높이 솟구친 그 한복판에는 크고 화려한 의자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은…….
“정말로 언데드였군?”
죽은 자였다.
어비스에서 만난 최악의 적, 언데드와 타락체.
용우는 종말의 7군주 중 하나, 하스라의 정체가 언데드임을 알아보고 피식 웃었다.
백색과 푸른색 바탕에 백은과 황금으로 치장된 화려한 예복을 입고, 그 위에 두꺼운 푸른 가죽 망토를 두른 해골이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시체가 아니었다. 전신에서 강력한 냉기가 뿜어져 나와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었으며, 그 안쪽에서 거대한 힘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용우는 해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뻥 뚫려 있는 해골의 눈구멍 속에서는 흐릿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잠든 자의 무의식이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도 구세록의 계약자들과 수준이 똑같은 놈이야.”
용우는 그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스라의 의식은 이 몸에 없다.
그의 의식은 지구의 게이트에 강림한 채로,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모르고 있는 상태다.
“절대적으로 안전한 장소에서 남에게만 일방적으로 위험을 강요하는 게 가능하다고 믿었겠지?”
원래대로라면 하스라의 의식은 이곳과 지구에 동시에 존재했을 것이다. 언제라도 어느 한쪽에 더 깊게 의식을 둘 수 있었을 것이며, 어쩌면 정보 공간의 특성상 양자의 시간 흐름을 달리 하여 동시적으로 집중하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하스라의 의식은 오로지 지구에만 존재한다.
그것은 용우가 하스라를 속여 넘겼기 때문이다.
용우가 이곳으로 의식을 날리기 전에 발동시킨 봉인은, 사실 하스라 정도 되는 거대한 존재를 봉인하기에는 위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하스라를 파괴된 화신 속에 한동안 구속해 두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오만함을 달고 살다 보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남도 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자기가 하는 행동에 리스크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용우는 하스라의 본체와 화신의 연결 고리를 거슬러 올라왔기에, 그의 본체 바로 앞에 나타날 수 있었다.
하스라는 무대 주변에는 강력한 방어 조치를 취해두었지만, 이 거리에서는 무방비하게 노출된 상태였다.
용우는 해골의 머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왜 너희들이 지구에는 그렇게 불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알겠어. 이 정보 공간이 너희들의 현실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지.”
오로지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존재가,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에 자신을 투영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 기적이다.
정보가 실체화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머릿속으로는 쉽게 현실을 초월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화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 상상의 내용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예술이라는 형태로 현실화시키는 데도 뛰어난 재능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그것이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 수준의 지성을 가진 존재를, 허구의 존재도 아니라 현실에 실재하게 만든다면?
그건 이미 기적이라고 불릴 만한 일이다.
열화된 형태로나마 그 일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종말의 7군주는 확실히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그 반대가 숙제가 되겠지.’
용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콰직!
하스라의 두개골이 부서지고, 용우가 주입한 힘이 뼈만 남은 그 몸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에에!
의지가 없는 몸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용우는 멈추지 않았다.
쾅!
일격이 꽂히며 하스라의 옷과 망토가 갈가리 찢기고 몸통뼈가 부서졌다.
용우는 그 안쪽에서 심장처럼 맥동하며 청백색 빛을 발하는 덩어리를 쥐었다.
하스라의 코어였다.
파지지지지직!
격렬한 스파크가 발생했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퍼져 나가면서 모든 것을 부숴 버린다.
하스라의 옷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지고 의자까지도 박살 나서 날아가 버린다.
그 마력은 9등급 몬스터의 그것을 훨씬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용우는 주변이 초토화되는 상황에서도 멀쩡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 이놈……!>
그리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돌아오고 있나?”
하스라의 목소리였다.
<나를 속였구나! 우리에게 바쳐질 기둥의 제물 주제에 감히!>
“호오.”
용우는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군. 하지만 그렇게 여유 부릴 때는 아니니까, 그냥 끝내자.”
<망상은 거기까지다.>
하스라는 분노 속에서도 차분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네놈이 놀라운 존재라는 것은 인정하마. 내 화신을 파괴한 것도, 나를 속여 넘긴 것도,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것도… 모두 내 예상을 초월하는 일이었으니.>
쿠구구구구구!
코어의 반발 작용이 더욱 강해지기 시작한다.
하스라의 의지가 돌아오면서 코어 주변에 그의 환영이 나타났다. 해골의 눈구멍 안쪽에서 흉흉한 빛이 뿜어져 나와서 용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네가 서 있는 그곳은 너의 세계가 아니다. 네 부족한 힘을 채워줄 도구도 없다.>
지구에서 용우가 하스라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한 힘을 채워줄 도구들 덕분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그 도구들을 쓸 수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이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며, 용우는 의식만을 이곳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인간은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만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상은 언제나 엉성하다.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인 디테일을 갖추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런데, 거기에 현실의 인간관계처럼 상호작용의 법칙이 적용된다면 어떨까?
누군가와 상상이 공유되고, 그로 인해 상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에 엄격한 제한이 걸린다면?
이 정보 세계가 바로 그런 법칙이 적용되는 공간이었다.
단순한 냉병기 같은 것들이라면 모를까,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 집약된 현대 병기들을 정보 세계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만 한다.
“확실히.”
용우는 부정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문명의 산물이란 건 스마트폰 같은 거야. 그 속에 뭐가 들어가 있는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몰라도 아주 잘 쓸 수 있지. 물질을 정보화해서 여기로 가져오는 방법이 있다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확실히 지구의 무기는 쓸 수 없다.”
용우는 이곳에서 아공간을 열고 현대 병기를 꺼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했다.
<이제야 주제를 파악…….>
“그런데 말이야.”
용우가 하스라의 말을 잘랐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모양이지?”
<뭐?>
“잘 생각해 봐. 내가 왜 네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줬을까?”
용우는 이 정보 세계에 온 후로 이상할 정도로 여유를 부렸다.
물론 하스라의 코어를 제외한 부분, 몸과 의복을 파괴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코어의 중요성에 비하면 사소한 손상이었다. 코어만 멀쩡하면 하스라는 얼마든지 몸을 재생할 수 있었으니까.
<허세를 부리는구나. 파괴할 능력이 없었을 뿐이면서.>
아무리 하스라의 의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코어를 파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9등급 몬스터에게 타격을 줄 정도의 위력이 아니면 코어에 작은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리고 현대 병기를 쓸 수 없는 용우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다.
하스라는 그 점을 확신했기에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군.”
용우가 피식 웃었다.
“역시 너도 별로 똑똑한 놈은 아니었어.”
<떠드는 것은 거기까지다. 무엄한 자여, 무릎을 꿇어라!>
하스라의 환영이 크게 부풀어 오른다.
치직…….
동시에 보이지 않는 힘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치지지지직……!
그것은 어비스에서 언데드와 타락체가 다루었던 힘.
정신을 농락하고, 굴복시키는 힘이었다.
연약한 인간의 정신은 그 힘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부서져 버린다.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다. 정신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다루는 힘의 총량이 개미와 고래만큼이나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하스라는 지구에 강림한 화신체로도 정신 공격을 사용했지만, 그 위력은 지금 발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
정신파의 해일에 휩쓸린 용우의 눈이 풀렸다. 잠깐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어리석은 놈.>
하스라가 그런 용우를 비웃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대폭발이 일어났다.
<……!>
의식이 본체로 돌아오고 있는 하스라의 허공장을 날려 버릴 정도의 폭발이었다.
일격에 돔 형태의 건축물이 박살 나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그 바깥쪽까지 여파가 미친다.
“신이 난 꼴을 보니 내 연기력도 나쁘진 않은 모양이야.”
용우는 그 폭발의 중심부에 있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면서 쿡쿡 웃었다.
“힘으로 찍어 누르려고 하다니, 웃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용우는 언데드, 타락체와의 전투 경험이 수도 없이 많다.
그 수많은 싸움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용우가 언제나 승리했다는 뜻이다.
“네놈이 지구에서 맛본 공포는 테마파크의 절규 머신 같은 거야.”
텔레파시를 발하고 있기에 육성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주변의 굉음을 뚫고 하스라에게 닿는다.
“한번 즐겨보라고 선물한 거였지. 난 그걸로 네놈한테 열 받은 게 풀릴 만큼 성격이 좋질 못해.”
<무, 무슨……!>
하스라가 당황했다.
방금 전의 폭발은 그의 허공장 안쪽에서 터졌다.
허공장이 깨져 나가면서 코어에 흠집이 났다. 그만큼이나 강한 폭발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평온하게 죽는다. 네놈이 그런 사치를 누리게 할 수는 없잖아?”
그런 용우를 보며 하스라는 오싹한 감정을 느꼈다.
<너는…….>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누구냐? 그놈이 아니구나!>
의식이 본체로 돌아오면 돌아올수록 뚜렷하게 느껴진다.
거침없이 개방된 용우의 마력이.
<정체를 밝혀라!>
그 힘은 아무리 봐도 지구에서 그를 쓰러뜨렸던 존재와 동일한 존재라고 볼 수 없었다.
“하하하.”
용우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군.’
몸속에서 힘이 용솟음치고 있다.
현실에 밀려 기억 속 한구석에만 존재하던 예전의 자신이 되살아나고 있다.
어비스에서의 마지막 순간, 아무리 강력한 적이라도 쳐부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때의 자신이.
‘확실히 스트레스가 심하긴 심했어.’
잃어버린 힘은 어쩔 수 없다. 손에 없는 것을 그리워해 봤자 미련에 발목 잡혀서 약해질 뿐이다.
용우는 지구로 돌아온 후로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투를 치를 때마다, 자신이 약해진 것을 실감할 때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식후 운동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 힘으로 자신을 찍어 누를 때마다 얼마나 울화통이 터졌던가?
‘어차피 금방 깨어날 꿈이지만, 지금은 즐겨볼까?’
인식하는 것으로 지금의 자신을 과거의 자신으로 바꾼다.
정보 세계에서는 그런 일도 가능했다.
“아예 기다려 주는 것도 괜찮았겠다는 생각마저 들다니, 안 되지. 이러면 안 돼…….”
용우는 스스로가 힘에 취해 있음을 깨달았다.
평소의 그라면 굳이 하스라의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과거의 상태를 재현해서 승산이 높다고 판단했어도, 혹시 모를 변수를 염두에 두고 철저하게 파괴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그는 하스라에게 공포와 절망을 안겨주기 위해 굳이 위험을 감수했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냉정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쾅!
폭음이 울리며 하스라의 코어가 땅속에 박혔다.
하스라가 뭔가 하려는 순간, 용우가 그보다 더 빠르게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제는 알겠지? 내가 왜 너를 기다려 줬는지.”
다시금 폭음이 울리며 대지가 붕괴했다. 그리고 튀어 오른 하스라의 코어가 용우의 손에 잡혔다.
<아, 안 돼…….>
하스라가 공포에 떨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존재는, 자신의 코어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아, 좋군. 네 얼굴을 재생해 놓고 표정을 보고 싶을 정도야. 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지.”
용우는 하스라의 코어를 쥔 채로 스펠을 발했다.
-필멸자(必滅者)의 세계!
그러자 용우를 중심으로 주변 반경 10미터가 흐릿해졌다.
모든 것이 열화된 것 같은 세계 속에서 용우가 손을 뻗었다.
<안 돼애애애애애애!>
하스라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기도 전에, 용우의 손이 하스라의 코어를 부숴 버렸다.
……!
소리는 없었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이 퍼져 나가면서, 그 빛이 닿는 범위에 있는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이미 붕괴했던 돔 형태의 공간은 물론이고 그 너머에 자리했던 거대한 궁전까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