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구가 속한 우주가 아닌 다른 어딘가.
두 사람이 테이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청년이 신나서 말했다.
“마침내 나갈 때가 됐군.”
“…….”
소녀는 말이 없었다.
“길었어. 정말로 너무 길었다고. 빌어먹을 거울상의 저주 같으니!”
“…….”
소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넌 거기 있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난 그랬던 것 같은데.”
“…….”
“역시 그때의 기분은 전부 잊어버린 거야? 하긴 나도 그래. 말로 내뱉었던 것만 기억하고 있어.”
“…….”
혼자서 떠들던 청년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이 나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가자. 네 고향을 구경하러.”
“…….”
소녀는 마지막까지 말이 없었다.
* * *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고등급 몬스터와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그들에게 있어서도 하스라는 미지의 강적이었다.
지금까지 경험을 통해 축적한 힘을 모조리 퍼붓고 있는데도 통용되지 않는다.
하스라는 지성 없는 몬스터처럼 공격을 명중시키기 쉬운 상대가 아니다.
때로 하스라는 공간을 이동해서 구세록의 계약자들의 뒤를 잡고 위험한 공격을 해왔다.
때로 하스라는 정신파 공격으로 그들이 엉뚱한 곳을 치게 하거나, 행동을 지연시켰다.
‘제로의 충고가 아니었다면 몰살당했겠군.’
브리짓은 등골이 오싹했다.
용우가 프리앙카에게 정신 공격에 대해 경고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몰살당했을지도 모른다.
성좌의 무기에 내재된, 정신 공격에 대응하는 스펠을 써가면서 싸우고 있는데도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경할 거면 끝까지 구경이나 할 것이지 왜 남이 노는데 끼어드는 거지?>
하스라가 불쾌감을 표했다.
허우룽카이를 발로 차서 날린 그의 측면을 노리던 다니엘 윤의 공격을 누군가 끼어들어서 막았기 때문이다.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
히죽 웃으며 말한 것은 챙 넓은 검은 모자를 쓴 청년이었다.
청년이라고는 했지만 그의 모습은 다소 기괴하다.
눈부신 금발에 피부는 색도 질감도 상아처럼 보였고 눈동자는 핏빛이었다. 그리고 귀가 양쪽으로 뾰족 솟아 있었다.
인간 청년처럼 보이지만 판타지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정교한 특수 분장이라도 한 것처럼 이질적인 외모였다.
허공장을 펼쳐서 다니엘 윤의 공격을 막아낸 그가 말했다.
“이 기회에 하나 정도는 동료로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너희들 입장에서도 여기서 기둥을 하나 회수할 수 있어서 좋잖아? 다섯이나 있으니까 너무 욕심 부리지 말라고.”
하스라와 달리 그는 육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내용을 구세록의 계약자 중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어느 나라 말이지?’
청년이 쓰는 말이 그들 중 누구도 모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몰랐지만 그것은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였다.
<그런 거라면…….>
하스라가 잠시 청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허락해 주지. 뜻대로 해라.>
“관대한 결정에 감사하지, 군주 하스라.”
청년이 우아하게 몸을 숙여서 인사를 하는 순간, 다니엘 윤이 움직였다.
콰아아아아아!
허공장에 가로막혔던 광휘의 검의 힘을 폭발시켜서 청년을 튕겨낸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블링크로 뛰어들면서 스펠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염동뇌격탄!
측면에서 날아든 뇌전의 에너지탄이 다니엘 윤을 강타했다.
꽈과광!
다니엘 윤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큭……!>
다니엘 윤이 공격자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오버 커넥트!
다니엘 윤이 튕겨 나가던 뒤쪽에 새카만 워프 게이트가 열리면서 그를 집어삼켰다.
‘이런……!’
다니엘 윤이 경악했다.
완전히 허를 찔렸다.
그가 출구로 나오자마자 방어막을 펼칠 때였다.
“아, 끼어들 필요 없었는데.”
그 앞에 나타난 청년이 히죽 웃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한 소녀가 공간을 뛰어넘어서 나타났다.
‘교복?’
그녀를 본 다니엘 윤은 당혹감을 느꼈다.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교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옷을 입은 검은 단발머리의 동양인 소녀였기 때문이다.
이 전장에 그런 차림새의 소녀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이질적이다. 그런데 소녀는 눈동자가 홍옥처럼 붉었고 허리의 벨트에는 서양식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다니엘 윤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대체 뭐지?’
겉모습으로 보면 하나는 인간에 가까운 존재, 그리고 하나는 아무리 봐도 인간이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에게서는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력으로 치면 브리짓과 동급이다.’
놀랍게도 청년과 소녀의 마력은 다니엘 윤의 본신 마력을 상회한다. 거의 8등급 몬스터 수준이다.
다니엘 윤에게 광휘의 검이 없었다면 전혀 승산을 볼 수 없는 적들.
“무서워할 것 없어.”
상아빛 피부의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그가 말하는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텔레파시를 발하면서 말했기 때문이다.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좀 친해지고 싶을 뿐이야.”
<네놈들은 뭐냐?>
“아, 친해지고 싶다면서 인사도 안 하고 있었군.”
청년은 챙 넓은 검은 모자를 벗어서 가슴에 대면서 인사했다.
“나는 라지알.”
스스로의 이름을 소개한 청년이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세계의 인류에게 ‘타락체’라고 불렸던 존재다.”
* * *
브리짓 카르타는 조금씩 절망감이 발목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어.’
그들이 필사적으로 공격했는데도 하스라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허공장을 3할 정도 깎아낸 것이 전부다.
그것조차도 하스라가 전투에 임하는 태도가 워낙 오만방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스라가 진지하게 효율을 추구했다면 벌써 전투가 끝났을 수도 있었다.
하스라는 피할 수 있는 공격을 일부러 맞아주기도 했고, 정신 공격으로 치명적인 허점을 만들어내고도 가벼운 공격만을 가하기도 했다.
구세록의 계약자들을 철저하게 때려눕히기보다는 무력감과 절망감을 심어주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확실히 지쳐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미지의 적들이 나타나서 다니엘 윤을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간 것은 타격이 컸다.
<크악……!>
허우룽카이가 비명을 질렀다.
진동파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해서 얼음을 깨부수고 하스라의 움직임을 지체시키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지친 틈에 하스라가 힘으로 밀고 들어와서 극저온의 파동을 폭발시키자 몸의 절반이 얼어붙었다.
<허우룽카이!>
프리앙카가 급히 불꽃의 활을 쏘았다.
파지지지직!
그러나 하스라는 피하지도 않는다. 허공장의 출력을 높여서 그것을 받아내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너무 약하군. 어차피 제물로 준비된 자들이라지만, 그래도 기둥의 힘을 가진 대적자들이 이렇게까지 약할 수가 있나?>
하스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브리짓을 보며 말했다.
<그대 하나만이 그나마 봐줄 만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실격이군. 이래서야 고작 9등급 몬스터도 못 막을 만도 해.>
<뭐라고?>
브리짓은 하스라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약하다고 하는 부분이 아니다. 실제로 하스라는 스스로의 말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9등급 몬스터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 부분만큼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고작이라니… 9등급 몬스터가?>
<너희들이 약하다는 부분은 납득하고 그 부분은 납득이 안 가는가? 하긴 이 세계의 인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군.>
심드렁하게 말한 하스라가 손을 뻗었다.
<아.>
순간 강력한 정신파가 쏘아져 나가서 허우룽카이의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콰직!
<크아아아악!>
그리고 하스라에게서 뻗어나간 얼음송곳들이 허우룽카이를 관통했다.
콰아아아아아!
허우룽카이가 산산조각 나면서 순백의 해일이 주변을 덮쳤다.
<사다모토!>
브리짓과 프리앙카가 사다모토 아키라 뒤에 서면서 허공장을 전력으로 펼쳤다.
그러자 빛을 발하는 해머를 든 사다모토 아키라가 마치 몸을 내던지는 듯한 기세로 전방의 공간을 때렸다.
-천지를 가르는 빛!
일순간 주변이 캄캄해지면서 모든 것이 정지했다.
그리고 그 한복판을 가르듯이 날카로운 빛살이 뻗어나간다.
마치 산 저편에서 어스름을 찢으며 새벽을 알리는 태양빛처럼.
콰아아아아아!
한순간 정지했던 공간의 시간이 다시금 흐르면서, 그들을 덮치던 순백의 해일이 둘로 갈라진다.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벌어진 현상이기도 하다.
<으윽…….>
사다모토 아키라가 비틀거렸다.
그의 몸을 붙잡아 부축한 브리짓이 물었다.
<괜찮습니까?>
<앞으로 두 번… 잘해봤자 세 번 막는 게 한계일 거다.>
사다모토 아키라가 담담하게 자신의 상태를 고했다.
새벽의 해머는 성좌의 무기 중에서도 가장 경이로운 권능이 깃들어 있다.
바로 시공간을 조작하는 힘이다.
권능의 규모는 성좌의 무기 중 가장 작고, 엄청난 마력을 잡아먹었지만 유사시에는 절대적인 방어책을 제공할 수 있었다.
저벅…….
모든 것이 얼어붙은 공간 속에서 하스라의 발소리가 울린다.
<9등급 몬스터도 결국은 병기일 뿐이지.>
하스라는 방금 전의 일이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이 전장에서 써대는 무기들처럼 말이다. 저렇게 하늘에 날아다니는 것들이라거나…….>
하스라가 2킬로미터 고도를 날고 있는 드론을 가리키며 말했다.
퍼어어어엉!
그리고 몇 초 차이로 드론이 폭발, 산산조각 나면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뭐야?’
그 광경을 본 브리짓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2킬로미터 고도의 드론을 아무런 조짐도 없이 파괴하다니?
‘전에 봤던 그건가?’
서용우가 광학미채 기술로 모습을 감춘 드론을 파괴했을 때와 흡사했다.
<그런 것들 중 하나일 뿐이지. 물론 좀 더 귀중한 병기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얼마든지 대체품이 있는 병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우우우우우!
하스라의 마력 파동이 한층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계를 지키는 기둥들이 고작 그것조차 어쩌지 못해서 침식을 허용하다니 어이가 없군. 너무 약해서 흥이 깨졌으니 이 판은 여기서 끝내겠다.>
<마음대로 될 것 같아?>
브리짓이 뇌전의 사슬에 힘을 집중했다. 그녀가 지닌 최대 위력의 스펠로 하스라를 저지할 생각이었다.
“젠장, 늦어버렸군. 누가 당한 거지?”
그때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하스라가 의아해하며 돌아볼 때였다.
쾅!
푸른 섬광이 그를 강타했다.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해보는 건 혹시 이 세계 인류의 관습 같은 것인가?>
“단순히 짜증이 났을 뿐이다.”
제우스의 뇌격으로 사격을 가한 용우가 그렇게 말하며 걸어왔다.
“허우룽카이와 다니엘 윤이 당한 건가?”
<다니엘 윤은 아직입니다.>
“음?”
브리짓의 대답에 용우가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그러자 전술 시스템이 그가 원하는 답을 알려준다.
“이건 또 뭐야?”
다니엘 윤은 혼자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전투 중이었다.
하지만 정보가 불분명하다. 빛을 왜곡시키는 거대한 정육면체가 그곳을 감싸고 있어서 관측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일루전 큐브?’
용우가 브리짓과 휴고 상대로 썼던 스펠이다.
적이 어떤 존재이기에 저런 스펠로 존재를 감춘단 말인가?
“정체불명의 적들이 나타나서 그를 데려갔습니다.”
“정체불명의 적이라니?”
용우가 의아해할 때 하스라가 물었다.
<왜 다시 왔는가? 괴이한 대적자여. 설마 내게 충성을 바치고 싶은 것인가?>
“아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것인데?>
하스라는 그렇게 말하며 공명을 일으켰다.
우우우우우우우…….
용우가 지닌 빙설의 창과 공명하면 구세록의 계약자들을 쓸어버리는 것은 손쉽다. 그러고 나면 빙설의 창을 손에 넣어서 완전한 모습으로 지구로 나갈 수 있으리라.
<음?>
하지만 곧 하스라는 이상함을 느꼈다.
공명을 일으켰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지?’
그가 당혹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용우가 뛰어들어서 양손 대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
순백의 에너지 칼날이 뿜어져 나와서 하스라를 때린다.
하스라가 주춤하는 순간, 그 발밑이 폭발했다.
쿠과과과광!
지면이 폭발, 거기서 솟구친 토사와 암석이 하스라를 때려서 위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스펠도 발하지 않았는데 그런 권능이 발현되자 브리짓이 놀라서 중얼거렸다.
<대지의 로드?>
엔조 모로의 무기, 대지의 로드가 지닌 권능이 아닌가?
“너희들이 무능함을 메꿔주느라 내 마력석을 2톤이나 썼다, 젠장.”
<그게 무슨…….>
브리짓은 어리둥절해졌지만 용우는 대답해 주는 대신 대지의 로드를 들어 올렸다.
쿠구구구구구!
주변의 대지가 진동하며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대량의 토사와 암석이 거대한 용의 형상을 취하고 일어난다.
<하……!>
그것을 본 하스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이건 정말로 놀랍군! 한 명이 두 개의 기둥을 갖고 그걸 때에 따라서 바꿔 쓴다?>
그 말대로였다.
용우는 빙설의 창을 봉인하고, 대지의 로드를 봉인에서 풀었다.
그것으로 하스라와의 상성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