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다니엘 윤은 팀 3rd, 즉 팀 이그나이트 앞에 와 있었다.
팀 5th와 마찬가지로 얼음꽃의 영향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들을 지켜준 것이다.
‘크로노스 쪽은… 어처구니가 없군.’
떨어진 것은 3발.
팀 1st로 불리는 팀 크로노스와 3rd로 불리는 팀 이그나이트, 그리고 여러 헌터 팀의 혼합 부대인 팀 5th가 그 영향 범위에 들어 있었다.
다니엘 윤은 스펠로 팀 크로노스의 상황을 살피고는 어이가 없었다.
그들은 다수의 허공장과 방어막 스펠, 거기에 한기 대응용 방어막까지 중첩해서 방금 전의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이것은 헌터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각 팀에 체외 허공장 보유자가 8명씩이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한기 대응용 방어막 스펠도 그렇다. 공식적으로는 아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스펠이다.
‘제로.’
서용우가 팀 크로노스와 팀 블레이드에 체외 허공장과 스펠을 제공해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 외에는 어떤 가능성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 힘을 독점할 생각은 없는 것인가. 역시 너는…….’
다니엘 윤은 그 사실에 안도했다.
서용우는 맹목적인 복수귀는 아니다. 복수의 불길을 사를지언정 자기가 발 디디고 있는 이 세상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다니엘 윤은 결국 서용우와 적대했을 것이다.
서용우가 인류에 필요한 존재라면 구세록의 계약자의 수가 줄더라도 그를 보호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미친 복수귀에 불과했다면 다니엘 윤은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용우를 막아야만 했으리라.
문득 다니엘 윤의 시선이 한 사람과 마주쳤다.
그의 제자이자 광휘의 검의 계승자, 차준혁이었다.
다니엘 윤은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동시에 그의 정신이 현실을 떠나서 정보 공간으로 들어갔다.
* * *
“모두들 보고 있겠지?”
“아, 그래.”
“저게 군주 개체의 본모습인가?”
“생각도 못 한 사태로군.”
구세록의 계약자 전원이 정보 공간을 통해서 한국에 열린 게이트 내부의 상황을 보고 있었다.
애비게일 카르타가 말했다.
“이쪽은 이미 스페어로 시작했다. 곧 브리짓이 강림할 거야.”
“용감하군. 잘 해보라고. 난 재밌게 관람할 테니.”
허우룽카이의 말에 다니엘 윤과 애비게일 카르타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섰다.
“마침 전사자가 발생했군. 나도 간다.”
“뭐?”
허우룽카이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일본인 사다모토 아키라가 전사자의 시신을 통해서 강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놈이 어째서?”
9등급 몬스터에 대한 공포는 구세록의 계약자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몇 번이나 패배하면서 그들의 정신은 심각하게 피폐해졌다. 9등급 몬스터와 싸우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그런데 다른 인물도 아니고 사다모토 아키라가,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면 관심을 두는 것조차 싫어하는 인물이 적극적으로 나서다니?
“머리가 있으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인도인 구세록의 계약자, 프리앙카가 비아냥거렸다.
“저것은 그냥 9등급 몬스터가 아니다. 명쾌한 지성을 가졌지.”
지성을 갖고 스펠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동급의 몬스터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다. 저것의 위험성은 이제까지 싸워온 9등급 몬스터보다 월등히 높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몬스터들을 통제할 수 있지. 8등급 몬스터까지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 놈이 게이트 바깥으로 나오면 그게 이전에 9등급 몬스터가 나왔을 때하고 같은 수준의 재앙일 것 같은가?”
“……!”
그 말에 허우룽카이는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지성과 통솔력을 지닌 9등급 몬스터가 세상에 나온다.
그것은 즉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영역 의식으로 인해서 일정 권역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고등급 몬스터들이 목적의식을 부여받고 인류의 영역을 공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미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야.”
프리앙카 역시 전사자의 시신으로 강림할 준비를 하면서 말했다.
“여기가 세계의 운명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 * *
자신이 만들어낸 순백의 필드 위에서 하스라가 중얼거렸다.
<이런, 너무 막 썼나?>
지금 그를 이곳에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티팩트 빙설의 창이다.
침략당하는 인류에게 주어진 힘이지만, 동시에 침략자들의 힘이 될 수도 있는 열쇠.
하지만 그 열쇠의 내구도는 무한한 게 아니다.
군주를 강림시키는 순간부터 내구도가 급격히 깎여 나간다. 하스라의 강림은 시간제한이 명확한 것이다.
온전한 모습으로, 본질 그 자체로 강림하기 위해서는 아티팩트가 아니라 그 원본인 성좌의 무기를 손에 넣어야 한다.
즉, 서용우가 지닌 빙설의 창이야말로 하스라를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시작하자마자 모든 걸 달성하는 것도 재미가 없지 않은가.>
본래 설정된 규칙대로라면 그는 아직 저열한 몬스터들에게 빙의해서 이보다 훨씬 빈약한 힘을 휘두르는 것이 고작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겠지만 규칙이 무너지고 있다.
침략자들로 하여금 모든 단계를 밟아야만 움직일 수 있게 강제하던 7개의 기둥 중 하나가 소실되었고, 그 결과 하스라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어쨌든 제일 먼저 열쇠를 차지한 값을 해야겠지.>
하스라가 한걸음 내디디자 가이아 드래곤이 그 뒤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구구구구구……!
하스라의 한기는 가이아 드래곤에게는 전혀 타격을 입히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몬스터들이 그런 배려를 받은 것은 아니다.
하스라의 공격으로 50개체가 넘는 몬스터가 죽어버렸다. 인간보다도 더 많은 아군을 죽인 것이다.
그래도 하스라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종말의 7군주에게 있어서 몬스터들은 소모품일 뿐이니까. 가격이 높은 소모품인지 싸구려 소모품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꽈르릉! 꽈릉!
한 줄기 벼락이 하스라를 강타하면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호.>
흩어지는 뇌광 속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온 하스라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저편에서 두 개의 실루엣이 낙하해 오고 있었다.
<기둥이 셋이나 모이다니 열쇠를 써서 강림한 보람이 넘치는구나.>
백색 바탕에 청금색의 파츠들이 섞여 있고 황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갑옷을 입은 존재였다. 그리고 왼팔에는 청백색을 띤 금속 사슬을 휘감은 존재가 허공에 빛의 궤적을 그려내면서 강하해 온다.
지상에 있던 용우는 곧바로 그 정체를 알아보았다.
‘브리짓 카르타.’
사태를 지켜보다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나선 것이리라.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는 용우에게는 익숙한 모습의 존재가 함께하고 있었다.
‘셀레스티얼?’
팬텀의 연구 성과, 팔라딘과 셀레스티얼.
새하얀 갑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머리 위에는 굵직한 빛의 고리가 떠서 일렁이고 있었으며, 등 뒤로는 펄럭이는 망토처럼 보이는 새하얀 빛을 분출하고 있었다.
또한 그 왼팔에는 브리짓 카르타와 마찬가지로 뇌전의 사슬을 휘감은 채였다.
‘뭐지? 설마 애비게일 카르타도 팬텀과 손잡은 건가?’
그런 의문을 품었던 용우는 곧 셀레스티얼의 마력 파동을 감지하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휴고 스미스잖아?’
어느 순간, 브리짓이 휴고와 서로 갈라져서 다른 지점으로 떨어진다.
브리짓은 하스라에게, 그리고 휴고는 멀리 떨어진 다른 지점으로.
‘성좌의 힘을 저런 식으로 쓸 수도 있는 거였군. 애당초 팬텀의 연구 자체가 애비게일 카르타의 활용을 보고 재현한 거였나?’
미켈레와 엔조 모로는 애비게일 카르타에게 의문을 품고 있었다. 전투만을 브리짓에게 대행시킨 것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성좌의 힘을 쓰는 방식이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애비게일 카르타는 용우가 물은 것에 대답해 주었지만,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용우는 휴고가 셀레스티얼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지.’
용우는 휴고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뤘다.
지금은 하스라를 쓰러뜨릴 방법에 모든 사고 능력을 집중해야 할 때였다.
<제로.>
그런 용우에게 브리짓이 텔레파시를 보냈다.
<이 군주 개체는 우리가 막겠습니다.>
<다니엘 윤과 너, 둘만으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둘이 아닙니다.>
브리짓의 말과 동시에 용우의 앞쪽에서 폭발적인 마력 파동이 발생했다.
콰지직!
얼음상으로 변했던 시신 중 하나가 전신에 갑옷을 두른 존재로 변신한다.
뿐만 아니다. 그 옆의 시신 역시 변신하기 시작했다.
브리짓의 텔레파시가 이어졌다.
<우리 다섯 명이 저것을 막겠습니다. 당신과 저것이 가까이 있으면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니, 전장을 분리해서 가이아 드래곤 처리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구세록의 계약자들이 강림했다.
눈부신 빛이 퍼져 나간다.
그 속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는, 헤드가 인간의 머리통보다도 두 배는 큰 전투 망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한 손으로 쥐고 어깨에 걸쳐 든 것은 백은과 황금의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자였다.
새벽의 해머의 주인, 일본인 구세록의 계약자 사다모토 아키라.
<먼저 가지.>
사다모토 아키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텔레포트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화르르르륵……!
다음으로 불꽃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춤추는 불꽃이 한곳으로 모여서 무기와 사람의 형상을 그려낸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무기는 한국의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불꽃의 활.
새빨간 광택을 흘리는 서양식 대궁이 모습을 드러내고, 불꽃 속에서 나온 갑옷 입은 손이 그것을 잡았다.
화려한 디자인의, 그것도 여성형임을 알 수 있는 새빨간 갑옷은 강렬하게 시선을 붙잡았다.
인도인 구세록의 계약자, 프리앙카.
<…….>
프리앙카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용우를 빤히 바라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내게 볼일이 있으면 말을 하지그래?”
용우의 물음에 그녀가 말했다.
<설령 어떤 원한이 있든 지금은 서로 다툴 때가 아니다. 그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군.>
“혹시 너도 팬텀 관계자라고 고백하는 거냐?”
<내 이야기를 한 게 아니다.>
그녀의 뒤쪽에서 공기가 진동하며 육중한 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둥! 투우웅! 쿠우우우우웅!
그 소리가 점차 커져가면서 공간을 뒤흔드는 굉음으로 화한다.
“그렇군. 저 녀석도 오는 거였나?”
용우가 헬멧 속에서 싸늘하게 웃었다.
울려 퍼지는 굉음의 한가운데서 거대하고 새카만 도끼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서양의 드래곤을 형상화한 것 같은 생김새의 검은 갑옷이 나타나 그것을 쥐었다.
“허우룽카이.”
대만인 구세록의 계약자, 허우룽카이가 강림했다.
그리고 싸늘한 살기가 용우와 허우룽카이, 서로를 꿰뚫었다.
<허우룽카이, 너도 그만둬라. 난 먼저 싸움을 거는 쪽의 반대편을 들 거니까.>
프리앙카의 싸늘한 말에 허우룽카이가 움찔했다.
용우가 잠시 허우룽카이를 쏘아보다가 피식 웃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뭐, 좋아. 어차피 당장 처리할 생각도 아니었으니까. 오늘은 열심히 싸우고, 살아남아서 남은 삶을 즐기도록 해. 특별히 허락해 주지.”
<핏덩이 같은 애송이가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그래그래. 지금 마음껏 허세를 부려둬라. 미켈레와 엔조 모로가 그랬던 것처럼. 둘이 죽을 때쯤의 태도가 어땠는지는 조만간 알게 될 거야.”
<…….>
그 말에 허우룽카이가 움찔했다.
그를 바라보는 용우의 눈에는 허세를 부리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허우룽카이의 목숨 따위는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를 꺼내듯이 쉽게 여기는 듯한 오만함이 철철 흘렀다.
용우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렇지. 정신 공격을 조심해라.”
<정신 공격?>
“저 하스라라는 놈은 텔레파시를 이용해서 정신을 공격한다. 너희들이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공격일 테니 정신 방어계 스펠이 있다면 미리미리 쓰고 싸우는 게 좋을 거야.”
용우는 그렇게 충고까지 남기고 텔레포트해서 사라졌다.
<…뭐든지 뜻대로 될 거라고 착각하지 마라, 애송이.>
허우룽카이는 이를 갈며 프리앙카와 함께 텔레포트했다.
온통 새하얗게 얼어붙은 전장에서, 전신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존재가 그들을 반겼다.
<반갑구나, 사랑스러운 대적자들.>
인류 문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지닌 5명을 앞에 두고, 빙설의 군주 하스라는 들떠 있었다.
쿠구구궁……!
그 뒤쪽에서 가이아 드래곤의 거체가 얼어붙은 땅을 헤치며 꿈틀거린다.
하스라가 주변을 휘 둘러보더니 말했다.
<흠, 나와 가이아 드래곤을 떨어뜨려놓고 싶은 모양이군. 빙설의 창을 가진 저 이상한 대적자를 나와 가까이 두는 건 위험하니까……. 그렇지?>
<종말의 7군주, 너희들의 목적은 뭐냐?>
다니엘 윤이 그 말을 무시하고 묻자, 하스라 역시 그 말을 무시하고 대답했다.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러자 가이아 드래곤이 포효하며 땅속으로 들어갔다.
그 기척이 고속으로 서용우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낀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당혹감을 느꼈다.
<자, 이제 그대들이 바라는 상황이 되었다.>
하스라가 양팔을 펼치며 말했다.
<이 귀중한 만남을 즐길 시간이다.>
그리고 순백의 충격파가 그들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