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세계의 귀환자-84화 (8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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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속한 우주가 아닌 다른 어딘가.

지구 인류가 그 존재를 추측할 뿐, 관측하지 못한 ‘다른 세계’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 세계와 지구가 속한 세계의 경계, 물질이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정보만이 모든 것을 정의하는 어딘가에 일곱 의지가 모여 있었다.

그것은 불꽃의 의지였다.

광휘의 의지였다.

빙설의 의지였다.

굉음의 의지였다.

새벽의 의지였다.

뇌전의 의지였다.

대지의 의지였다.

그들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군.>

<그래. 어째서 기둥이 사라졌지?>

<아직 누구도 기둥의 제물을 수확하지 못했는데 기둥이 사라지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상한 일이라면 그것만은 아니지. 이번에는 시작부터 이상했잖아.>

<그건 그렇지.>

<확실히. 어비스가 끝났는데도 만찬을 즐길 수 없었어.>

<기둥에 모인 제물의 영혼도 이상할 정도로 적고.>

<9등급 몬스터를 일찍 투입해 볼 수 있었던 건 좋았지만.>

<하지만 설마 9등급 몬스터가 저 세계에 자리 잡을 줄은 몰랐지.>

그들은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규칙이 무너지고 있어. 앞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 기분 나빠.>

<난 좋은데. 승산이 높아졌잖아?>

<기둥이 2개나 사라져서 장벽이 약해졌어. 열쇠도 하나 손에 넣었고, 영혼도 꽤 많이 수집했지. 그런데 8번째 문이 열리길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강하게 몰아쳐도 될 것 같은데.>

<그럴지도.>

<확실히 그럴지도.>

그런 그들 사이로 다른 하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번에는 2개를 열 예정이었지?”

정신파로 의사소통하는 일곱 의지와 달리 육성으로 이야기하는 존재였다.

자신들과 다른 이질적인 의지가 대화에 끼어들자 7개의 의지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넌 아직 나설 때가 아냐.>

그러자 그 누군가가 말했다.

“그건 무대가 계획된 대로 굴러가고 있을 때의 이야기지. 벌써부터 기둥이 사라졌으면 나갈 수 있잖아? 나갈 수 있는데 굳이 기다릴 이유가 있을까?>

<…….>

“두 개 열지 말고 그냥 하나로 집중하자. 같이 인사나 하러 가자고. 어차피 어긋난 계획을 목숨 걸고 지킬 필요가 있을까?”

도발적인 말에 일곱 의지가 술렁였다.

“여는 장소는 이 근처로 하고. 너희들 중에 둘이나 여기서 격파당했다며? 그건 인사조차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고.”

그리고…….

* * *

“70미터급이면 8등급이군.”

용우가 태블릿으로 브리핑 자료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김은혜가 대꾸했다.

“예. 이미 8등급이 있는 건 확인되었어요.”

“선행 투입 된 부대가 있는 건가?”

“개성의 팀 노스가드가 선행 정찰 역을 자처하고 나섰어요.”

용우는 수직 이착륙 수송기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10분 전, 헌터 관리부의 긴급 콜을 받고 제로의 신분으로 구 북한 영토였던 개성으로 향하는 중이다.

구 DMZ 지역이 재해 지역이 되었지만 그건 8등급 이상의 몬스터가 자리 잡아서는 아니었다.

인간이 살지 않는 지역이라 게이트가 열려도 방치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구 북한 영토로 가는 도로 주변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개성은 13년 전에 전술핵이 떨어져서 도시가 초토화되었던 곳이다.

한국 정부는 구 북한 영토를 병합하고 관리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개성을 재건할 필요성을 느꼈다.

군부대를 배치하고, 주거지를 개성으로 옮기는 이들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정부 지원금 없이는 살아가기가 막막했던 북한 난민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개성은 성공적으로 재건될 수 있었다.

즉, 지금의 한국에 있어서 개성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주 지역인 것이다.

“어느 정도의 팀이지?”

“35미터급까지는 공략해 내는 팀입니다.”

“용감하군…….”

용우는 놀랐다.

그 정도 수준의 팀이라면 50미터급에만 진입해도 뭔가 해보기도 전에 크게 피를 볼 위험이 있다.

그런데 70미터급에 선행 정찰 역할을 자처하고 나서다니, 아무리 자신들의 터전을 위해서라지만 그 용기에 감탄할 수밖에.

“게이트 브레이크까지의 시간은… 앞으로 27시간 37분인가.”

용우는 실시간으로 브리핑 자료에 표시되는 정보를 보고 중얼거렸다.

“애매한 시간이에요. 동일 인원이 재투입되기는 힘들겠죠. 해봤자 처음에 이탈한 인원들이 한 번 더 투입되는 정도인데, 이것도 8등급을 공략하기 전까지의 시간이 길어지면 불가능할 수도 있고요.”

“그렇겠지.”

게이트 제압 작전을 기준으로 27시간이면 긴 시간이다.

하지만 게이트 규모가 70미터급이라면 길다고 볼 수 없다.

8등급 몬스터를 공략하는 것은 7등급 몬스터를 공략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일단 주변의 위험부터가 크다.

8등급이 존재하는 게이트 안에는 반드시 7등급도 존재한다. 2마리나 3마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것들을 8등급에게서 떨어뜨려서 해치우는 것만으로도 전력이 상당히 분산되고 만다.

그리고 8등급은 허공장이 7등급보다 훨씬 견고할 뿐만 아니라 회복력도 빠르다. 어중간하게 화력을 집중해 봤자 허공장을 깎아내는 것보다 회복되는 게 더 빨라서 전혀 대미지를 주지 못할 수도 있다.

작전 시간이 길어진다면 마력이 뛰어난 헌터들을 로테이션제로 돌리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27시간이면 치열한 작전을 수행하면서 체력과 마력을 다 쓰고 이탈한 헌터들이 충분히 회복하고 다시 돌아오기에는 짧다.

“그래도 뭐, 너무 걱정하지 마.”

브리핑 자료를 다 본 용우가 태블릿을 김은혜에게 주면서 말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거군요?”

“있어.”

“뭔지 알려주면 안 돼요? 불안해 죽겠는데.”

그것은 김은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전부의 심정일 것이다.

70미터급이 개성에서 열리는 순간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다.

그리고 해외에서는 희생양이 자신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들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다들 물자와 병기 지원을 약속했지만 헌터 파병에 대해서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난색을 표하는 중이다.

“높으신 분들은 전술급 레이저 수소폭탄을 투입하느냐 마느냐로 싸우고 있다고요.”

“음? 그건 그냥 투입하면 안 되나? 8등급에게는 안 먹히겠지만 6등급까지는 싹 쓸어버릴 수도 있을 텐데.”

레이저 수소폭탄은 구형 핵폭탄과는 달리 방사능 낙진 걱정이 없다. 70미터급 게이트의 내부 필드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초반에 저등급 몬스터 개체수를 줄이는 용도로는 꽤 유용할 것이다.

김은혜가 한숨을 쉬었다.

“게이트 내부 필드가 아무리 넓어도 폐쇄 공간이긴 하잖아요. 거기서 레이저 수소폭탄을 터뜨릴 경우, 그다음에 큰 시간 지연 없이 작전 수행이 가능할지의 문제가 있는 거죠.”

“아, 그건 그렇군.”

“하지만 70미터급 정도면 폭격기를 동원하는 게 가능하니까 항공 폭탄은 다량 투입될 거예요.”

게이트 제압 작전 시에 투입할 수 있는 화력이 제한되는 가장 큰 이유는 게이트의 크기다.

하지만 70미터급 정도 되면 대형 폭격기도 인근 군부대에서 출발한 뒤 고도를 낮춰서 진입하는 게 가능해지기 때문에, 전술의 폭이 상당히 넓어진다.

한국 정부는 이번 작전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따라서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자들은 비용 걱정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

한국 최정예 헌터들이 아낌없는 지원을 받아가면서 8등급 몬스터와 싸우게 될 것이다.

용우가 말했다.

“믿는 구석은… 일단 현장에 가보면 알게 될 거야.”

* * *

개성에는 그 어느 작전 때보다도 거대한 캠프가 구축되어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열린 70미터 이상의 검은 구멍은 빌딩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팀 크로노스, 팀 블레이드, 팀 이그나이트는 이미 도착했어요. 그리고 각 팀에서 차출된 상위 클래스 헌터들이 집결 중입니다.”

“팀 노스가드는?”

“1명 전사, 3명 중상을 입고 후퇴했어요. 정찰 데이터의 진행도는 추정 37% 정도.”

“…….”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목숨을 희생한 셈이다. 용우는 누군지 모르는 전사자에게 속으로 조의를 표하고는 캠프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술렁였다.

검은 바이저로 얼굴을 가린 정체불명의 헌터, 제로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캠프에 퍼져 나가면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백원태가 나와서 용우를 맞이했다.

“왔군요.”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아요. 노스가드가 목숨을 걸고 아껴준 시간을 헛되이 하지 말자는 분위기입니다.”

“다니엘 윤은?”

“와 있습니다. 차준혁을 자기네 부대와 같이 투입하더군요. 본인은 나서지 않을 생각인지…….”

다니엘 윤이 여기에 와 있다면 그가 구세록의 계약자, 광휘의 검으로서 게이트 내부에 출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계속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지휘부에 있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아니, 나설 겁니다.”

“음? 어떻게 말입니까?”

“저건 가짜입니다.”

용우는 멀리서 차준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다니엘 윤을 보더니 말했다.

백원태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건 다니엘 윤 본인이 아닙니다. 성좌의 힘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아마 후순위 계승자인 모양이군요. 이런 때를 위해 교육시킨 사람인가 본데…….”

다니엘 윤으로 행세하고 있는 자는 다니엘 윤이 아니다.

분명 체격도, 분위기도 똑같다. 목소리마저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용우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성형수술만으로는 저렇게 안 될 테니 스펠을 적용했겠고… 표정이나 태도는 평소에 훈련을 많이 한 부분이겠군.’

다니엘 윤을 여러 번 본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면 대역으로서의 완성도가 대단히 높다는 뜻이다.

아마 평소에도 종종 다니엘 윤을 대신하고 있지 않았을까?

용우는 다니엘 윤의 철두철미함에 감탄했다.

‘재미있는 놈이군. 비밀을 계승할 자도 찾았고, 자기가 죽은 뒤의 일까지 고려하고 있는 건가?’

구세록의 계약자 광휘의 검을 대신할 후계자.

팀 이그나이트의 CEO 다니엘 윤을 대신할 대역.

다니엘 윤은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다. 스스로가 언제 죽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도록.

‘말로만 인류를 지킨다고 떠들어대는 놈은 아니군.’

용우는 그런 다니엘 윤의 태도에 흥미를 느꼈다.

‘어쨌든 광휘의 검이 오고, 거기에 브리짓 카르타가 오겠다고 한 이상 8등급은 그리 걱정할 상대가 아니지.’

하지만 그럼에도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든다.

애비게일 카르타가 경고한 것이 머릿속 한구석에 꺼림칙한 얼룩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백원태가 물었다.

“용우 씨, 우리 쪽과 같이 가겠습니까?”

“아뇨. 단독으로 가겠습니다. 지휘부의 요청에 따라서 유연하게 움직이죠.”

“하긴 그게 낫겠군요.”

“아, 사장님한테 부탁할 게 있습니다.”

“뭡니까?”

용우는 백원태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하고는 한 사람을 찾아갔다.

캠프에는 정비병들을 비롯한 기술 인력들도 잔뜩 와 있었는데, 그중에는 이질적인 사람 한 명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쓰고 하얀 가운을 입은 키가 작은 여자, 권희수 박사였다.

이번 작전부터 투입될 신무기 점검 작업을 지휘하던 그녀가 용우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제 요구 사항은 들었어요?”

“들었습니다.”

“어때요?”

용우는 헬멧 너머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믿어도 될지, 아직도 확신이 안 서는군요.”

권희수의 능력을 믿는다. 그리고 그녀가 해온 일들을 믿는다.

그러나 권희수라는 인간을 믿을 수 있을까?

권희수의 요구 사항은 용우 입장에서는 리스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권희수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제가 목숨을 걸면 어때요?”

“당신을 죽여야 할 이유가 생겨서 죽이는 거라면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용우의 살벌한 말에 권희수가 그게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당신이라면 그런 수단을 갖고 있을 것 같은데요?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할 것 없이 계약을 어기는 것만으로 목숨이 날아간다거나…….”

“픽션에 너무 심취했군요.”

“세상이 너무 픽션스러워져서요. 어쨌든 내 목숨을 담보로 당신의 신뢰를 살 수 있다면, 괜찮은 장사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는 권희수에게서는 자기 목숨이 걸렸다는 긴장감이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과연 이 사람이 목숨의 무게를 이해하고 말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용우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죽는 게 무섭지 않습니까?”

그녀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말의 무게를 몰라서가 아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그런 이상한 태도가 느껴졌다.

권희수는 잠시 용우를 바라보다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살아 있는 게 더 힘들어요.”

“…….”

“죽을 만큼 힘내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가 없어요.”

헛소리로밖에 안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용우는 그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지친 표정으로 웃는 권희수에게서 처음으로 진심을 엿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입니다.”

“뭐가요?”

“박사님 말에 공감한 거.”

“아, 그건 유감이네요. 당신에게 한 말들, 전부 죽을힘을 다해서 한 말들이었는데.”

권희수가 여느 때의 멍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말하자 용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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