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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우는 애비게일 카르타와 협력 관계를 체결하기로 했다.
그녀는 전투에 나설 수는 없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미국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어둠의 실세다.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차고 넘쳤다.
그녀와 협력을 약속한 다음에는 다시 브리짓이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끝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스펠을 원한다고?”
애비게일 카르타는 용우가 각성자에게 스펠이나 특성을 추가로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수단이 스펠 스톤이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 정보국은 아직 모르고 있는 건가?”
“예. 하지만 아무래도 당신의 여동생의 변화가 의미심장하고, 당신이 뭔가 추가적으로 누군가에게 스펠을 준다면 결국 확신할 거라고 봅니다.”
“그럼 조만간 알아내겠군.”
“이미 누군가에게 주고 있는 거군요.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 너희들은 뭘 원하지?”
“힐러 스펠과 저격수 스펠, 그리고 공간 간섭계 스펠 전부.”
그 말에 용우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물었다.
“혹시 한 사람에게 줄 생각인가?”
“지금으로선 그렇습니다. 혹은 당신이 원천 기술을 팔 의향이 있다면…….”
용우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물었다.
“그 한 사람은 휴고 스미스고?”
“…….”
“맞군. 미국의 차세대 에이스라서가 아니라 애비게일 카르타가 선택한 인물이라서겠지. 성좌의 무기를 계승할 자로 선택되어도 특성과 스펠은 어쩔 수 없나 보군.”
“…그렇습니다.”
브리짓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휴고는 공식적으로 세계 최고의 마력 보유자다. 그리고 6세대 각성자 중에서는 각성자 튜토리얼에서 세계 최고 성적을 기록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즉 6세대 중에서는 가장 특성과 스펠 보유량이 풍부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6세대 각성자로서의 한계는 넘을 수가 없었다.
그의 헌터로서의 자질을 생각하면 그건 대단히 아까운 일이다. 특성과 스펠을 보강할 수 있다면 그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성장할 것이다.
“당장 구세록의 계약자로서 그 힘을 행사하고 있는 당신은 필요성이 적지만, 다음 순위인 휴고 스미스에게는 필요하겠지. 다만 싸게 받아 갈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일전에 뜯어내신 것보다는 비싸게 지불할 테니까요.”
일전에 지불한 금액이 4억 달러다. 그것보다 거금이라면 한화로는 조 단위의 금액이 될지도 모르는데도 당연히 지불하겠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쌓아둔 돈이 어마어마하긴 한 모양이다.
참고로 용우는 팀 크로노스와 팀 블레이드 상대로는 훨씬 저렴한 가격을 책정해 주었다. 그쪽도 막대한 대가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두 기업이 대상이 되는 헌터에게 특별한 옵션을 걸고 투자해 볼 만한 금액으로는 맞춰줬던 것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공익적인 차원에서 내린 결단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닥쳐오는 게이트와 몬스터의 위협을 생각하면 헌터들을 조금이라도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용우 입장에서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팬텀과 관련이 없더라도 곱게 봐줄 수가 없는 상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값싸게 내줄 이유가 없었다.
브리짓이 말을 이었다.
“다만 몇몇 기업에서 연구 목적으로 소스를 제공받고 지불했다는 형식이 될 겁니다. 이 건은 정부 예산으로 낼 수는 없어서요.”
“나야 돈만 문제없이 받을 수 있으면 상관없어.”
용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하지만 힐러 스펠과 저격수 스펠은 가능해도 공간 간섭계는 불가능해.”
“어째서입니까?”
“공간 간섭계는 시공간 특성이 필요하니까. 내 여동생에게도 주지 못한 힘이야.”
용우는 ‘아직까지는’이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지금 시점에서는 시공간 특성이 우희에게조차 줄 수 없는 힘인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용우는 특성을 스펠 스톤에 담아서 제작하는 게 불가능했고, 아공간에 비축해 둔 스펠 스톤 중에서는 그 시공간 특성이 담긴 게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언젠가는 가능하게 된다.
‘그런 정보를 알려줄 필요는 없지.’
협력 관계를 맺었다고는 하지만 서로 주고받는 거래 관계일 뿐이다.
“표정을 보니 몰랐나 보군. 성좌의 힘을 이용해서 스펠을 쓸 때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지?”
그 말대로였다.
기본적으로 구세록의 계약자들이 쓰는 스펠은 성좌의 무기에 내재된 것들이다. 그 힘으로 변신함으로써 무수한 스펠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라 그 습득 과정이나 하나하나의 가치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힐러 스펠은 줄 수는 있지만, 관련 특성에 대해서는 훨씬 높은 대가를 받아야겠는데. 그만큼 귀하니까.”
“생각 못 해본 부분이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힐러 스펠과 저격수 스펠들부터…….”
“휴고 스미스 본인을 당분간 이쪽에 상주시키도록 해.”
“왜입니까?”
“스펠을 추가로 터득하는 건 사흘에 하나 정도의 페이스가 적합하니까.”
“제약이 많군요.”
눈살을 찌푸리는 브리짓 카르타를 보며 용우는 속으로 웃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거야. 그런 걸 두고 징징거리면 곤란하지.”
“알겠습니다.”
용우와 브리짓은 한동안 이 건에 대한 세부 사항을 조율했다.
그 과정이 끝나자 브리짓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시다시피 조만간 8등급 몬스터를 포함한 게이트가 열릴 겁니다.”
“덕분에 내 스케줄 대부분이 놀고먹는 걸로 채워졌지. 그래서?”
“어디서 열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우리 쪽에는 한 가지 안 좋은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브리짓의 표정이 워낙 심각해서 용우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정보지?”
“이번에 출현하는 건 8등급 몬스터가 아니라 9등급 몬스터일지도 모릅니다.”
“뭐?”
이 말에는 용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서 9등급?’
현 인류에게 있어서 9등급은 그야말로 대적 불가의 재해, 그 자체였다.
“만약 그린란드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출현한다면 다행이겠죠. 하지만 만약 인류의 거주 지역에서 출현한다면 그 충격은 어마어마할 겁니다.”
“그 정보는 확실한 건가?”
그렇게 묻는 용우의 표정도 심각했다.
브리짓이 대답했다.
“반반입니다.”
“다들 빗나가길 바라고 있겠군.”
“예.”
“너희들의 승률은 반은 좀 넘는 걸로 아는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두 명이 사라진 데다가 모두가 적극적이진 않을 테니 승률은 더 낮아지겠죠.”
“모두가 적극적이진 않다…….”
용우가 그 말을 중얼거리며 웃었다.
이유는 물을 것도 없었다.
미켈레와 엔조 모로에게 들은 사실들만 종합해 봐도 충분히 답이 나온다.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9등급 몬스터를 두려워하고 있다.
‘미켈레와 엔조 모로, 그놈들은 자신들이 마모되고 있다고 말했지.’
그들의 정신이 망가진 가장 큰 원인은 9등급 몬스터에게 패배해서 죽음을 유사 체험 한 것이다.
그 경험이 누적될수록 그들의 정신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애비게일 카르타는 PTSD가 너무 심해져서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9등급 몬스터와 싸우는 것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브리짓이 말했다.
“이 건에 대해서만큼은 미리 협약을 맺어두고 싶습니다. 이번 게이트가 세계 어디에 출현하든, 그곳이 인류의 거주 지역이라면 무조건 참전한다는 것으로.”
“한국도, 미국도 아닌 곳이라도 말인가?”
“예. 저는 무조건 갑니다.”
브리짓의 태도는 단호했다.
“왜지? 넌 9등급 몬스터와 아직 싸워보지도 않았을 텐데, 자국민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 이유가 있나?”
“저는 예전에 어머니에게 구원받았습니다.”
아직 애비게일 카르타가 전사로서 싸울 수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건 미국에서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과 프랑스로 여행 갔을 때 일어난 일이었죠.”
“…….”
용우는 그녀의 말에서 생략된 부분을 읽어냈다.
브리짓 카르타는 애비게일 카르타의 양녀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애비게일 카르타를 제외한 다른 가족이 없다.
즉 그녀는, 카르타라는 성씨를 쓰기 전의 브리짓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재해에 휩쓸려 가족을 잃었던 것이다.
브리짓은 굳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지 않았고 용우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좋아. 받아들이지.”
용우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권희수 박사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좀처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그녀로서는 정말 희귀한 일이다. 그 표정을 본 연구원들은 다들 자기 눈을 의심했다.
“이거, 진짜인가요?”
“예.”
그녀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든 것은 팀 크로노스의 사장 백원태였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권희수에게 속삭였다.
“듣는 귀가 없는 곳이었으면 좋겠군요.”
“좋아요.”
권희수는 백원태를 자신의 개인 연구실로 이끌었다.
“민수, 외부에서 엿들을 수 있는 모든 회선을 차단해.”
[예.]
그녀의 개인 인공지능 비서가 명령한 작업을 수행했다.
“8등급 몬스터의 시체라니, 이걸 대체 어디서 손에 넣었죠?”
백원태가 권희수에게 보여준 사진은 8등급 몬스터의 시체였다.
몬스터들은 7등급부터는 생명체라는 느낌이 희박하다.
그렇기에 그 시체들은 일반적으로 생명체의 시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이미지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예를 들면 7등급 몬스터 암흑거인은 죽고 나면 부서진 코어, 그리고 대량의 마력석과 본래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질의 덩어리들을 남긴다. 이것은 정말로 귀중한 연구 재료였다.
“박사님과 비슷한 루트일 겁니다.”
“…….”
그 말에 권희수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녀이기에 실로 미미한 변화였다. 하지만 그녀를 오래 보아온 백원태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다니엘 윤은 아닙니다.”
“왜 갑자기 윤 사장님 이야기를 하시죠?”
“시치미 떼셔도 소용없습니다. 그가 광휘의 검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으니까.”
“…….”
권희수의 표정이 굳었다.
곧 그녀가 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죠?”
“당신이 언터처블일 수 있는 이유를 그가 만들어줬다는 것.”
권희수는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마력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녀는 1세대 각성자이며, 마력 연구 분야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될 정도로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한국 기업들이 그녀가 개발한 원천 기술로 벌어들이는 외화는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연 그녀가 누리는 환경이 당연한 것일까?
세상은 실력이 있다고 무조건 대접받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굴러갔다면 인류가 역사에 기록한 문제의 9할 정도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특히 젊은 나이에 그녀 정도의 기반을 얻으려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능력이 있다.
바로 정치력이다.
매우 뛰어난 정치력을 갖추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실력이 있어도 권력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권희수는 정치력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런 일에 신경 쓰는 것을 너무나 싫어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직함 이상의 권력을 갖고 있다. 연구소장은 물론이고 한국의 학계와 산업계의 거물들도 감히 그녀에게 함부로 굴지 못한다.
“초기에 당신을 전장에서 빼내서 연구소에 배치한 것도 그가 한 일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1세대 각성자들은 대체 불가능한 전력이었다.
아무리 지금의 헌터들보다 약했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몬스터에게서 최소한의 승리라도 거두기 위해서는 그들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전력이 학자로서의 능력이 뛰어난 것 같다고 전선에서 빼내어 연구소에 넣는다?
군부의 권력이 절대적이던 시절에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신의 연구 성과 일부는 그가 샘플을 제공해 줬기에 가능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당신에게 어떤 능력을 줬다는 것.”
“어떻게 알았죠?”
“박사님은 용우 씨를 너무 많이 봤습니다.”
“음? 제로 말인가요?”
“예.”
“그가 왜요?”
권희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