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러갔다.
애비게일 카르타는 용우의 눈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를.
“애비게일 카르타.”
긴 침묵 끝에 입을 연 용우가 웃었다. 순간적으로 애비게일 카르타가 움찔했을 정도로 날카로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너는 재미있군. 지구에서의 정보만으로 나와 같은 답에 도달하다니.”
애비게일 카르타의 답과 용우의 답은 같았다.
용우는 그 사실에 전율했다.
“네 말대로다. 아마도 우리는 죽음으로써 하나의 의식을 완성하는 제물들이었으며…….”
어비스의 각성자들은 서로 죽일수록 강해져 갔다.
그것은 마치 24만 명의 힘이 한 명에게로 수렴되어 가는 것 같은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한 명이 죽었을 때, 그 한 명에게 수렴되었던 힘은 어떻게 될까?
더 이상 담을 그릇이 없는 힘은 그대로 흩어져 소멸해 버리는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용우는 자신이 회피한 결말을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이 죽는 순간, 최후의 전장에는 그릇이 나타났을 것이다.
성좌의 아바타라는 그릇이.
인간의 목숨을 제물로 받고 강림하는 그 강대한 힘의 화신은 분명 용우가 죽었을 때도 강림했을 것이다.
어비스에서 가장 강대한, 마지막 제물의 힘을 담아내는 그릇의 역할로.
그릇에 담긴 힘은 분명 어비스가 아닌 다른 어딘가, 아마도 지구로 옮겨졌을 터.
“내가 살아남았기에, 너희들은 완전해지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용우는 살아남았다.
예정된 의식은 불완전하게 끝났고, 최후의 생존자에게 모인 강대한 힘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채로 남았다.
용우의 긍정에 애비게일 카르타의 눈이 가라앉았다.
“역시 그렇습니까.”
“하지만 모르겠군.”
“뭘 말입니까?”
“내가 죽어서, 24만 명 모두가 죽었을 경우에 완전해지는 것이 너희들만이었는지를 모르겠어.”
“…그건 무슨 뜻입니까?”
애비게일 카르타의 표정이 굳었다.
용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모든 것이 누군가 준비한 거대한 게임 같아.”
“게임?”
“멸망과 구원이 한 세트로 패키징된 게임. 우리가 어비스로 사라진 후 지구에서 일어난 일들은 잘 짜인 무대 같지 않나?”
이계의 7성좌의 힘을 가진 구세록의 계약자들.
그리고 그들과 대칭되는 종말의 7군주.
인류를 위협하는 게이트 재해와 몬스터.
그들의 출현을 기다렸다는 듯 인류에게 내려진 구원의 길, 각성자 튜토리얼.
“이 모든 것이 한 세트라면, 내가 없었을 경우에 강해지는 게 과연 너희들만이었을까? 각성자 튜토리얼에서 주어지는 힘도 더 컸을 수도 있고, 군주 개체의 힘도 더 강하지 않았을까?”
“…확실히, 그랬을 수도 있겠군요.”
애비게일 카르타가 수긍하자 용우가 말했다.
“더 물어볼 게 있나?”
“물론 많습니다만, 하나하나 이야기하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군요. 앞으로 차분히 정보를 나눠보지요.”
“그럼 이제 가지.”
용우가 몸을 일으켰다.
애비게일 카르타는 어디로 가냐고 묻지는 않았다.
“열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이제 함정일 가능성은 의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함정이었으면 좋겠군. 내가 왜 함정이어도 상관없다고 하는지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애비게일 카르타는 미소 지으며 뇌전의 사슬을 소환했다.
파지지직……!
그녀는 왼팔에 뇌전의 사슬을 휘감은 채로 허공을 가리켰다.
-오버 커넥트.
스펠이 발동하면서 허공의 한 지점에 검은 구멍이 발생했다.
두 사람은 그 구멍 안으로 들어갔고, 구멍은 곧바로 닫혔다.
* * *
2011년 12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관측 시스템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지상 572킬로미터 지점에 수수께끼의 거대 구조물이 ‘출현’했다.
외부에서 지구 중력에 이끌려 날아온 것이 아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홀연히 나타나서 NASA의 관측 시스템에 포착되었다.
NASA 직원들이 놀라는 사이, 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50층 빌딩만큼이나 거대한, 새카만 기둥이 7개로 찢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래 합체, 분리가 가능한 구조물이 변형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물컹한 젤리를 잡아 찢듯이 7개로 찢어졌다.
카메라를 통해서 관측하는 입장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싸구려 영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지구의 7개 포인트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순간부터, 홀연히 사라졌죠.”
하지만 사실은 관측할 수 없었을 뿐, 지구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날, 지구상에서 단 일곱 명만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검은 유성을 보았다.
영국 애딘버러에서 다니엘 윤이.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미켈레가.
프랑스 리옹에서 엔조 모로가.
인도 바라나시에서 프리앙카가.
대만 가오슝에서 허우룽카이가.
일본 치바에서 사다모토 아키라가.
미국 애리조나에서 애비게일 카르타가…….
“우리 말고는 아무도 그 검은 유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그때 이미 구세록의 계약자로 선택받았던 것이리라.
“우리는 검은 유성을 보는 순간부터 홀린 듯이 그것이 떨어진 지점으로 갔습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하늘을 가로질러 땅에 떨어져, 커다란 구멍을 뚫고 지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아마 우리 중 누구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다들 일종의 최면 상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범한 인간이 아무런 장비도 없이 지저 깊숙한 곳까지 뚫린 구멍을 내려갈 수 있었을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용우가 말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게 있었다는 거군.”
두 사람은 불빛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에 있었다.
축축하고, 흙냄새가 나는 차갑고 캄캄한 장소였다.
미국 애리조나 주의 어딘가.
원래는 지상부터 이어진, 300미터 이상 이어지는 구멍이 있었다. 하지만 애비게일 카르타가 그 구멍을 막아버리고 지하의 공동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그 공동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거대한 기둥이었다.
소재를 알 수 없는, 매끈한 표면의 검은 기둥이다.
그 표면에는 스크래치처럼 수많은 문양이 새겨져 있고 한복판에는 탑의 모습이 있었다.
우우웅…….
애비게일 카르타가 바라보자 그 표면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스크래치처럼 새겨진 문양들이 빛을 발해서 주변을 은은하게 밝힌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한복판에 새겨진 빛나는 탑의 모습이었다.
용우가 물었다.
“이 탑은 각성자 튜토리얼인가?”
“그렇습니다.”
그 탑에는 각 층마다 하나씩, 총 12개의 문이 달려 있었는데, 그중 1층부터 7층까지의 문은 활짝 열린 채로 빛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게… 어비스겠군.”
탑의 아래쪽에는, 탑보다 10배는 거대하게 그려진 영역이 있었다.
온통 죽음과 희생을 암시하는 표정과 문양들이 어둡고 핏빛을 띤 선으로 음각된 것을 보는 용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표면에 새겨진 것들이 구세록의 기록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육안으로 보고 읽는 것은 불가능하죠.”
잘 보면 그것이 단순한 문양이 아니라 법칙성을 지닌 문자의 집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보고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일에 정통한 학자들이 모여서 본격적으로 연구하지 않는 한에는.
그리고 구세록의 계약자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빙설의 창으로 접촉해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용우는 그 말에 따라서 빙설의 창을 아공간에서 꺼냈다.
사아아아아…….
주변의 습기가 얼어붙으면서 하얀 얼음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용우는 얼음처럼 투명한 질감의 창을 쥐고 그 끄트머리를 구세록에다 가져다 대었다.
[접속 권한 확인. 7번째 장의 주인이 접속을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텔레파시가 울려 퍼졌다.
‘놈들이 쓰던 언어다.’
어비스의 각성자들에게 지침을 내리던 유령 같은 존재들이 쓰던 언어다.
어차피 말을 하면서 동시에 발하는 텔레파시를 통해서 대화가 이루어졌기에 그 언어를 습득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단어나 뉘앙스는 기억에 남아 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용우의 전신에서 증오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파지지직…….
구세록의 표면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자 용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 되지.’
마침내 적의 실체를 잡을 수 있는 단서를 얻었다. 지금은 냉정해야 할 때였다.
‘악의가 없다는 건 알았지만… 역시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용우는 등을 돌린 채로도 애비게일 카르타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악의가 없다는 사실은 자신의 능력으로 통찰했지만, 마음이 부서진 인간이라면 무언가를 공격하는 데 굳이 악의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필요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공격을 가해올 경우를 대비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비게일 카르타는 지금까지는 확실하게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멸망의 군세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용우의 머릿속에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서없이 난잡한 문장들이, 그 이상으로 난잡한 이미지와 함께 마구 흘러들어 온다.
[이 세계의 태양이 730번 뜨고 질 때마다 문이 열리리라.]
치지직…….
[문은 총 12개이며, 도전하는 자만이 구원의 파편을 주우리라.]
지직…….
[7번째 혹은 8번째의 문이 열릴 때, 그 안에는 성좌의 빛이 드리운 그림자가 있으리라.]
[그림자가 별의 주민에게 쥐어지는 순간, 재앙의 첨병들에게 지혜의 빛이 내려오리라.]
지지지지직…….
[몽상가가 꾸는 꿈은 종말의 꿈이리라.]
[9번째 문이 열릴 때, 왕래자가 다시는 닫히지 않을 문을 열리라.]
[왕래자가 노래하는 것은 파멸의 서곡일 것이다.]
치지지지지지직……….
[파멸의 파도가 밀려올 때, 발목까지 잠김을 주의하라.]
[종말의 7군주가 영혼으로 차린 만찬을 즐기리라]
[파멸이 별의 지표를 뒤덮고 종말의 7군주가 그 위에 발 디딜 때, 별의 운명은 종언을 고하고 죽은 자들은 신세계의 꿈을 꿀 것이다.]
치지직……….
[…….]
치이이이이이이이이익…….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문장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각각의 문장마다 수십의 문장과 이미지가 노이즈와 함께 딸려 들어왔다.
한참 동안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되새기던 용우가 중얼거렸다.
“TV 수십 개를 동시에 틀어놓은 것 같군. 정신 사나워.”
“정보에 집중하기 쉽지 않은 구조입니다. 익숙해지면 듣고 싶은 것만 취사선택이 가능해지지요.”
“그리고 꽤나… 잘난 척하는 내용이군.”
“그건 생각 못 해본 반응이군요.”
애비게일 카르타가 피식 웃자 용우가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이걸 기록한 놈은 알기 쉽게 설명할 생각이 없잖아. 빙빙 돌려서 그럴싸한 척하는 문장을 써놓고 절박한 사람이 거기에 매달려서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변태 새끼겠지.”
용우는 빙설의 창을 거두며 말했다.
“어쨌든 왜 너희들이 구세록의 기록을 예언처럼 떠받들었는지는 알겠군. 이 모든 것이 구세록을 보내온 다른 세계에서는 이미 한번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 건가?”
“그렇습니다.”
“그게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나? 예를 들면 너희들에게 주어진 힘을 포함해서 이 모든 것이 다른 세계 놈들의 침략 계획이라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기록된 구조물이 나타나고, 그 모든 것이 예언이었던 것처럼 착실하게 현실화된다.
구원과 재앙이 한 세트로 이루어진 패키지라는 점에서 용우는 구세록이 얼굴 모르는 누군가의 선의에서 비롯된 물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물론 생각했습니다.”
“바보는 아니었군.”
“하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빠르게 배제했습니다.”
“어째서지?”
“그건 너무 절망적이었으니까요.”
“…….”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모든 것이 누군가의 유희일 뿐이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으니까요.”
때로 사람에게는 거짓말이 필요하다.
진실로부터 도망치고 외면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인류를 지킨다는 사명감을 강요받은 구세록의 계약자 7명에게는 누구보다도 그런 도피처가 절실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침략 계획이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체계적으로 우리에게 힘을 줄 이유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모든 것이 재앙을 막기 위한 한 쌍의 주술 같은 게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한 쌍의 주술이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주술이나 마법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뉘앙스였지요.”
“확실히.”
용우도 그 점은 동의했다.
어비스에서 인간이 서로를 죽이고 힘을 흡수하는 것도, 인간의 목숨을 제물로 삼아 성좌의 아바타가 강림하는 것도…….
지구에서 죽은 각성자의 시신을 이용해서 구세록의 계약자들이 죽음을 회피하는 것도…….
그 모든 것들은 야만과 미신이 지배하던 옛 시대의 어두운 향취를 풍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구세록을 통해 예언된 일들도 침략자들을 막기 위해 설계된 주술 같은 거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그게 가장 긍정적인 가능성이겠지.”
용우는 차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전제를 그대로 놓고 생각을 뒤집어보면, 인류가 힘을 얻는 것이 괴물들이 지구를 침공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일 수도 있겠지.”
“…….”
애비게일 카르타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외면하고 싶었던 부분을 송곳처럼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 표정을 보며 용우는 상상했다.
그들이 걸어온 길을.
수도 없이 절망적인 상상을 해왔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자신들이 가는 길이 옳은 이유를 만들어왔으리라. 그들의 마음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었고, 그 상처 위에 붙인 위안과 합리화는 얼마나 덧댔는지 셀 수도 없는 누더기일 터.
“어느 쪽인지는 구세록만으로는 알 수 없을 것 같군. 혹시 7개의 구세록은 모두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나?”
“예.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당신의 구세록에 접촉해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나의 구세록인가…….”
용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미켈레의 구세록은 그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엔조 모로의 구세록도.
하지만 용우는 그 위치를 모른다.
‘성좌의 힘을 받아들이는 걸 거부했기 때문일지도.’
아무래도 성좌의 힘을 받아들여 변신하는 과정 없이는 주어진 권능을 다 쓸 수가 없는 것 같다.
용우는 일단 그 문제에 대한 생각을 미뤄두고 말했다.
“그럼 답을 구할 곳은 여기가 아니겠어.”
“그럼 어디입니까?”
“뻔하잖아.”
용우는 캄캄한 어둠이 지배하는 위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게임 감각으로 쳐들어온 침략자 놈들에게 고통을 가르쳐 주면서 물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