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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동안 비밀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그 비밀을 알리지 않고, 그저 조용히 무관심 속에서 잊힌 채 군중 속 얼굴 없는 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사람이.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었다.
그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고 그가 품은 비밀이 그렇게 만들었다.
‘영원히 지켜지는 비밀은 없다.’
용우는 딱히 그 말을 신봉하지는 않았다.
영원히 지켜지는 비밀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저 말이 진리라고 착각하게 만든, 지켜지지 못한 수많은 비밀들이 있을 뿐.
하지만 동시에 용우는 자신의 비밀이 영원히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은 이런 날이 오는군.’
용우는 아침에 자신의 휴대폰으로 날아온 메시지를 보며 생각했다.
억울하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오랜 시간 동안 비밀이 지켜졌다고 생각한다.
비밀을 아는 자가 수십 명이 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산 것도 아니고 제로의 신분으로 그토록 비정상적인 활약을 해왔는데 비밀이 계속 지켜지길 기대하면 그것도 도둑놈 심보다.
정말로 비밀을 감춘 채 숨어 사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면 헌터 일 따위는 하지 말고 조용히 일반인으로 살았어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스터 서. 아니면 제로라고 불러드리는 편이 더 나을까요?”
용우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상대가 또박또박한 발음의 한국어로 말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관광객처럼 입고 있는 갈색 머리칼의 백인 여자는 키가 용우와 비슷할 정도로 크고 신체 비율이 좋았다.
“제로로 하지.”
“알겠습니다.”
브리짓이 고개를 끄덕였다.
‘53명. 많이도 몰려왔군. 주변 건물을 전부 점거해 버렸어.’
용우는 주변에 숨어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 수를 파악했다.
‘각성자는 17명인가. 더 먼 곳에서 저격수가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원거리에 저격수가 대기하고 있다면 그것까지는 알 수 없다.
‘시가지니 저격수 배치 가능 거리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주의해 두는 게 좋겠군. 한국 정부와 협상을 마쳤다고 하니 무력행사를 할 가능성은 낮겠지만…….’
용우는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미국 정보국의 대변자로 온 브리짓 카르타라고 합니다.”
“CIA?”
“CIA는 미 정보국의 일부일 뿐이죠. 그리고 저는 정보국 소속이 아닙니다.”
“정보국 소속이 아닌 사람이 정보국을 대변한다……. 미국은 그런 나라였나?”
“때에 따라서는 그렇습니다. 당신이 알던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지만.”
브리짓 카르타는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이 순간에도 용우는 그녀를 보통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수준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속내를 감추는 데 능숙하군.’
부드럽게 웃고 있지만 그녀는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그리고 주변에 매복해 있는 자들의 상태는 더 심하다. 사소한 계기라도 생기면 폭발할 것 같았다.
그때 브리짓이 말했다.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편한 곳으로 모시고 싶은데, 원하시는 곳이 있습니까?”
“편한 곳이라. 그럼 근처의 건설 중단 된 빌딩 꼭대기로 오도록. 여길 지나서… 저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은 다음 1킬로미터쯤 죽 가면 나와.”
“네?”
“안구에 핏발 세우고 노려보고 있는 인간들은 떼놓고 혼자 오도록 해.”
용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를 지나쳐서 걷기 시작했다.
“잠깐…….”
하지만 용우는 그 옆으로 난 골목길로 돌아 들어가는 순간 사라졌다.
그의 뒤를 따라갔던 브리짓은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하, 0세대 각성자. 역시 하는 짓이 범상치 않군.”
* * *
3개월째 공사가 중단되어 있는, 높다랗게 올라간 철골 뼈대가 앙상하게 드러난 빌딩 꼭대기는 용우가 좋아하는 장소였다.
용우는 정상의 철골 위에 앉은 채 도심의 풍경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2014년 당시의 히트곡들을 흥얼거리면서.
문득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헬기라도 몰고 올 줄 알았는데.”
“한국 정부와 협상하긴 했습니다만 요란하게 행동할 생각은 없습니다.”
올라오느라 힘들었는지 땀을 흘린 그녀가 후우, 하고 한숨을 쉬며 물었다.
“편한 곳으로 가자고 했더니 이런 곳을 고르는 사람은… 아마 당신이 처음일 것 같습니다.”
“당신 개인적으로? 아니면 미 정보국 역사상?”
“후자입니다.”
“그건 좀 괜찮군.”
피식 웃는 용우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선 브리짓이 말했다.
“기분 좋은 풍경이긴 하군요. 어지간해서는 올라와 볼 일이 없는 곳이기도 하고.”
“용건은?”
용우는 그녀의 말을 받아주는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브리짓 역시 자연스럽게 그 대화의 흐름을 받아들였다.
“제로, 우리는 당신이 0세대 각성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겠지. 나에 대해서 알아낸 지 얼마나 되었지?”
“확신한 건 3개월 전이라더군요.”
“알아내고 나서 한국 정부와 협상하는 데 3개월이 걸린 건가?”
“그렇습니다.”
“한국도 많이 컸군. 미국한테 그렇게 깐깐하게 굴 수 있다니.”
“당신이 실종되었던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니까요.”
“하긴 모든 게 달라졌지.”
용우가 공허하게 웃었다.
15년이 지나는 동안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다. 아직까지도 적응이 안 될 정도로…….
“그래서?”
“미국 정부는 당신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이민해 오길 바랍니다.”
“거절이야.”
용우가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브리짓은 웃음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물었다.
“조건도 안 들어보십니까? 꽤나 매력적인 조건이라고 자부합니다만.”
“지금은 어떤 조건이든 들어볼 가치가 없어.”
“안타깝군요. 하긴 당신은 한국에서 재산도, 입지도 충분히 다진 상황이니 굳이 국적을 옮기고 싶진 않겠지요.”
브리짓은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말했다.
“의외로 쉽게 포기하는군.”
“이 문제로 당신을 끈질기게 설득해 봤자 반감만 살 것 같아서요. 플러스보다 마이너스가 크다면 굳이 집착할 이유는 없겠지요. 다만 나중에라도 우리의 제안이 유효하다는 것만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용건은 그걸로 끝인가?”
“물론 아닙니다. 0세대 각성자인 당신이 쥐고 있는 정보를 거래하길 원합니다.”
“대가를 알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지금부터 협상해 볼 생각인가?”
“질답 시간에 대한 대가로 1시간에 100만 달러를 지불하죠.”
100만 달려면 현재 환율로 10억 원쯤 되는 액수였다.
용우 입장에서는 괜찮은 제안이다. 이 나라에 딱히 애국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만약을 대비한 옵션으로 미국 정부와 관계를 맺어두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였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전문가들이 대기 중인가 보군.”
“일단 질문 리스트 정도는 뽑아 왔습니다. 전문가를 데려오는 건 협상이 성사된…….”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였다.
퉁…….
철골을 타고 진동음이 울렸다.
용우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분명히 당신 혼자만 오라고 했을 텐데.”
“Shit.”
지금까지 정중하게 한국어로 말하던 브리짓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그 욕설의 대상은 용우가 아니었다.
퉁…….
철골을 박차고 새처럼 날아오르고 있는 남자였다.
“헤이.”
초인적인 움직임으로 거기까지 올라온 것은 키가 190센티를 넘는 거구였다.
흑발에 연한 갈색 피부, 그리고 어두운 청회색 눈동자를 가진 라티노 청년이 용우를 보며 씩 웃었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브리짓이 그를 쏘아보며 영어로 말했다.
“휴고, 내가 분명히 아래쪽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잖아.”
“오, 브리짓. 너무 잔인한 명령이잖아. 위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0세대 각성자와 너를 이런 곳에서 독대하게 놔둔다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손을 쓸 수가 없다고.”
“넌 지금 내 일을 망치고 있어. 뿐만 아니라 미 정부의 일도 망치고 있는 거야.”
휴고라고 불린 청년을 노려보는 브리짓의 시선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런 그녀에게 용우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준비를 확실히 하고 나서 찾아와. 미국의 일 처리가 이렇게 개판일 줄은 몰랐군.”
용우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어딜 가시나?”
순간 휴고가 원숭이 뺨치는 몸놀림으로 철골을 잡고 점프, 용우의 앞에 내려섰다.
용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브리짓 카르타, 이건 대체 뭐 하자는 짓이지?”
“오해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단독 행동으로 미 정부와는…….”
“그럼 이놈, 죽여도 되나?”
“…….”
용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에 브리짓이 얼어붙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용우가 문득 손을 들어 올렸다.
브리짓과 휴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손끝으로 향하는 가운데, 용우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퍼엉…….
그러자 하늘을 날고 있던 뭔가가 부서져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광학미채도 구현되어 있었군.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죽여봤자 드론은 시끄러워. 물론 고고도 드론도 운용하고 있겠지만…….”
미국이 용우와 브리짓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띄워둔 정찰용 드론이었다.
놀랍게도 홀로그램을 이용한 광학미채 기술이 적용되어서 수십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는 감쪽같이 하늘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 거리에서는 용우의 감각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그때까지 여유 만만 하던 휴고의 표정도 굳어졌다.
‘뭐야? 무슨 스펠인지 모르겠어.’
원거리 공격계 스펠을 썼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가 아는 그 어떤 스펠도 저런 효과를 내지 못한다.
용우가 말했다.
“에비게일 카르타가 무슨 장난질을 계획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거면 일 처리를 똑바로 했어야지. 그게 아니라 구세록의 계약자로서 내 앞에 나타나서 장난질을 하는 거라면 죽을 준비가 됐다고 받아들이겠다.”
그 말에 브리짓이 흠칫했다.
“…역시 저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었군요.”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용우가 조소했다.
* * *
미국의 구세록의 계약자는 애비게일 카르타라는 인물이다.
그녀는 현재는 전 세계에 30명도 남아 있지 않은 1세대 헌터이며, 과거 미국 헌터 관리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미국 헌터 업계의 판을 짠 인물이었다.
비록 정계에서는 물러났지만 그녀는 아직도 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미국 헌터 관리부에 강력한 입김을 행사하는 민간 고문이며, 미국 대통령 직할의 각성자 부대인 팔콘 포스의 기획자이며 지금도 어드바이저 직함을 가졌다.
그녀의 손길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기에 팔콘 포스는 군부대이면서도 미국의 상위권 헌터 팀과 필적하는 실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현재 신분은 미국 헌터 업계의 3강 중 하나인 팀 가디언즈 윙의 CEO였다.
브리짓 카르타는 애비게일 카르타의 양녀이며, 대외적으로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모두 그녀를 안다. 심각한 PTSD에 시달리는 애비게일 카르타를 대신해서 구세록의 계약자로서의 전투를 행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힘을 계승해 줬으면서도 구세록의 계약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권한을 공유하는 독특한 케이스.’
미켈레나 엔조 모로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건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은…….’
용우가 몸을 돌려서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갈 때였다.
“멈춰!”
휴고가 깜짝 놀라며 용우를 붙잡으려고 했다.
놀랍도록 민첩한 동작이었지만 그 손이 붙잡은 것은 허공뿐이었다.
블링크로 공간을 뛰어넘은 용우가 그의 뒤를 점한 채로 맹수처럼 웃었다.
‘휴고 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