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희는 아파트 옥상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내려가서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사태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는 채 그러자니 너무 불안했다. 그리고 리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발목을 잡았다.
“깜짝이야!”
그렇게 갈팡질팡하던 우희는 어느 순간 눈앞에 누군가 나타나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느닷없이 눈앞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헬멧을 써서 얼굴이 안 보이는 남자가 출현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나야.”
“모, 몰라서 놀란 거 아니거든?”
용우가 헬멧을 벗으며 말하자 우희가 투덜거렸다.
그런 그녀에게 용우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사과의 말에 우희는 말문이 막혔다.
가슴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울컥 치솟아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무서웠어…….”
우희는 일반인으로 살아왔다. 아무리 용우가 언제라도 헌터로 활약할 수 있는 힘을 줬어도 그녀에게 목숨이 오가는 싸움은 먼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 모든 것이 용우로 인해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용우가 돌아오는 순간부터 우희의 삶은 조금씩 파괴되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무장한 경호원들이 따라다닌다는 것은 남들과는 다른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심한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다.
게다가 결국 우려는 들어맞았다.
그녀는 눈앞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고, 자신을 납치하려는 자들에게 위협받아야 했다.
평생의 상처로 남을 경험이다.
용우는 우희에게 죄스럽고 미안했다.
“…….”
자신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돌아오더라도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고 조용히 숨어 지냈더라면…….
그런 자책감 어린 생각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용우는 그 생각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이 우희에게 실례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빠…….”
우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용우를 불렀다.
“괜찮아.”
그녀는 용우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게 오빠가 돌아와 준 대가로 치러야 하는 일이라면.”
우희는 눈물을 닦으며 용우를 올려다보았다.
“버텨줄게.”
우희는 용우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안다.
그가 평범한 헌터들과는 다른, 거대한 적과 싸울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적들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원흉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난 믿으니까.”
사람들에게 있어서 퍼스트 카타스트로피는 새로운 형태의 자연재해일 뿐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삶을 파괴당했는데, 원망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운명이나 신 같은, 실존하는지조차 모를 것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것만이 잃은 자들에게 허락된 초라한 권리였다.
“오빠가 이길 거라고.”
하지만 용우가 돌아옴으로써 우희는 알게 되었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원한의 대상이 사실은 존재한다는 것을.
자신에게 상냥했던 오빠를 납치해 갔던 누군가가 있다.
자신이 부모님을 잃은 그 절망적인 재앙을 만들어낸 누군가가 있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세상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난 괜찮아.”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 곳에서 돌아온 용우를 믿는다.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용우를 믿는다.
그러니까 괜찮다.
힘들어도 견뎌낼 것이다.
“우희야.”
용우는 우희를 와락 끌어안고 속삭였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응.”
“그놈들이 누구든, 무엇을 해왔든… 설령 세상 모든 사람에게 숭배받는 신이라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세상 전부가 적으로 돌아선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50억 인류 모두가 그들의 편을 든다고 하더라도, 용우는 그 존재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우리를 상처 입힌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야.”
그리고 당장 그 대가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가 있었다.
* * *
팀 이그나이트의 게이트 제압 작전을 지휘하다가 이 사태를 알게 된 다니엘 윤은 경악했다.
그는 곧바로 정신 공간으로 돌입, 다른 구세록의 계약자들을 불러 모았다.
“엔조 모로! 무슨 짓을 한 거냐?”
“엔조는 아직 오지 않았어.”
격노한 다니엘 윤의 말에 대꾸한 것은 대만의 허우룽카이였다.
다니엘 윤이 그를 노려보았다.
“허우룽카이, 네놈도 거들었나?”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팬텀이 일을 벌였는데 네놈은 상관없었다는 말을 믿으라고?”
“전의 일 때문에 심통이 난 건 알겠는데 근거도 없이 시비를 건다면…….”
허우룽카이가 감정을 드러낼 때였다.
“이보셔들, 대체 무슨 일인지부터 설명해 주지그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세록의 계약자의 가면 너머로 부스스한 검은 머리칼이 보이는 동양인 남자였다.
정확히는 일본인이다.
“난 그림 방송 중이었거든?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하고 온 참이니 시간 오래 끌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일본을 지켜온 구세록의 계약자, 사다모토 아키라는 대외적으로는 은퇴한 만화가로 일러스트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지난 13년 동안 일본 열도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광기의 폭군이다.
일본에서 ‘피의 레지스탕스’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살인마로 그동안 대놓고 자기가 죽였다는 표식을 남겨가면서 죽인 인간의 숫자만도 300명을 넘는다.
다니엘 윤이 혀를 차며 말했다.
“팬텀이 0세대 각성자의 가족을 납치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실행자는 엔조 모로.”
“확신하는 근거는?”
“대지의 로드의 힘을 쓰는 팔라딘이 목격되었으니까.”
“한국에서 한 거지?”
“그래.”
“그럼 알아서들 해. 난 간다.”
사다모토 아키라는 귀찮다는 듯 말하고는 정보 공간에서 나가 버렸다.
그는 예전부터 그랬다. 일본과 관련 없는 일이면, 정확히는 일본의 문화 시장에 영향이 없다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 영역을 건드리면 전쟁조차 불사하는 광기를 드러낸다.
국가의 위기 상황을 명분으로 문화를 규제하고 탄압하려던 일본의 정치가들을 비롯해서 그 협력자들까지 모조리 그의 손에 죽었다.
그 결과 일본의 권력 구도가 요동쳤지만 사다모토 아키라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0세대 각성자가 우리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더 이상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닐 텐데…….”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놈 편을 들 생각이냐? 미켈레가 살해당했는데?”
“증거는?”
다니엘 윤이 허우룽카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허우룽카이가 가면 안쪽에서 혀를 찼다.
“상황이 말해주고 있지 않나.”
“증거는 없다는 소리군. 심증만으로 그를 친다? 그게 옳다고 생각하나?”
“하! 다니엘 윤, 언제부터 그런 도덕군자가 되셨지? 한국의 군사정권을 끝장낸 장본인께서?”
그 말에 다니엘 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그 힘으로 인류를 지켜왔다.
그리고 역사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지점으로 이끌기 위해 손에 무수한 인간의 피를 묻혀왔다.
다니엘 윤도 예외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퍼스트 카타스트로피 이후 군부의 권력이 절대화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를 끝장낸 것은 팀 크로노스의 사장 백원태와 팀 블레이드의 사장 오성준으로 알려져 있고,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보면 그게 사실이다.
하지만 궐기한 각성자들이 군부와 대립했을 때, 그 이면에서는 수수께끼의 암살자에 의한 피바람이 불었다.
군부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 하루아침에 수십씩 죽어나갔고, 명령 체계가 박살 난 군부는 몰려드는 각성자들을 어쩌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이 배후의 암살자가 바로 다니엘 윤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군부의 권력이 붕괴한 후, 권력 구도가 재편성되는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 시절, 다니엘 윤이 위험인물이라고 생각한 이들 중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피차 마찬가지지.”
다니엘 윤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허우룽카이 역시 퍼스트 카타스트로피 이후 대만을 자신이 뜻하는 형태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인간을 죽여온 인물이다.
그 결과 대만은 여전히 독립된 민주국가로 남았다.
대만 경제는 퍼스트 카타스트로피 이전보다 훨씬 더 활성화되어서 최정상급 선진국의 일원으로 불리고 있다.
또한 붕괴하여 7개로 쪼개진 구 중국 영토 일부를 대만령으로 병합하는 데 이르렀다.
‘그걸 위해 1억을 넘는 인간을 죽인 놈이지만…….’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과거 2번, 9등급 몬스터의 출현에 맞서지 않고 방치했다.
그린란드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인간이 살지 않는 땅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허우룽카이가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주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기에 싸우길 원했던 자들조차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허우룽카이는 지금의 대만을 만들기 위해 중국이 회생 불가능 한 타격을 받길 바랐다.
퍼스트 카타스트로피로 베이징이 궤멸한 것에 이어 9등급 몬스터까지 출현한 중국은 실제로 그가 바란 대로의 길을 걸었다.
다니엘 윤이 말했다.
“도덕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게 아니다. 심증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적을 건드리는 게 어리석다고 말하는 거다.”
“놈이 다른 헌터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라는 건 인정하지. 셀레스티얼 이상이라고 하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리 없어.”
“감당 못 하면 그 뒷감당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하고?”
다니엘 윤이 빈정거리자 둘 사이에 날카로운 기류가 감돌았다.
“허우룽카이.”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카르타가 입을 열었다.
“엔조 모로를 계속 불러봤는데 응답하지 않고 있다. 전화라도 걸어서 확인해 보도록.”
“내게 명령하지 마라.”
“그럼 정중하게 부탁하지. 부디 전화라도 걸어봐 주지 않겠나?”
카르타가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하자 허우룽카이가 혀를 차더니 정보 공간에서 나가 버렸다.
카르타가 다니엘 윤에게 말했다.
“만약 미켈레가 0세대 각성자에게 살해당한 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 거지?”
“그럼 더더욱 적으로 돌려서는 안 돼.”
“어째서? 그 시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인데?”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 생각해 봐라. 미켈레가 살해당했다면, 그 시점에서 이미 우리를 능가하는 힘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미켈레를 죽이고 빙설의 창의 소유권을 계승하기라도 했다면?”
“…….”
그 말에 카르타가 숨을 삼켰다.
그녀만이 아니라 정보 공간에 남아 있던 또 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카르타, 당신이나 나와 달리 미켈레는 계승자를 정해두지 않았어. 그가 죽었을 때 빙설의 창이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알 수가 없고, 지금은 행방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0세대 각성자가 그걸 가졌다면… 그는 이미 우리가 감당 못 하는 괴물이야.”
그렇게 말하는 다니엘 윤의 목소리에는 절박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 * *
겨울을 싫어한다.
모든 것이 삭막하게 얼어붙는 계절.
춥고, 힘들고… 그것만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세계.
용우는 그런 세상 속에 있었다.
<으윽, 지, 지독한 놈……!>
저편에서 텔레파시가 들려온다.
상처 입은 적의 목소리다.
쿠구구구구……!
굉음이 울리며 마치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대규모의 흙먼지가 일어 오르는 곳에서.
“…하지만 정말 싫었던 것이 좋아지는 순간도 있게 마련이지.”
용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날렸다.
도약 스펠이 발동,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수십 미터씩 날아서 폭심지로 향한다.
-형상 복원!
흙먼지를 뚫고 접근하는 용우의 손에 새하얀 빛이 맺혔다.
그리고 급속도로 새하얀 창의 형상을 빚어내기 시작한다.
빙설의 창처럼 얼음처럼 투명한 질감의 창이다. 그 주변을 차가운 빛이 감싸고 있었다.
-프리징 버스트!
용우가 스펠을 발하자 그 창의 주변을 거대한 한기가 휘감으면서, 폭심지를 향해 아음속으로 쏘아져 갔다.
콰아아아아아!
폭심지 안쪽에서 새하얀 한기가 대폭발을 일으켰다.
작렬한 지점으로부터 반경 100미터를 모조리 빙결시켜 버리는 한기 폭발이었다.
6월 말에 페이즈 18 수준이었던 용우의 마력은 한 달이 지나는 동안 한 단계 더 상승, 페이즈 19 수준에 달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믿을 수 없는 위력이다.
‘쓸 만하군.’
그것은 용우가 던진 창이 빙설의 창의 마이너 카피이기 때문에 가능한 위력이다.
팔라딘에게 주어지는, 성좌의 무기의 마이너 카피를 고스란히 재현한 것이다.
용우가 미켈레에게서 빙설의 창을 강탈하고 나서 연구한 끝에 얻은 성과였다.
<크윽……!>
정신파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울려 퍼졌다.
콰콰콰콰콰!
그리고 폭발하는 기세 그대로 삐죽삐죽하게 형성된 거대한 얼음을 가르면서 지진파가 폭발했다.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진 않겠다!>
폭발을 가르며 걸어 나오는 것은 은회색 표면 위로 새카만 문양이 복잡한 패턴으로 양각(陽刻)된 갑옷을 입은 자였다.
그 손에는 길이 1미터 20센티 정도 되는 은회색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끝에는 주먹만 한 구슬이 달려 있고 그 안쪽에서 황록색 빛이 꿈틀거린다.
이계의 7성좌 중 하나, 대지의 로드의 힘이 담긴 무기였다.
용우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럴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어. 어디 열심히 발버둥 쳐보시지.”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적을 철저하게 괴롭히고 파괴하기 위한 용우의 계획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