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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우는 멀리서 자기 몸이 아닌 다른 몸을 움직이는 적을 몇 번이나 상대해 보았다.
심지어 그 자신이 그렇게 싸워본 경험도 있었다.
그렇기에 용우는 그 유용함의 이면에 따라오는 한계를 잘 안다.
‘무인 병기처럼 편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지.’
철저하게 자율성을 지운 인간을, 기계도 아닌 생명체를 자기 몸처럼 완벽하게 조종한다.
그것이 쉬운 일일 리가 없지 않은가?
목숨을 잃을 걱정은 없다고 해도 제대로 이용해 먹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리스크를 져야 한다.
만약 그 일에 리스크가 없다고 믿는다면, 그건 아직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이다.
용우는 적에게 무지의 대가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어때? 마땅히 따라와야 할 고통에 발목을 잡힌 심정은?”
<이, 이놈, 죄인 주제에……!>
적은 격통에 시달리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용우는 씩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퍼어어어엉!
미켈레의 전신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때까지도 대기 중이던 팔라딘 4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라딘들이 일제히 용우를 향해 공격 스펠을 쏟아내자 한기와 충격파가 덮쳐왔다.
콰콰콰콰콰!
하얀 폭발을 뚫고 용우가 뛰쳐나왔다.
‘역시 화력은 만만치 않군.’
용우가 한기를 무시하는 방어 스펠을 가졌음을 알고 충격을 터뜨리는 스펠을 병행했다. 영리한 선택이었다.
콰광! 콰과과과과!
연달아 폭발이 일어난다.
하지만 용우는 그 모든 공격을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회피했다. 그러면서 팔라딘에게로 다가갔다.
거리가 20미터 이내로 줄어들었을 때, 용우가 아공간에서 한 자루 창을 꺼내서 잡았다.
철저하게 투창용으로 설계된, 통째로 금속으로 만들어진 창이었다.
-초열투창(焦熱投槍)!
굳이 전력을 다해 던질 필요도 없었다. 가벼운 동작만으로도 창은 붉은빛에 휘감겨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사되었다.
콰아아아아앙!
폭음이 들려왔을 때는 이미 팔라딘의 몸통이 창에 꿰뚫린 후였다.
‘하나.’
일격으로 팔라딘을 처치한 용우가 몸을 돌렸다.
그의 뒤를 쫓아온 팔라딘 둘이 동시에 공격을 가했다.
-구전광(球電光)!
구체형 뇌격이 날아들어서 폭발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또 다른 팔라딘이 공격을 가했다.
-염동충격탄(念動衝激彈)!
푸른 에너지탄이 초음속으로 날아든다.
꽈아아아아앙!
하지만 그 스펠들은 팔라딘들이 의도한 지점에서 폭발하지 않았다.
용우가 허공장을 변형시켜서 비껴냈기 때문이다.
그래도 팔라딘들은 멈추지 않았다.
콰직!
용우가 내지른 나이프에서 뻗어나간 에너지 칼날이 팔라딘의 몸통을 찔렀다.
파지지지직!
그래도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용우와 팔라딘 2명의 허공장이 충돌하면서 격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이런.’
용우는 섬뜩함을 느꼈다.
이런 상태로 얽히는 것과 동시에 저편에서 어마어마한 마력 파동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죽어라, 이레귤러.>
미켈레가 조종하는 셀레스티얼의 머리 위에서 천사의 고리가 몇 배로 커지면서 확장되었다.
팔라딘을 희생양으로 던져주고 최대 파괴력의 공격으로 용우를 말살하려는 것이다.
‘이까짓걸로?’
용우가 코웃음을 치는 순간이었다.
콰직!
용우와 미켈레 모두 예상치 못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미켈레가 경악하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순백의 에너지 칼날이 그를 꿰뚫고 있었다.
<네놈이 어떻게 여길……?>
미켈레가 칼날이 날아든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순백의 표면 위로 황금과 백은으로 복잡한 패턴의 무늬를 양각(陽刻)해 넣은 화려한 갑옷을 입은 존재가 눈부신 빛을 발하는 검을 들고 있었다.
용우와도 한 번 만났던 순백의 고스트.
구세록의 계약자이며 이계의 성좌 광휘의 검의 힘을 받은 자, 다니엘 윤이었다.
<장난이 지나쳤다, 망상병자.>
<이 자식……!>
<앞으로 네 쓰레기 같은 조직이 멀쩡할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이젠 한국 밖으로 철수하든 말든 상관없어. 용서는 없다.>
싸늘하게 말한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셀레스티얼을 관통한 에너지 칼날이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앙!
그것으로 셀레스티얼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동시에 다니엘 윤이 사라졌다.
파악!
미켈레가 조종하던 셀레스티얼이 파괴되면서 안티 텔레포트 필드도 해제되었다.
다니엘 윤은 블링크로 공간을 뛰어넘어서 팔라딘을 두 조각 내버렸다.
별도의 스펠을 쓸 것까지도 없다. 압도적인 출력의 허공장으로 찍어 누르면서 광휘의 검을 내려치는 것만으로도 팔라딘을 끝장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팔라딘들을 처리한 다니엘 윤이 말했다.
<이번 일을 사전에 막지 못한 것, 미안하다.>
“…….”
용우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다니엘 윤이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상 믿어주지 않겠지만… 우리들, 구세록의 계약자들 모두가 너를 적대하는 건 아니다.>
“눈 가리고 아웅처럼 보이는군. 팔라딘을 처리한 것도 내가 조사하지 못하도록 입막음을 한 거 아닌가?”
<그렇게 의심한다 해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내 마음은 전에 만났을 때와 같다. 너와 적이 되고 싶지 않군.>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이겠지. 팬텀 같은 조직을 만든 이상 네놈들은 절대 나와 공존할 수 없어.”
용우가 서늘한 살기를 뿜어내었다.
다니엘 윤이 말했다.
<나는 팬텀과 관련이 없다.>
“그 말을 믿으라고?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나?”
<네가 내 말을 믿게 할 수만 있다면 무엇에든 맹세하고 싶군.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야.>
용우는 가만히 다니엘 윤을 노려보다가 물었다.
“지난번에 내게 안 해준 이야기가 있었더군.”
<그놈이 이야기했나?>
“다 잡은 물고기 취급을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그런 놈이지.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나?>
“놈은 말했다. 어비스로 파병된 24만 명은 처음부터 죽을 운명이었다고. 그리고 죽음으로 의무를 다함으로써 각성자 튜토리얼을 여는 초석이 되었다고. 그게 너희들이 믿는 진실인가?”
<…그렇다. 전에 말했던 대로 어비스에 소환된 자들은 몬스터들이 게이트라는 현상을 통해 지구에 도달하기 전에 요격하기 위해 투입된 선행 부대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것만은 아니었지.>
그 말에 죽 용우의 머릿속 한구석에 있던 추측이 확신으로 변했다.
“우리는… 제물이었군. 그렇지? 24만 명을 제물로 삼아서, 인류를 지키기 위한 각성자 튜토리얼이라는 게 구축된 거였어.”
<…….>
“하하하…….”
용우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을 제물로 바쳐서 지구에 초현실적인 힘을 내린다.
각성자들이 괴물과 싸우는 이 시대에도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그러나 어비스를 경험한 용우에게는 너무나 쉽게 납득이 되는 이야기였다.
왜 어비스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죽였을 때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을까?
어째서 어비스의 핏빛 하늘에 7개의 성좌가 나타난 후로는 인간 하나가 죽을 때마다 그 영혼을 받은 성좌가 아바타를 내려줬을까?
그것을 볼 때마다 용우가 느낀 것은 틀리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인신공양이었다.
더 빨리, 더 많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도록 유도한 것이다.
서로를 죽이는 것이 이득이 되도록.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절망적인 전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웃기지 마……!”
용우가 웃음을 뚝 그쳤다.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딴 수작을 부린 건 누구냐? 이 모든 것을 시작한 놈은 누구지? 너희들인가?”
<우린 그저 선택받았을 뿐이다.>
“그럼 너희를 선택한 건 누구일까? 인간일까, 아니면 신일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구세록이 이계에서 날아온 지침서라고 생각한다.>
그 말에 격정을 못 이기고 당장에라도 다니엘 윤을 공격할 기세였던 용우가 움찔했다.
“지침서?”
<이미 멸망한 세계에서, 앞으로 멸망할 세계를 위해 보낸… 멸망을 이겨내기 위한 지침서라고 생각했다. 구세록의 구절들을 예언이라고 믿은 이도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기록이고 경고였다. 장차 그런 일이 벌어질 테니 대비하라는 뜻이었지.>
“…….”
<각성자 튜토리얼이라 불리는 현상은 총 12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7개의 문이 열렸고, 앞으로 5개가 남았지.>
그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용우에게는 특히.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각성자 튜토리얼에 소환되는 인원의 수는 2만 명.
12번이라면 소환되는 총 인원은 24만 명이다.
어비스에 소환되었던 인원과 똑같아진다.
<12번째 문이 열린 후에 찾아올 결말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그 전까지 계속해서 더 위협적인 재앙이 인류를 노린다는 것을 알 뿐.>
“책임질 놈들은 이미 죽었다. 우리들 24만 명은 의지도 감정도 없는, 멸망한 이계 놈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희생당했을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으냐?”
<…….>
다니엘 윤은 대답 대신 한 걸음 물러났다.
<부디 인류에게 필요한 존재로 남아 있어다오, 0세대 각성자.>
그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고 텔레포트로 사라졌다.
용우는 굳이 그를 막지 않았다.
“하하하하하…….”
대신 얼굴을 감싸 쥐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담긴 감정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말로 하기에는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한참 동안 웃던 용우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우리의 원한을 받을 책임이 있는 놈이 없을 수도 있지. 세상은 이렇게나 빌어먹을 곳이니까. 하지만…….”
용우의 전신에서 강렬한 마력 파동이 일어났다.
“지금 당장 내 손에 죽어야 할 놈은 있다.”
용우는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준비를 마친 용우 앞의 공간이 찢어지듯 새카만 구멍이 나타났다.
* * *
구세록의 계약자, 미켈레는 그가 사는 이탈리아에서 딱히 눈에 띄는 사회적 지위가 없었다.
팬텀이라는 범죄 조직을 운영하지만 그 조직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두고 있지는 않다. 팬텀 조직원 중에 미켈레의 진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성좌의 힘으로 변신한 모습으로만 조종해 왔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부모 재산 물려받아서 놀고먹는 한량일 뿐이다. 그리고 미켈레는 굳이 그런 시선을 부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편이 활동하기 편했으니까.
“…….”
서재에서 눈을 뜬 미켈레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거금을 들여서 개조한 그의 집은 방음이 아주 잘된다.
안에서 누가 비명을 질러도 밖에서 듣지 못할 정도다.
미켈레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용우에게 의표를 찔려서 비명을 질렀을 때 이웃의 누군가가 알아차렸을 테니까.
“다니엘, 그 불신자 새끼가……!”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콰직!
고급스러운 원목 책상이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져서 주저앉았다.
“으아아아아아!”
그는 그러고도 성이 안 풀리는지 길길이 날뛰면서 서재를 때려 부쉈다.
자기가 이 서재를 꾸미려고 투자한 돈과 노력 따위는 지금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지지직…….
날뛰던 그를 멈추게 한 것은 통증이었다.
오른손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으윽.”
미켈레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오른손을 붙잡았다.
지난번, 팬텀 검거 작전 때 용우와 싸웠을 때보다 훨씬 강렬한 통증이었다. 그 사실이 미켈레에게 묘한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용서 못 한다……!”
미켈레는 통증을 떨쳐 버리듯이 주먹을 강하게 쥐면서 마력을 일으켰다.
그는 각성자 튜토리얼에 다녀온 적이 없다. 그럼에도 각성자였다.
성좌의 힘으로 스스로의 몸을 각성자로 개조했기 때문이다. 팬텀에서 이뤄지는 실험들도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다음번이 네 죽음의 날이다, 이레귤러……!”
미켈레는 서용우에 대한 증오를 불사르며 이를 갈았다.
“셀레스티얼과 팔라딘의 조합으로 부족하다면, 강림할 수밖에 없겠지.”
팬텀의 연구 성과로는 서용우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다니엘 윤의 개입만 없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같은 전력으로 싸운다면 승산이 희박해 보였다.
“어차피 불신자 놈의 눈을 피할 수 없다면 스페어를 써서 단번에…….”
미켈레가 중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할 때였다.
구우우우웅……!
갑자기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그의 뒤쪽에서 검은 스파크가 튀었다.
물리적으로 존재할 리 없는 현상이었다.
미켈레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오버 커넥트? 어떤 놈이? 설마 다니엘 윤 그 불신자 새끼가?’
그가 경악할 때였다.
그 구멍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를 붙잡고 구멍 속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구멍이 닫히면서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Chapter21 오만과 착각